[논평] 밑바닥 조센징의 노예구조가 되물림되는 구조 2판
  • ㅇㅇ(180.71)
  • 2019.06.1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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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적는다.

조센 지배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대부분의 조센징이 노예나 다름없던 신분으로 살던 것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앞서 조센 지배계급은, 현상태의 고착화를 위해 기술발전, 문화적발전을 등한시 하는 정도를 넘어서 멸시하고

파괴까지 했던 것을 말했었는데, 사실 조센의 지배계급이란 놈들도 벼룩의 간을 떼어먹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노예 조센징들은 하루 하루 끼니 걱정과 노후 걱정의 연속의 생활이었었는데, 사실은 지배층이란 놈들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양반들 중 좀 잘 먹고 산다는 놈들이 하루 2끼 밖에 못먹었으며, 그것마저도 3첩 반상을 먹으면 호화롭게 먹는다고

하였었다. 이 3첩 반상이란, 밥, 국을 제외한 반찬 3가지가 있는 반찬이었는데, 1가지의 절임식품과 2가지의 나물로

구성되는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흉년이 들거나 하면 최상위층 양반 빼고는 그것마저 못 먹는게 다반사였다.

조센 반도를 통치한다는 왕 조차 평소 식사로서 최대 5첩 반상을 들었을 뿐이다. 이는 각 지역에서 올려보낸 특산물

이란 것들이 조센의 운송 시스템의 미개함으로 인해 한양에 도달했을때는 도저히 조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된

상태였었기 때문이며, 도성 근처에서 구한 식재료만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왕은 가끔이라도 고기반

찬을 먹을 수 있는 존재였다.

이를 보면 조센의 지배층이란 계급이란 놈들도 얼마나 미개하고 하찮은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수백년 전의 송나라의

평민이나 동시대 에도의 평민 계층보다 문화적으로 미개했을 뿐더러 기본적인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

문이다.

이런 미개하고 되물림되는 노예 매트릭스인 조센의 시스템도 19세기 말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먼저 내적으로 맞았던 위기는 지배층(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그로 인한 노예수의 감소였다. 조센 지배층은 실용적

기술의 발달, 문명의 발달을 원치 않았고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노예들의 반발이 두려웠기에 하루 종일 하는 것이라곤

책이나 들여다 보면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노예 매트릭스를 강화시킬 생각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대 중국 서적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중국에도 없는 유교 사상들을 창조해 내었었는데, 이를 수백년동안 잠자코 지켜보던 노예들

중 일부가 직접 그런 사상들을 공부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들을 유생이라고

하며, 원래부터 양반 계층은 아니었으나 양반들의 그런 미개한 사상에 동조하고 지지함으로써 하위 지배계급을 형성

하게 된다. 하위 지배계급으로서 이런 유생들은 착취된 것에 대해 분배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자신들이 착취

당하는 일은 없게 되었고, 그것을 본 많은 노예들이 너도나도 유생인척 유식자인 척 하게 된 것이다. 이런식으로 노예

들은 절대적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사회에 아무런 생산성 기여도 못하는 미개한 지배계층만 늘어나게 되자, 노예들

이 아무리 생산을 해도 지배계급조차 다 먹여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노예들은 그냥 굶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조센징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껍질로 연명하거나, 논밭에 불을 지르고 산속으로 도망가 숨기도 하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었다. 그리하여 조센반도는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전 국토가 민둥산 천지가 되어버렸었다.

타 국가가 와서 손쉽게 점령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조센 반도는 그걸 가치조차 없었고, 아니면 조센반도에서 새로운 인

물이 나와서 조센왕조를 갈아치울만한 상황이었지만, 척박한 조센반도는 그런 인물을 내놓을 만한 곳도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개방 압력이 있었다. 서양 제국주의 및, 청, 일본제국 등은 조센을 비용을 들여 점령하기 보단,

꼭두각시 정부 쯤으로 놔두면서 천연자원이나 퍼 가고, 경제적 이권만 챙겨가려고 했었다.

