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아닌데 '천황'이라는 일본… 그래도 '일왕'은 우리만 쓰는 말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이봉창 의사도 '천황' 호칭
오는 10월 나루히토 일왕(日王)의 공식 즉위식이 열린다. 일본 정부는 한국·미국·중국 등 195개국 정상을 초청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문 대통령이 그 행사에 참석한다고 '친일파'라고 욕할 우리 국민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이미 한 차례 일왕을 천황이라 부르며 즉위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
상식적인 국민은 그 편지를 문제 삼지 않았다. 과거사와 별개로 지금 한·일은 미국을 가운데 두고 손잡은 간접적인 동맹국이다. 한국 안보는 한·미 동맹 없이 불가능하고, 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그런 나라의 실권 없는 군주에게 국민을 대표해, 국익을 위해, 관례에 따라 그 나라 호칭을 써서 예를 표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문 대통령이 일왕이란 말을 썼다면 그게 되레 의미 없는 외교 참사였을 것이다.
일왕은 최근 30년간 새로 생긴 한국어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이 "세계에서 우리만 쓰는 말"이라고 했다. 미국도 중국도 대만도 동남아도 안 쓴다. 태국은 자국 왕은 '크삿(왕)'이라고 쓰면서 일왕은 '차크라팟(황제)'이라고 쓴다.
일본 공산당은 2004년까지 군주제 폐지를 당 강령에 명기했다. 지금도 '정세가 무르익었을 때 국민의 뜻에 따라 존폐를 해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그들도 '천황제가 문제'라고 하지 '일왕제는 문제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한자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인은 '일왕(니치오·日王)'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한 세대 전까지는 우리도 일왕을 천황이라 불렀다. 그 시절이라고 애국심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식민통치를 몸으로 견딘 사람은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 더 많이 살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왕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1900~1932) 의사도 김구 선생을 만났을 때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천황을 안 죽이오?"라고 물었지 "왜 일왕을 안 죽이오?" 하지 않았다.
일왕이란 단어는 1989년 전후 퍼지기 시작했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가 잇달아 불거진 시기였다.
초기엔 천황이란 말과 혼용되다 점차 일왕이 천황을 밀어냈다. 다만 자세히 보면 이런 변화는 꼭 보편적이지 않았다.
지금도 한국인 대다수는 일상에서 일왕보다 천황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좌파건 우파건 전문가 대다수도 논문 쓰고 토론할 때 천황이라고 하지 일왕이라고 하지 않는다.
역대 정부도 줄곧 천황이란 말을 썼다. 1998년 박지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상대국 호칭 그대로 불러주는 게 관례"라고 정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전임 일왕과 만나 "천황께선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안다"고 덕담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일왕이란 단어는 정확히 말해 '언론 용어'"라고 했다. 이 말은 학자가 논문 쓸 때 쓰는 말도, 외교관이 외교할 때 쓰는 말도 아니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대화하며 쓰는 말이 아니라, 한국인끼리 한국말로 한국 매체에 글 쓸 때 '나는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표시 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천황은 괴로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래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됐다. 대통령은 일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는데, 언론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쓴다. 이상하지 않은가.
100자평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