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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20 #136 하관(下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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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24 #94 못자국
- 2013.04.14 #89 608호 02
글
소설 2013.10.09 21:50#167 Backmasking
ZADR/짐딥/딥짐/수위없음
등록일 2013.10.09
수정일 2015.03.29
CONTINUE
BACKMASKING
네 모든 것이 나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밤이 어둡고 거리의 불이 꺼지면 나는 네 생각밖에 못 하게 되었다. 나는 내 상상 속에서 네 손목을 잡았다가, 네 목을 붙잡았다가, 비틀고, 꺾었다. 네 얇은 혀가 입 밖에서 축 늘어졌다. 나는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상상에서 빠져나오고 곧 역겨워했지.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흔들리는 수면의 눈이 퀭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지는 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선의 흐트러짐이 내 절망의 원인이다.
사실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는 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절망했다.
몸을 일으키고 입을 헹궜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다 훔쳐보는 것 같은 내 눈과 눈이 마주쳤다. 금색 눈이 탁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수건을 던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질질 끌고 와 옷장을 열었다. 모든 것을 쑤셔 넣었다. 짧은 손톱으로 사진을 붙인 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책상 위의 모든 것을 바닥에 팽개쳤다. 중요한 것들이 잡동사니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평범해지길 원해. 네게서 내 삶을 떼어내고자 해. 방법은 간단하지. 간단하기 때문에 망설였었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웠다. 녹화 버튼을 누르고 비척비척 침대 위에 앉았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경알 위에 눈물이 툭툭 흩어졌다. 맞아, 이건 내 스스로를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후회는 없겠지, 후회를 할 수가 없겠지. 고개를 들었다. 간질간질하고 미지근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갔다. 손등으로 슥 닦으며, 내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입이 찢어지게 웃을 녀석을 생각했다. "짐,"
"난 이제 평범해질 거야."
히끅거리며 발작하는 목구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너무 지쳤어." 손바닥으로 명치를 꾹 누르고 카메라를 보았다. 렌즈가 반짝거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미쳤다고 보는 사람들이나," 사실 네게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핑계다.
"몇 번이나 지구를 구해도 여전히 정신병자 취급받는 거나,"
나는 핑계가 필요했다.
"날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걸,"
널 버릴 핑계가,
"다 놓고 싶어."
날 버릴 핑계가.
얇은 한숨을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뱉으며 마지막처럼 웃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입을 잠깐 가린 손이 덜덜 떨렸다. 정말로 마지막이다. 이건 자살과 같으니까. "네가 이걸 볼 때 내가 평범하게 살고 있다면, 짐," 삐걱거리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후회를 지우자,
"나를 모른 척 해줘."
짐, 너를 지우고,
"난 너를 모른 채로 살아가고 싶어."
딥, 나를 지우자고.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서, 내가 버릴 것들이 굴러다니는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쓰레기가 되어 불에 타고 싶었다. 살을 태워 연기가 되면 잠깐 네 지붕 위를 맴돌다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럴 용기가 없어 이것밖에 하지 못한 거겠지, 웅크린 등을 떨었다, 날 가만 놔둬, 오늘은 밤 새도록 울 거니까. 그리고 내일부터는…울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딥은 이제 자기 기억을 지우고 살 거에요. 저는 딥이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네요. 11살짜리 꼬마아이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한지 고민하다가 자기가 아빠의 클론인 걸 알게 된다는 공식 스토리는 너무 잔인한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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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설 2013.08.06 12:50#145 해피엔딩
ZADR/딥짐/수위/고어/자극적인 소재/루프
등록일 2013.08.06
CONTINUE
4th
넓은 실험대에 자그마한 몸이 놓여졌다. 실험체 혹은 부검할 시체이다. 초록색 피부는 파리하게 핏기를 잃었다. 얇은 꺼풀로 덮인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상아빛 장갑을 낀 손이 그 눈 주위를 더듬었다. 손은 잘게 떨리면서도 그것을 만지는 짓거리를 그만두지 않는다. 실험체의 찢어진 입술과 부어오른 뺨은 자연 회복을 포기하였다. 노란 눈의 인간은 입가에 딱딱하게 굳은 분홍빛 혈액을 만지다가, 그 위에 키스했다. 밀치는 팔이 없고 물어뜯는 이가 없어 혀를 집어넣진 않았다. 그러나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입술을 거두고 나서 손가락 네 개로 뺨을 스치고 내려와 목 근처를 건드렸다. 목을 감싸고 있는 천을 날 선 가위로 조심스레 잘라 낸다. 팔을 감싸고 있던 천과 장갑까지 천천히 벗기고 은색 트레이 위에 올려 두었다. 작은 손끝을 감싸듯 있는 손톱을 만지작대다가, 입을 벌려 그것을 조심스레 혀로 핥았다. 금색 눈을 내리깔고 떨면서, 힘없이 늘어진 팔을 보물이라도 되듯 조심스럽게 받치고서. 그 천박한 행위에 이유는 없었다.