조센반도내에서의 잦은 외국인의 출몰과 외국 문물의 입항은 미개한 조센의 통치 계급에게는 커다란 위기였다.

그래서 각종 경제적 이권은 퍼주는 대신 다른 부분은 쇄국정책을 펴는 매우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현재의 받을건 받고 쇄국정책을 펴는 북조센보다 더욱 미개하고 한심한 정책이었다.

그러다가 원래부터 조센을 속국으로 여기던 청나라가, 조센반도를 자꾸 혼자만 독차지 하려고 하고, 보다 못한

일본이 청을 물리치고 조센을 강제로 병합하게 된다. 사실 일본인들도 미개한 조센을 병합하는 것은 큰 손해인 것

을 알고 있었으며, 별로 원치 않았으나 수백년 전의 일명전쟁때처럼 청나라의 견제와 중국 본토 진출을 염두에

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원치 않는 병합이었지만, 이왕 병합한 마당에 조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차후에는 본토였던 일본에

완전히 흡수합병을 하여야 했기에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이유가 생겼었다.

그리하여 도시간 전철의 부설, 동아시아 최대의 인천항 개항, 차후 중국 본토를 견제하고 진출의 교두보가 될 조센

반도 북축에 중화학 공업단지 건설, 미개한 농경 기술로 토지를 활용 못하던 조센반도 남측에는 농경 기술의 보급,

토지 개간, 토지의 효율적 사용을 위한 재분배 등 기간 시설을 만들고, 공평한 교육 사업, 기본적인 의식주 문화의

보급 등 전력을 다해 조센의 발전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지배계급-노예로 나누어져 있던 신분 구조는 철폐되었으며, 이는 지배계급이었던 양반과 준

지배계급이었던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을사조약 반대, 일한합방 반대 등은 모두 양반과 유생 계급에

의한 상소문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한합방 이후에도 일부 양반과 유생 계급들이 신분제를 철폐하고 능력 위주의

합리적 사회로 바꾼 일본을 증오하고 반대 및 테러활동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일한합방을 성사시켰던 조센 최고의

지식인이자 애국자, 살아있는 양심 그 자체였던 이완용을 ‘매국노’로 음해하는 소문들을 퍼뜨려서 오늘날까지

매국노의 대표명사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도록 만든 놈들이 양반과 유생 계급이었으며, 일부는 이완용의 지방

시찰시에 돌 투척 등의 테러, 암살 기도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일한합방 시기 가장 큰 반일운동 이었던 3.1운동도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동조하여 일으킨 것이었으며, 김구 등으로 대표되는 반일 테러리스트들도 유생이거나

유생 집안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현대 위인전 등에는 차마 아무것도 안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먹고 살지도 못했던

무가치한 존재였던 유생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그랬는지 전부 몰락한 양반가의 유생 등으로 묘사하고

넘어가곤 한다.

즉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조센시대로 회귀하고 싶은 바램,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배계급으로서 노예들의 잉여생산물을 갈취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표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러한 과거에만 목 메는 무능한 과거의 지배계급은 소수였으며, 소수의 인원이 조센반도를

떠나 조센을 속국 취급하는 중국에서 모여 간간히 테러활동을 저질렀을 뿐이었다.

물론 지배계급 이외의 일반 민중에게는 일본은 커다란 은혜와도 같았다. 당장 노예신분에서 해소되었을 뿐더러

교육 등에서 기본적인 혜택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으며, 능력만 있으면 출세 기회도 언제든 열려있는 사회였기 때문

이었다. 또한 농업 등의 생산성 증가와 보건 위생등의 향상에 힘입어 조센시대에 비해 훨씬 안락하고 길고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었으며, 조센 반도 역사상 최초의 풍요로움, 단지 지배층에 한정된 것이 아닌,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

