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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돈 좀 내놓지? 남는 돈 아니라니까?

2009년 04월 13일(월) 제83호
고동우 기자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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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들은 정말 ‘금고’에 꽁꽁 돈을 숨겨둔 채 ‘제 잇속’만 챙기며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걸까. 경제를 살릴 회심의 카드처럼 얘기되는 사내 유보금의 실체를 알아봤다.

이른바 기업의 ‘사내 유보금’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 문제에서는 정부·여당과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처럼 한목소리를 낸다. 경제가 어려우니 사내에 쌓아둔 이익 잉여금을 일자리와 투자에 쓰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지난 2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기업 금고에는 100조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이 보관돼 있다. 지금 즉시 금고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금속노조도 4월2일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이 145조5000억원에 이른다”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고용안정과 상생협력을 위한 기금 마련을 촉구했다.

   
4월3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린 ‘서울 모터쇼’ 행사 도중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근 자동차업계에 만연한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위).
하지만 기업 쪽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금속노조로부터 ‘고용 없는 성장’의 대표 기업으로 질타를 받은 현대자동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GM이 부도 위기에 몰려 있는 등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산업이 힘든 상황 아니냐. 언제, 어떤 위험이 터질지 모르는데 사내 유보금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이미 중소 부품업체의 유동성 지원을 위한 상생협력 펀드를 조성하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강조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내 유보금을 연계하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사내 유보금, ‘남아도는 돈’일까

정치권과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경제 난국을 돌파할 ‘회심의 카드’라도 되는 양 꾸준히 사내 유보금을 언급하지만 실상은 기대와 거리가 먼 셈이다. 재계의 반박은 설득력이 없지 않다. 우선 적게는 100조원, 많게는 300조원까지 거론되는 규모부터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사용 가능한 돈은 사내 유보금 가운데 현금·단기금융상품 같은 ‘현금성 자산’에 한정하는 게 옳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전체 상장기업의 사내 유보금은 393조원에 달하지만 이 중 현금성 자산은 약 18%(71조원)이다. 나머지는 기업 소유의 건물·토지·생산설비에 포함되어 있어 투자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동계 쪽도 “사내 유보금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당장 현금화하기가 쉽지 않다. ‘남아도는 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재계는 한발 더 나아가 현금성 자산에도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을 태세다. 전경련 배상근 경제본부장은 “지금 당장 보릿고개로 배가 고프다고 해도, 다음 해 모종을 위한 종자 쌀을 먹는 농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현금성 자산은 기업이 통상 원재료·부품 구입, 수입대금 결제, 인건비 지급, 차입금 상환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필수 운영자금이다. 알다시피 일시적으로 운영자금이 없어서 흑자도산하는 기업도 많다. 무리하게 운영자금을 헐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보다는 효율적으로 관리해서 흑자도산을 막아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지난 2월 간담회(위)에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경제단체장들은 사내 유보금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기대치 부풀린 주역은 다름 아닌 재계


기업들이 막대한 사내 유보금을 ‘필수’로 여기게 된 것은 외환 위기 이후부터다. 현대경제연구원 백흥기 연구위원은 “1997년 이후 과잉·중복 투자에 대한 부담감, 부채비율 축소에 대한 압박, 투자자들의 단기 성과와 배당 요구 증가, 적대적 M&A 위협과 경영권 방어 비용 증대, 은행권의 단기 실적주의적 경영 행태 등으로 투자가 부진해지고 보수적 경영이 일반화되었다”라고 분석한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이상호 연구위원은 이러한 재계의 ‘현실론’에 대해 “나름 일리가 있다”라고 일단 수긍한다. 하지만 ‘적정 수준’을 넘어 ‘너무 지나치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10대 그룹의 사내 유보금 비중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기업에 비해서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9월 말 현재 유보율(잉여금/자본금)이 787.13%로 지난해에 비해 67.07%가 증가했고, 특히 삼성과 현대는 평균 1000%가 넘을 정도로 월등히 높다. 이는 주요 대기업의 잉여금 규모가 자본금의 10배를 웃돌 만큼 자금 여력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자동차그룹만 보면 2000~2003년의 경우 이윤의 80~84%를 사내에 축적했지만 2004년부터는 85~90%를 오르내리고 있다. 반면 이 기간에 고용계수와 노동소득분배율은 급전직하했다는 게 금속노조의 분석이다. 매출액 10억원당 고용된 노동자 수(고용계수)를 환산해보면, 2.52명(2000년)에서 1.45명(2007)으로 떨어졌고 분배율은 같은 기간 118.9%에서 35.2%로 추락했다.

이상호 연구위원은 이를 근거로 “주요 그룹의 자본 집중이 상당 부분 인건비 절감, 협력업체의 단가 인하와 외주화, 비정규직 투입 등으로 이루어진 만큼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 고용안정기금, 사회연대기금 조성을 위한 일정 비율의 사내 유보금 출연은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노동·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 요구하는 유보금 10%의 ‘특별세 징수’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라고 선을 긋는다.

사내 유보금을 둘러싼 논란의 중요한 진실 중 하나는 이 돈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인 주역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재계 자신이라는 점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재계는 규제 완화를 압박하는 핵심 무기로 이를 활용했다. 그해 7월 대한상공회의소가 <기업 유보율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발표한 게 단적인 예다. 대한상의는 이 보고서에서 매출액 1000대 기업의 유보율이 매년 상승하고 있다면서 투자 환경 개선과 출자총액제 완화 등 제도 정비를 주장했다. 대선이 끝나자 전경련 핵심 간부는 각종 매체에 출연해 “현재 500대 기업의 유보금만 340조원이다. 정부가 규제를 풀고, 사회적 비용을 낮춰주고, 분위기만 잡아주면 기업 투자가 상당히 활성화될 것이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정부가 출자총액제 완화를 비롯해 재계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자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는 아예 언급도 안 했던 ‘현금성 자산’이니 ‘필수 운영자금’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의 투자를 촉구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 인사들이 살짝 안쓰러워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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