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다. 그것도 병역의무도 참정권도 없는 2등 국민이었다.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는 대가로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향상되리라 믿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징병 1기였던 우수용 씨가 2010년 1월 조선일보에 투고한 에세이 중 일부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관련기사: ‘저도 반민족 행위자였습니다’)
서울대 경제연구소 정안기 객원연구원(전 고려대 경제학과 연구교수)은 지난 20일 [‘이승만TV' 위기 한국의 근원 : 반일 종족주의 시리즈 17 - 누구를 위한 징병인가]에서 우 씨의 에세이를 소개하며 “1944년~1945년 일본이 시행한 조선인 징병제가 폭압‧강제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반일강박관념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정 연구원은 앞서 ‘반일 종족주의 시리즈 11 -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 강의에서 조선인들이 육군특별지원병제에 자발적‧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조선인 지원병제, 조선인들이 먼저 일본에 요구”
이날 정 연구원은 “조선인 징병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징병이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1920년 이래 조선인 정치세력은 조선인의 국민적 권리를 주장하는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했다”며 “하지만 일본은 조선인의 낮은 민도와 교육 수준을 거론하며 시기상조(라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럼에도 조선인 정치세력은 굴하지 않고 재차 우수한 자질의 조선인에 한정한 지원병제 시행을 주장했다”며 “이러한 경위를 거쳐 1938년 4월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행됐다”고 밝혔다.
정 연구원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시행하는 당시까지도 일본은 조선인의 군사적인 자질과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며 “그런데 (조선인을) 실제로 참전 시켜보니 (조선인은) 발군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일전쟁 중)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고 전사했다는 이인석 상등병의 등장은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했다”며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육군특별지원병제에 대한 높은 지원율, 중일전쟁 참전에서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두고 조선인 사회에 애국심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일본의회가 조선인 징병제 시행을 결정하자, 감격했던 조선사회
정안기 연구원은 “결국 1942년 5월 일본 제국의회는 조선인 징병제의 시행 준비를 결정했고, 조선인 사회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며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드디어 일본 정부를 설득했음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징병제 시행을 계기로 조선인 사회는 병역의무라는 일본 국민의 자격을 취득했다”며 “참정권의 획득과 국민 의무로서의 징병이라는 의무와 권리를 확보하게 됐다는 점에서 국민 자격을 취득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조선인들 일본어 문맹자 포함 22만명이 징병제 지원”
정안기 연구원은 징병제 시행 이후 전개 과정을 설명해 나갔다. 그는 “1942년 5월 이후 조선총독부는 호적 정비, 일본어 교육의 강화, 징병제 계몽 운동을 적극 추진했고 1943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징병 적령자 신고를 개시했다”며 “1944년 4월부터 8월에 걸쳐 제 1기 징병검사가 실시됐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자신이 정리한 ‘1944년도 징병검사와 장정들의 학력분포’ 표를 제시하면서 “조선 전역에 걸쳐서 총 수험인원이 22만2295명이었고, 그 가운데 약 10만2000명정도의 인원이 미취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등학교도 들어가보지 못한 이 사람들이 (징병) 대상이 됐다는 것”이라며 “미취학 장정들의 일본어 능력수준을 검토해보니, (일본어를) 이해하는 비중이 60%를 차지했고, 이들 상당수는 그런 일본어 문맹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때문에 징병 제1기의 징집은 당시 일본 병역법이 규정하는 체격 등급의 순위가 아니라 일본어 능력의 순위로 (합격 기준을) 변경해야만 했다”며 “조선총독부는 청년훈련소를 설치해서 징병 적령기 미취학자에 대한 일본어 교육을 실시했고, 실제로 1944년 9월 당시 조선청년훈련소는 공립과 사립을 포함해서 총 2800개소에 달했으며 입소생도 약 12만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정 연구원은 “(징병검사를 통과한) 군병 징집자 예정자는 경성, 평양, 시흥에 소재하는 조선총독부 군무예비훈련소에 입소해서 1개월 과정의 기초 군사훈련과 일본어 교육을 이수해야만 했다”며 “이후 이들은 귀향 이후 징집영장의 발령을 받고 관내외 일본군에 입영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인 병사 11만6000명 참전...조선인을 위하는 길이라 믿어“
이어 정 연구원은 조선인 병사의 전쟁 동원 규모와 전사자 실태를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병사는 총 11만6294명으로, 이중 귀환자는 11만116명, 전사자는 6178명이었다. 전사자(6178명)의 대부분은 육군병에서 나왔다(5870명, 전사자 중 95.0%).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조선인 육군병의 91.4%가 북방권(일본, 조선, 사할린, 만주, 중국, 대만‧8만6831명 동원)에 배치됐음에도, 전사자는 남방권(필리핀, 뉴기니아 등, 버마, 고사하라 등‧8147명 동원)에서 많이 발생(전사자 5870명 중 4707명)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전사자 5870명 대부분은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시행된 ‘징병제 출신’이 아니라,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에 의해 동원된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이었다는 게 정 연구원의 지적이다. 그는 이에 대해 “징병 1기의 본격적인 징집은 1944년 9월 이후였지만, 일본의 전황이 절망적 항전기에 접어들면서 선박 수송력 부족으로 격전지였던 남방권에 대한 병력 파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연구원은 “조선인 병력 11만6294명은 1945년 8월 당시까지 일본군 전체의 1.44%에 불과했다”며 “일본군 전사자 총수는 연인원 약 192만명으로 약 23.7%의 전사율을 기록했고, 조선인 전사자는 일본군 전체 전사자의 약 0.32%를 차지하는데 불과했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마지막으로 우수용 씨의 에세이를 소개하면서 ”조선인 징병자들은 일본과 천황에 충성하는 것이 결국 조선인을 위하는 길이라 간주했고, 그래서 이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던 것“이라며 ”1944년‧1945년 일본이 시행한 조선인 징병제는 표면적인 법제적 강제성과 달리 국민의무의 이행이라는 자발적 동원을 특징으로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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