그 시체는 늘 입고 있던 검은 타이즈가 벗겨져 있다. 부츠 또한 없었다. 스커트 한 장을 들추면 있는 다리 사이 생식기는 처참하게 혈액과 정액에 굳어 있다. 얼켄의 혈액과 인간의 정액, 바라지 않는 성관계의 명백한 흔적, 준비되지 않은 몸을 반으로 가른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분노할 존재도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상아빛 장갑이 은색 트레이 위를 더듬다 작은 막대를 집어 들었다. 버튼을 몇 번 누르고 출력을 조작하자 아주 얇은 빛이 뻗어 나왔다.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짚어 트레이의 끝을 잘라 본다. 뾰족했던 모서리가 사라졌다. 인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소매를 한껏 걷은 팔이 실험대 위로 올라왔다. 실험대 옆의 버튼을 능숙하게 누르고 조명을 켰다. 얼켄 베이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하얀 빛이 고개 숙인 인간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인간은 레이저 매스를 든 손을 얼켄의 목 근처로 가져가 망설임 없이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 그었다. 한 번의 우아한 움직임으로 스커트 한 겹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졌다.
매스의 끝이 다시 목 위로 올라갔다. 그것은 그 근처에서 자리를 잡으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거두어졌다. 한층 더 떨리는 손이 트레이 위에 그것을 두고 장갑을 벗었다. 상아색보다 더 창백한 인간의 손이 손목까지 덮고 있던 장갑을 벗자 손등에 깊게 파인 손톱자국이 드러났다. 인간은 자신의 상처를 한 번 쓸어본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가 움직인 세상은 이것보다 만 배는 더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얗게 핏기 없는 손이 시체의 가슴팍을 만졌다. 피가 모조리 식어 차갑다. 얼음보다 더 얼음 같은 온도에 손을 거두었다가, 그것이 자신의 짓임을 곱씹어 생각하고, 두려운 듯 웃었다.
짧은 손톱이 여린 피부를 만졌다. 체모가 있는 것도, 양서류처럼 매끈하지도, 파충류처럼 질긴 가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이 피부를 수도 없이 만졌으나,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아니었을까.' 내면의 광기라는 것은 언제 다가올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다가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일이 일어나고 난 다음은 항상 늦다. '하지만 괜찮다.'
손톱으로 만진 부분이 분홍색으로 부어올랐다. 인간은 그것에 침을 삼킨다. 피부를 만지던 손톱이 점점 강박적으로 그 위를 긁었다. 긁다가, 쥐어뜯음으로 변하고, 끈적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나타나자 검지 안쪽으로 환부를 쓸어보았다. 날붙이를 쓰지 않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인가, 너를 망치고 싶기 때문인가. 이것은 사랑인가 모욕인가. 옅은 피 냄새가 코끝에 닿으면 그는 생각한다. '그딴 건 아무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노란 눈을 내리깔고 웃으며 환부를 더 뒤지고, 하얀 뼈가 드러나자 가슴팍에 구멍을 내듯 쥐어뜯은 상처 안으로 검지 두 개를 집어넣는다. 딱딱한 뼈가 손가락 마디에 닿으면 질기지 않은 가죽과 살덩이를 검지로 누르며 반으로 잡아 뜯었다. 특, 투둑, 언제나 그렇지만, 언제나, 시체는 말이 없다. 그는 그때서야 만족스러워했다.
* * *
밤이 어두웠다. 별이 적다. 약한 가로등은 정원 안쪽 창고까지 닿지 않았고, 아직 여름이 오지 않은 새벽은 공기가 차다. 어둠 속에 있던 남자는 뺨에 닿는 서늘한 바람에 정신 차렸다. 금색 눈이 반짝 떠졌다. 그 눈은 하늘에 없는 별 같다.
