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영국은 왜 한전 우선협상권을 해제했나
한국전력(한전)이 영국 무어사이드(Moorside) 원전 개발사인 뉴젠(NuGen)의 지분인수 우선협상권을 상실한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영국은 한전과 원전사업 협의를 지속한다는 입장"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정치권에선 설왕설래가 이어지며 책임 공방이 가열되는 양상이다.
무어사이드 원전 사업은 뉴젠이 영국 북서부 지역에 3.8GW 용량의 원전 3기를 짓는 총사업비 150억 파운드(약 22조 원) 규모의 프로젝트다.
지난해 12월 뉴젠을 인수할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전이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한전은 지난달 25일 우선협상대상자의 지위를 상실했다. 뉴젠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도시바가 "한전 외 다른 사업자와도 협상 기회를 갖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우선협상권 상실, 협상 무산은 아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전은 뉴젠을 인수할 협상 대상에서 우선권의 지위를 잃게 됐지만, 원전 사업 협의 자체가 무산된 건 아니다. 아직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다는 얘기다.
뉴젠 대변인은 1일 BBC 코리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도시바는 뉴젠을 한국전력에 매각하려고 했으나, 협상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 사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뉴젠은 저렴하고 합리적인 저탄소 전력을 공급하려는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전은 올해 상반기까지 뉴젠 인수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이에 발맞춰 한국 정부는 지난 1월부터 본격적인 인수 협상에 나서려고 했지만 사업 조건과 방식 등을 따지다 보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왜 우선협상권 배제 결정 내렸나
영국 현지에선 이번 우선협상권 배제가 한국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무관치 않다는 주장이 나온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한국의 정권 교체와 신임 한전 사장 임명 등으로 불확실성이 조성됐다"고 1일 보도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한전 사장 교체 등으로 협상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BBC 코리아 취재에 따르면, 영국 원전 업계는 한국 정부의 원전 수출 지원 입장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원전 수출 육성 입장을 밝히자, 원전 수주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원전 관계자들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19일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원전해체 관련 노하우를 축적해 원전해체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조환익 전 한전 사장이 지난해 12월 영국 원전 우선협상권을 따낸 직후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이에 맞물려 원전 사업의 수익성 및 위험 경감 방안 등에 대한 구체적인 인수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이 장기적으로 원전을 관리해야 할 사업자를 찾게 됐다는 전언이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도시바가 새로운 사업 모델 검토로 협상이 길어지고 뉴젠의 과도한 운영비 지출이 부담되자 한전 외 다른 사업자와도 협상 기회를 갖기 위해 지난달 25일 한전에 우선협상대상자 지위 해지를 통보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탈원전 정책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6개월간 협상에서 영국 정부가 우리에게 탈원전이나 에너지전환 정책과 관련해 이 사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질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일각에선 경영 상황 악화로 뉴젠을 이른 시일 내에 팔아야 하는 도시바가 한전과의 협상에 속도를 내기 위해 일종의 압박 조치로 우선협상대상자 해지 결정을 내린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원전 설치될 지역은 어디?
이런 가운데 영국에선 원전이 설치될 장소가 새삼 주목받는 모양새다. 원자력 발전소 설립에 상당한 기대감을 품었던 현지 주민들이 협상 지연에 적잖은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무어사이드 프로젝트는 영국 북서부 컴브리아(Cumbria) 지역에 원전 3기를 짓는 사업이다.
컴브리아에는 세라필드(Sellafield) 원자력 단지가 있다. 세라필드는 컴브리아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로, 핵 재처리 공장, 핵연료 사이클 시설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마틴 루스 BBC 기자는 컴브리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석탄과 철강을 많이 생산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오랫동안 가난과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세라필드 지역에 원자력 단지가 들어선 이후 이 지역의 상당수 노동자가 원자력 관련 일을 담당하고 있다."
현지 경제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세라필드 노동자 60%가 원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원전 설립을 기대하는 주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 노동당 수 헤이먼 의원은 정부를 향해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정부가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컴브리아는 원전 건설로 예상되는 20,000개의 일자리와 경제적 투자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거세지는 정치권 공방
한국 정치권에서도 책임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윤영석 수석대변인은 "탈원전을 선언한 국가에서 오랜 기간 전문가와 필요부품을 적기에 조달하기는 쉽지 않다"며 "최종적으로 영국 원전 수주가 불발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원전 수출은 더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대변인은 "우선협상자 지위 해지는 영국 정부와 일본 도시바의 새로운 수익모델 도입 및 리스크 경감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전력이 연내에 구체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 등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