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구희언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2.10.16 10:37:00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아내 김정숙 씨가 세상과 만났다. 저서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를 출간하고 북 콘서트를 연 것. 그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갱상도’ 남편 이야기.
“첫사랑, 첫 직장, 처음은 항상 떨리죠. 이 자리도 무척이나 떨리지만, 많이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남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고 싶다네요. 제가 듣기엔 참 좋은 말 같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아내 김정숙(58) 씨가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9월 10일 서울 건국대 새천년기념관에서 열었다. 책에는 신영복 교수, 김상중, 이은미, 김제동, 손숙, 사진작가 김중만, 만화가 윤태호 등 저명한 문화 예술 전문가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다.이때만 해도 문재인이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기 전이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뒤에서 만난 그는 빼곡한 글씨가 쓰인 진행표를 들고 거울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연습에 한창이었다.
‘사람다운 삶’에 대한 고민 책에 담아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남편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고 평화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해봤더니 문화계 인사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요즘 묻지 마 살인, 성폭력, 왕따, 자살 등 개인의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이 많은데 제가 만난 9명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인간답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사람에 대한 열정과 배려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냈어요.”
책의 부제는 ‘어쩌면 퍼스트레이디’. 상당히 도발적이다. 그는 “출판사 측에서 정한 제목”이라며 “책 나오고 남편에게 많이 혼났다”라며 민망한 듯 웃었다.
“요새는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어요. 바쁜 와중에도 남편은 저녁을 꼭 집에서 먹고 싶어 해요. 부산 선거, 대전 선거 끝나고 돌아오면 저녁 8~9시쯤 되는데도요. 저도 힘들지만, 집에서 쉬고 싶은 그 마음을 아니까, 남편은 또 ‘저라면 받아주겠지’하고 생각하니까 서로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죠. 다음에 책 낼 기회가 된다면 살림살이나 손님 초대, 음식 만들기에 대한 책을 내볼까도 싶고(웃음).”
평소 동대문에서 옷을 즐겨 사 입는 그는 “오늘 입은 것도 동대문표”라고 했다. 대기실에서 만남을 마치고 공연을 보려고 객석에 앉았다. 김씨가 만난 사람들의 영상 상영이 끝나자 만면에 미소를 띤 그가 무대에 섰다.
“마음이 힘들 때 신영복 선생님의 여백 있는 글에서 위안을 받았어요. 참 존경하는 분이에요. 오랜 시간 감옥 생활을 했지만, 절망과 분노가 아닌 희망을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은미 씨는 무대에서의 카리스마와 외모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고, 닮고 싶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드라마 ‘추적자’에서 강동윤을 아주 얄미울 정도로 잘 연기한 배우 김상중”과의 만남이라고. 김씨는 즉석에서 목소리를 깔고 극 중 대사를 선보이기도 했다.
“(목소리를 깔고) 혜라야,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 보면 깔려 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이야. 그 장면을 보면서 ‘맞아, 큰 마차가 지나가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했었는데 드라마를 끄고 생각했어요. 큰 권력(마차)은 잠시 쓰라고 빌려준 것이지 폭력 행사하고 막 쓰라고 준 것은 아니잖아요. ‘몇 날 몇 시에 그 길을 지나갈 것이다’ 예고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고, 사람이 너무 많아 피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요. 사회에서 출중한 아홉 사람을 만나면서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돈과 권력 때문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외당하고 있을까, 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이 책에 담겨 있어요.”
1 북 콘서트 현장에 전시된 김정숙 씨의 저서. 2 행사는 토크와 공연이 함께하는 형태였다. 밴드 카피머신의 공연 모습. 3 ‘시사인’ 주진우 기자가 김정숙 씨를 인터뷰하고 있다.
‘안개꽃 그녀’ 김정숙을 파헤치다
6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한 문재인 후보와 김정숙 씨, 아들 문준용 씨.