"어……?" 열린 입술에서 멍한 소리가 새었다. 그는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며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정원, 자신의 창고 앞, 문은 아래로 내려져 잠겨 있다. 몸이 찌뿌둥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발걸음을 한번 떼자 무게중심을 잃을 듯 휘청거렸고, 토할 것 같아 입을 막았다. 생소한 역겨움에 입술을 떨었다.
"욱," 속이 메스꺼워 바닥에 앉았다. 무릎 꿇은 채 한참 숨을 고르자 목덜미가 따가워 손바닥으로 잠시 쓸어본다. 뾰족한 것으로 패인 세 개의 줄이 양 옆으로 나 있었다. 눈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들자 굳게 내려닫힌 창고 문이 있었다. 무릎으로 조금 기어가 그 앞에 섰다. 못 보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런 구식 자물쇠를 언제 달아뒀었지.' 생각하며 묵직한 그것을 만지작대면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빛 옅은 가로등에 은색 자물쇠가 반짝거렸다. 그는 순간 흠칫했다. 손끝에 무언가가 있었다.
"뭐지……?"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자물쇠를 놓고 손을 들여다본다. 손끝을 비비자 까슬까슬한 가루가 흩어졌다. 혀로 살짝 맛보자 비린 느낌이 확 퍼졌다. 깜짝 놀라 손을 떼어내었다. 이건 피다. 내 것 아니면 누군가의 피.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피잖아……."
"맞아, 이젠 네 머리통에서 나올 그거지."
건조한 목소리가 찬 바람에 실렸다. 담담하고, 서늘한 광기. 무릎 꿇은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무거운 쇠파이프가 들어 올려졌다. 메론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퍽 하고 잠시 났다가, 곧 다시 고요한 새벽이 된다. 서늘한 봄은 좋은 계절이다.
깨진 머리에서 피가 아주 쏟아지기 전에 살인범은 창고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들어 올려 시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고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두컴컴한 창고에는 불빛조차 없지만, 그 안에는 십 수 구의 시체가 있다. 부패의 정도는 전부 달랐지만 모두 손에 피가 말라붙어 있고, 머리가 깨진 시체다.
막 죽은 시체는 통나무보다 더 무거우나 그는 그것을 능숙하게 끌어 시체더미 옆에 둔다. 서늘한 봄은 좋은 계절이다. 시체 썩는 냄새가 잘 퍼지지 않는다. 그는 창고 밖으로 나가 다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허리를 조금 숙여 벽의 수도꼭지를 두 번 돌려 호스를 붙잡고 물을 틀었다. 몇 방울 튄 피에 손을 먼저 씻고 바닥을 씻어내었다. 내일 아침이면 바닥이 다 말라 있을 것이다. 비가와도 좋겠지. “올 거야.” 남자는 일기 예보를 본 적 없으나 내일 날씨를 알고 있었다.
남자는 정원을 나왔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 빛이 머리 위에서 비추고 노란 눈이 반짝였다. 그 눈은 하늘에 없는 별 같다.
8th
창백하게 굳은 초록색 몸덩이 옆에 등을 웅크려 엎드린 자가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코트 위에 보라색 붉은색 조명이 흐릿하게 반사되었다. 거칠고 난잡하게 깨진 기계 바닥 위에서 웅크리고 손을 바짝 맞잡아 기도하듯 떨던 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선이 갈팡질팡하며 바닥을 훑고, 그 금빛 눈이 닿는 곳은 모든 것이 엉망이다.
날카롭게 뻗은 철제 다리는 연결 부위부터 반으로 꺾여 토막 난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 면이 동그란 얼켄의 뇌가 주인을 잃어 굴러다니고, 뇌를 잃은 얼켄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 얼켄의 반투명한 혈액과 인간의 짙은 검은 피가 그 쓰레기들 곳곳에 묻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고개를 든 인간은 그것들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무릎으로 기어 시체를 건져 든다.
"짐."
가늘고 연약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곧 죽을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을 것이고, 그가 사랑하는 것은 몇 번이고 죽을 것이다.
"한번쯤은 안 간다고 말해줘도 괜찮잖아."
그럼 정말 다 괜찮아질 텐데. 중얼거리며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몸에 손을 대 본다. 창백한 뺨에 손을 올렸다가 팔과 골반과 다리와 발끝까지 더듬었다. 언제나 그렇듯 만져지는 것은 시체고, 만질 수 있는 것은 시체뿐이다. '아홉 번째.' 나는 아홉 번을 반복하여 말 없는 죽은 몸뚱이에서 나의 사랑을 찾으려 애썼지만 더러운 육욕과 반복되는 후회밖에 남지 않았다.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이 짓거리를 하는데, 남는 건 그것뿐이라니.'
