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폭동사건이란?
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과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주동이 되어 1946년 9월 24일 전평 조직을 총동원한 철도파업과 9월 전국 노동자 총파업에 연이어 일으킨 사건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박헌영이 이북 해주로 올라가 폭력 전술(신전술)로 노선을 변경한 이후 일어난 폭동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 배후에는 북한의 소련군정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조선의 모스크바 ‘대구’
대구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미군정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특히 10. 1 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쌀값이 60배로 뛰어오르는 등 식량 상황이 매우 어려워,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했던 대구는 특히 식량상황이 어려웠다고 한다. 10월 1일에는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돌에 맞은 경찰이 깜짝 놀라 노동자들을 향하여 순간적으로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고, 경찰의 갑작스런 총격으로 여러 명이 쓰러져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다. 실제로 경찰의 사격으로 죽은 사람은 대팔 연탄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혹은 황팔용) 한 사람이었다.
10.1 폭동은 굶주린 사람들에 의한 자연발생적 항쟁인가?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대(현 경북 의대) 학생회장 최무학과 4명의 학생들이 콜레라로 죽은 시체에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학생들을 선동했다. 섬뜩한 시체 데모 행렬과 자극적인 구호는 충격적일 만큼 호소력이 있어서, 지나가는 구경꾼들까지도 순식간에 흥분하며 뒤를 따랐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폭동은 자연발생적 폭동이 아니라, 북한의 소군정이 깊숙이 관여한 사건이었다. 이는 소련 스티코프의 비망록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전술 지령에 입각해 1946년 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소군정의 지시에 따라 9월에 총파업을 일으켰다. 소군정은 9월 총파업 때 200만원을 지원한 데 이어 10월 폭동이 계속된 약 3개월 동안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00만원과 39만원, 그리고 122만 루블을 조선공산당 측에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좌익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정백과 이영)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2권 '제주 4.3 사건'의 대구 10.1 폭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