밴드 카피머신의 공연이 끝나고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의 소개로 김씨가 다시 무대에 등장했다. ‘인간 김정숙’ 대해부의 시간이었다. 남편이 군복무할 당시 먹을 것 대신 안개꽃을 한아름 안고 면회를 갔다는 김씨의 ‘안개꽃 러브 스토리’는 이미 세간에 잘 알려졌다. 7년 열애 끝에 결혼한 부부의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의 여정이 김씨의 답 속에 녹아 있었다. 질문자로 ‘시사인’ 주진우 기자가 나섰다.
▼ 요새 힘드시죠.
“힘들어요. 남편이 저질러놓은 일이 커서 뒤치다꺼리하기 바빠요. 일정도 많지만, 주변에서 ‘문재인! 문재인!’ 외쳐대니 저는 아무것도 아닌 먼지처럼 살아요. 남편이 집에서 글 쓰고 정책 연구하기 바쁘니까 신경 예민하지 않게 편안하게 있으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부유물처럼 살게 되더라고요. 호호, 먼지가 그렇잖아요.”
▼ ‘어쩌면 퍼스트레이디’가 부유물이요?
“출판사 사장님이 책도 팔아야 한다고 그러셔서(웃음). 밤에 조금 자는 시간 발에라도 채이면 깰까봐 침대 끄트머리에서 자려니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 그래도 남편이 좋아요?
“예, 그 사람 좋아요. 호호. 예전에도 콧대 높은 김정숙이었거든요. 욕심이 많아서 내가 가진 걸 남을 위해 쓸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이 있었는데, 바깥사람이 그러는 걸 쫓다 보니 덩달아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은 백 선물 같은 건 몰라요. 자기 책 사는 것밖에 모르죠. 그래도 생일날에는 꽃도 사주고, 밥이랑 포도주도 먹고 마셔요.”
▼ 노래는 안 합니까. 예전에 문 후보에게 수십 번 노래를 불러달라고 권했는데 안 한다고 하다가 나중엔 정색을 하던데.
“꽃 사주는 남편이 귀여워서 제가 대신 노래하죠.”(김정숙 씨는 경희대 성악과 72학번이다.)
▼ 마냥 좋기만 했나요. 싸우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완전 경상도 남자와 서울 여자의 만남. 이건 극과 극의 대비거든요. 남편이 ‘내 니 밥 안 굶게 해줄게’라고 선언해서 믿었죠. 남편이 효자예요. 장남인데 혼자 계신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하기에 흔쾌히 따라갔어요. 그런데 왜 싸웠느냐면, 기가 막힌 게 둘째를 임신했을 때예요. 일요일인데 남편에게 ‘나 너무 힘드니까 당신 아기 좀 봐’ 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다고 재차 말했더니 저보고 ‘엎어져 자라’ 이러는 거예요. ‘아기 봐달라고 한 게 그렇게 힘든 일이냐’ 했더니 ‘아, 마 그럼 디비 자라’ 하는 거예요. 정말 울면서 디비 잤거든요. 동네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들었다고 하소연했더니 ‘그냥 드러누워서 자면 되는데 그게 무슨 욕이야’ 하더라고요. 경상도 사투리에 적응을 못해서 몇 번 싸웠죠(웃음).”
▼ 싸우면 누가 먼저 사과하나요.
“이거는 삶의 지혜인데요. 끝까지 말하지 말아야 해요. 성질이 급해서 남편이랑 싸우면 하루 이틀은 겨우겨우 참는데 이틀 밤을 못 넘기고 ‘네가 잘못했지’ 이렇게 대들어요. 그럼 벌써 진 거예요. 시집 간 딸에게도 ‘살다 보면 부부싸움을 할 수는 있는데, 절대 먼저 말 시키지 마라. 그러면 지는 거야’라고 가르쳐줬죠.”
▼ 남편이 집에서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죠.
“없어요. 제가 많이 시켜요. 밥 먹을 때도 ‘맛있어?’ 하면 ‘응’ ‘아니’ 단답형으로 말하니까, 질문할 때 ‘이건 이러이러한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의견을 물어보죠.”