그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언제나 다음이 있고 다음 후회가 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인 것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한다. 저 끝에 흐릿한 등불처럼 있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아파야 한다.
"짐," 그는 시체를 내려놓았다. 짙은 숨을 깊게 뱉어내고 피 묻은 손이 더듬더듬 바닥을 헤맨다. 납작하고 동그란 기계 장치는 주인과 같은 온도로 식어 있고, 그는 그것을 들어 동그란 면을 매만지다 품에 안았다. 섬뜩한 차가움이 가슴팍에 닿는다. 순간 머리는 차분해지고, 이 차단한 체온에 숨이 막혀 떨다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둘 수 없는 상태, 얇은 유리에 기대어 빌딩 아래를 내려 보는 무거운 몸을 견디는 것처럼, 그가 가진 광기의 농도는 그를 아직 자살로 이끌진 못한다.
"또 올게."
그는 기침을 내뱉다 멈추고 한숨같이 웃었다.
* * *
피 묻은 부츠가 얼켄 인베이더의 메인 베이스 바닥을 밟았다. 그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다. 침입 경고조차 울리지 않는 조용한 기지, 곧 침입자는 중앙 모니터 앞에 선다. 거대한 기기 아래에 얼켄 인베이더의 표준 정보 복구 유닛이 전원이 꺼진 채 앉아 있다.
[프로세스 정지 80% 진행 중] 이라는 글자가 검은 모니터에 붉은 글씨로 깜박이고 있었다. 철수 프로그램, 침입자는 메인 회로도 포트에 가방에서 꺼낸 노트북을 연결하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렸다. 네 개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얼켄의 기기를 만졌다. 음성 인식 조작과 생체반응 스캔 시스템을 완전히 폐쇄하고, 철수 프로그램을 정지시키는 콘솔을 켰다. 붉은 불빛에 깜빡이는 금색 눈은 모니터를 보지도 않은 채 연결된 노트북 키보드만을 두드려 수백 줄의 빽빽한 수식을 입력해갔다. [프로세스 정지 80%, 다운……], 마지막 엔터를 친 손이 노트북을 덮었다. 그 인간은 얼켄의 중앙 처리장치를 해킹했다는 것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렇다면 몇 번째인가.
인간은 노트북과 포트 모두 그대로 둔 채 쇠파이프 하나만을 들고 메인 베이스를 빠져나왔다. 금빛 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거침없이 나아가지만 그의 발걸음은 공허하고,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지난 과거와 똑같은 곳만을 밟고 있었다.
15th
찢어지는 높은 소리가 울렸다. 경련하는 몸이 검은 코트의 팔에 꽉 안겨 있었다. 꺾인 고개와 뒤집어진 눈, 절반이 뜯겨진 더듬이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그 몸은 최후의 최후처럼 떨며 자신의 구속하는 인간의 큰 손 위에 손톱을 세우다 뚝 멈춘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띄엄띄엄 터지다가 잦아들었다.
인간은 동그란 접속부만 두 개 덩그러니 있는 등을 쓸고 또 쓸었다. 네가 너로 있을 수 있는 시간, 10분.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너무나 짧고 모든 것을 망치기엔 너무나 길다. 인간은 싸늘한 몸 안에서 마지막으로 움찔하고 떨었다. 고개 숙인 얼굴에서 땀방울이 흘러 초록색 피부 위로 떨어진다. 머리카락이 흩어져 시야를 가렸다. 높은 한숨이 천박하게 퍼졌고, 그는 곧 그 몸에서 나온다.
그건 거의 강간이었다. 아니면 시간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위겠지. 엿 같은 성인용품으로 혼자 장난질을 해도 이것보다는 개운할 것이다. 깊고 끈적한 행위는 애정도 욕정도 없이 그저 더러웠다. 차라리 내가 널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내가 널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굳은 통나무 같은 그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죽였는데,
"내 마음에 의심이 가."