는 진정한 풍요의 시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조센의 인구는 급증하였으며, 해외 이주의 자유도 얻고 세계라는 것이

단지 조센반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일반 민중들도 깨달아서 일본 본토 및 하와이 미국 본토, 심지어는 남미 등으로

활발하게 이주하기도 하였으며, 조센인들이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풍요로움의 정도는 일본 본토와 비견될 정도여서, 경성에 있던 경성종합운동장은 도쿄에 있던 그것 다음으로 큰

아시아 2번째 크기의 운동장이었으며, 경평(경성-평양)축구경기가 열릴때면 3만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를 지켜보았

고, 인구 30만의 경성에만 백화점이 무려 5개 있었는데, 현대 조센의 인구 30만 도시 중 백화점이 없는 도시도 있다

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다. 비단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서도 발전의 혜택을

누렸는데, 지방 거점도시가 철도축을 따라 형성되고 발전한 시기가 일한합방 시절이었으며, 조센 맨 남쪽 귀퉁이의

섬인 제주도조차 동경에서 유행한 스카프는 2주 후에 경성에서 유행하는데, 제주 소녀는 그 스카프가 경성 백화점에

진열되기도 전에 이미 차고 있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대단히 풍요로운 시기였다. 실제 지표상으로도, 1930년

당시 일본 본토의 1인당 GDP가 2000년대의 달러 가치로 환산했을 때, 2500달러였었고 조센 반도는 1800달러에 달

하였었다. (남조센이 6.25후 이 GDP를 다시 달성한 시점이 1980년이다)

이렇게 풍요로웠던 시기였는데 왜 조센에서는 (조센 교과서도) 왜 악랄한 일제가 온갖 수탈을 저질르고 억압했다고

지금도 믿고 있을까?

사실 지배계급이었던 놈들에게는 그 말이 다 맞다. 단지 현대교과서에도 전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배계급이었던 놈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형태로 서술되었을 분이다.

지배계급에게는 일본의 합리적인 토지 재분배가 원래 자기네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빼앗아가서 멋대로 나눠준 것이기

에 그것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졌다 한들 오직 토지 수탈당했다라고만 주장하는 것이며,

조센 남부의 생산성의 증대로 남는 여유분의 쌀들을 일본 본토로 제 값을 치르고 수입해 간 것도, 지배계급에게는

원래는 모두 다 자기 것이었으므로, 일본 놈들이 막무가내로 배에 싣어 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일제가 억압 및 탄압 했단 것도, 조센 각 지역의 양반과 유생들은 일한합방 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계속 그

지역의 유지 노릇이나 양반 노릇을 하려고 하고 신분제 철폐를 방해했기에, 혹은 적어도 지역 정치에 참여하거나

이권을 일부 가질 수 있도록 요구했었지만, 철저히 묵살 당했기에 그랬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센인들은 기존 지배층의 부당함을 깨닫고 일본의 합리성과 그들의 노력을

보았기에 일본에 대한 반대 없이 잘 적응하여 살았었고, 일본의 지원을 받은 조센경제의 발전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이었다. 이름없는 일반 조센인들의 협력 없이는 절대 이룰 수 없었다.

물론 1940년 이후 태평양 전쟁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전면전 형식으로 나아가게 되어, 일본 본토, 조선의 경제가

모두 극도로 어려워지고, 금속 등의 필수 물자를 공출해가기도 했으며, 일부는 무보수로 노동을 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단지 조센반도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똑같았으며, 오히려 일본 본토에서는

여성들과 학생들, 전쟁 후기에는 10세 미만의 소학생까지 전쟁 물자 생산과 전시 훈련에 동원했기 때문에,

조센반도의 상황은 오히려 평온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일본 본토는 무수한 폭격을 맞아서 본토 일본인들이

많이 희생되었지만, 조센인들은 일본군의 일원으로 무수한 경쟁률 속에서 자원입대하여 같이 전쟁에 참여해놓고

본토 폭격은 하나도 맞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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