▼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배, 동료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초 겪는 걸 보고 정치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결정은 남편이 했어요. 저는 따라왔고요. 많이 반대했고 사실 내키지도 않았어요. 엄청난 일이니까요. 지금 많이 힘드네요. 남편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단단하다’는 말이에요. 갑자기 일어나는 증오를 덮고 모든 사람을 안고 가야 할 상황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어도 감정 노출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며 아주 단단한 바탕이 없다면 훌륭하게 일을 치러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집에서는 굉장히 많이 울고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단호하고 점잖게 일 처리하는 모습에 ‘이 사람은 쓰러지지 않겠구나,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겠구나’ 생각했어요.”
▼ 남편이 집에서 우셨군요.
“같이 울었죠. 남편은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집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감은 열리지 않고 잎만 무성한 거예요. 3년째에도 그렇기에 남편에게 ‘올해도 감이 안 열리면 나무 잘라버릴 거야’ 으름장을 놨어요. 감이 안 열리는 데도 기다린 이유가 남편이 풀 한 포기 뽑는 거, 가지 치는 걸 안타까워하기 때문이었죠. 저는 꽃꽂이를 배워서 과감하게 치거든요. 이 사람은 제가 머리 자른 건 못 알아봐도 가지 친 건 알아봐요(웃음). 그랬더니 볼 때마다 감나무를 쓰다듬고 중얼중얼대는 거예요.”
▼ 부인은 안 껴안고 감나무를 껴안고 있어!
“아이고, 왜 저러나 싶었는데 그해에 감이 3개나 열렸어요. 너무 놀랐는데 남편이 감나무한테 ‘나는 너를 사랑한다, 잘 커라, 안 그러면 마누라가 너를 자른대’라고 여름 내내 그랬다는 거예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 단단함, 아름다움. 또 있습니까.
“눈이 참 예쁘거든요, 남편은. 호호호호. 좋아한다는 걸 말로는 표현 못하고 눈으로 막 해요. 아침에 넥타이 맬 때 눈빛을 보면 아주 경건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모습이죠. 결심한 대로 실천하는 모습에 철저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30년 동안 항상 소수자의 편이었거든요. 대통령 후보로 나선 걸 환영하진 않았지만 국민과 소통할 자세와 청렴한 모습에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림자로 남기보다 선두에서 남편 돕고파
대담이 끝나고 진행된 객석과의 질의응답. 평일 저녁인데도 그를 보러 먼 곳에서 찾아온 열성팬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 책을 읽어보니 문장이 좋던데, 따로 공부를 했나요.
“남편과 사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살아야 하는 과정과도 같았어요. 대화하려면 남편이 읽는 인문사회 서적을 읽어야 했죠. ‘여보,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거 뭐야’ 그러면 ‘마 너 책 읽고 이야기해라’ 이럽니다. 남편이랑 이야기해보겠다고 머리글, 목차 한 번 읽고 끝 부분 읽고 저자 소개 읽고(웃음). 괜찮은 책이 있으면 독파도 하고요. 글쓰기와는 연관이 없었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대화하려면 바지 자락이라도 잡고 가야 했거든요.”
▼ 남편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남편이 해산물을 좋아해서 항상 생선이나 조개를 밥상에 올려요.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노력하죠.”
▼ 특별한 내조법이 있나요.
“세상은 어쩌면 뒤에 있는 여성상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남편 뒤에 다소곳하게만 있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고, 남편이 못하는 부분을 메워주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집에서 신문을 많이 읽는데, ‘이런 부분 읽어보라. 내 생각은 이렇다’ 말해주면 곧잘 듣고 스크랩해요. 그런 것이 제가 살아온 방식이고, 그냥 뒤에 있기보다 많이 듣고 이야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2008년 부산에서 경상남도 양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길 당시 자연과 더불어서 책에 파묻혀 사는 안락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꿈꾸던 문재인·김정숙 부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기로에 서 있다. 끝 인사를 하던 김씨는 “사실은 너무 두렵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두 눈은 그렁그렁했다. 그는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세상에 나온 남편을 힘 닿는 데까지 돕고 싶다”고 말했다. 북 콘서트가 열린 지 6일 후인 9월 16일 문재인 후보는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서울 지역 경선 누적 득표율에서 56.5%를 얻어 결선투표 없이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됐다.
여성동아 2012년 10월 5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