내가 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인가, 널 떠나보내기 싫은 것인가. 널 사랑하는 것인가, 네게 욕정 하는 것인가. 그것이 전부 아니라면 내가 널 증오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네가 망쳤는지, 내가 망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짓거리를 반복할수록 깨닫는다. 이제는 그저 되돌릴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모래바람에 사막 위에 찍힌 발자국이 전부 지워져버렸고,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면서도 그저 앞으로 가야만 한다. 혹은 다 알면서도, 가야만 한다.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검은 등이 비참하게 굽어졌다. 내려놓은 몸을 앞에 두고 짧은 손톱이 기계 바닥을 긁었다. 금색 눈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생각한다. 울지 않게 된 것이 몇 번째였을까. 널 죽였다는 공포에 질려 눈물을 터트리고 과거로 도망쳤던 처음이 언제였을까. '토할 것 같아.' 과거는 역겹기만 하고 미래는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그에게 그 모든 것은 같았다. 그는 미래에서 와 과거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여린 짐승이 숨을 삼키고, 앓는 소리가 보라색 흐린 조명 아래에 안개처럼 퍼졌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 뿐인데……."
나는 바라는 것이 단 하나라고 네게 말했으나 그것이 정말 단 하나였는가.
그는 이 세계의 신과 같은 존재이나, 그저 비참할 뿐이다.
* * *
인간은 이동선 수리실의 문 앞에 섰다. 어두운 복도는 빛 하나 없이 적막하다. 인간의 오른 손은 비어있고, 왼손에는 쇠파이프가 바닥에 끌려 있었다. 그는 문 앞에서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정확히 19까지 세었을 때 그가 웃었고, 문 너머에서 짜증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갑자기 수리 시스템이 먹통인거야! 컴퓨터!! 컴퓨터어어!!'
"왜긴 왜야."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인간이 고개를 들어 두어 걸음 물러섰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지 전체가 맛이 갔군!!' 인간은 짜증에 찬 그가 팩레그를 펼치기 전에, 들리도록 이름을 불러야 한다. "짐?"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뭐야, 이 목소리는…… 딥? 딥 너야?'
이름 불린 인간은 이제 떨리지도 않는 차분한 연기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 나야. 문이 안 열려?"
' 이 벌레 같은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했어! 내가 내 시스템 마음대로 건들지 말라고 말 했을 텐데!! 네가 뭘 만졌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지금 기지가─' 그의 짜증과 분노가 문 너머에서 거침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표정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상태는 잔잔한 물처럼 차분했다. 그의 모든 말들을 입술로 따라할 수 있을 만큼. "미안, 잘 안 들려. 위험하니까 뒤로 좀 가줄래?" '뭐─' 딥은 능숙하게 말을 흐리며, 어이없는 물음이 다시 소리치기 전에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오른손 아닌 왼 손을 쓰는 이유는 손가락 두 개가 부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큰 소리가 튀었다. 두꺼운 철문을 인간의 힘으로 부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에 톱니 같은 문의 맞물린 부위 가운데를 쳤다. 수동 조작 회로를 부수고, 드러난 전선의 연결을 손으로 끊어 약간 벌어진 문틈에 발을 집어넣었다. 좁은 틈 너머로 그의 아직, 살아 깜빡이는 눈이 보인다. 딥은 웃음기 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발을 집어넣은 좁은 틈을 팔로 밀어 확 열었다. 사람 한 명, 남자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문이 벌려졌다. 딥은 땅에 떨어트렸던 파이프를 왼손으로 질질 끌며 들어간다. 멍한 얼굴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딥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웃으며, 오른손을 까딱였다. "안녕, 짐."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 인간의 한가로운 인사에 얼켄의 표정이 구겨졌다.
"너!!!!"
"음, 왜?
"왜? 왜냐고? 너, 대체 이게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망할, 그건, 뭐고?"
짐이 쉴 새 없이 소리치며 뾰족한 손끝으로 은색 파이프를 가리키고 눈을 반으로 접어 쏘아보았다. 파이프 끝은 붉은 것이 묻은 채 조금 구겨져 있었다.
"이거? 우리 집 뒤편 쓰레기통 근처에서 주웠어." 그가 엄지와 약지만으로 어설프게 쥐고 있는 쇠파이프를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지금 그딴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기지를─ 하, 지금 그걸 무기라고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얼켄은 말꼬리를 늘리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인간을 훑어보며 반걸음 물러나고, 인간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것을 살짝 들어 올려 보았다. "설마, 이걸로 뭘 할 수 있겠어?"
들키지 않는 연기는 자유롭다. 인간은 지금 무대 위에 있고, 반복되는 공연의 고정배우처럼 모든 몸짓을 계산속에서 행한다. 부러진 손가락을 티 내지 않은 채 파이프를 자연스럽게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얼켄은 그것을 의심 없이 보며 말을 이었다. 의심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얼켄의 패배 이유는 단 두 개다.
"하! 맞아, 네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하지만─"
"살리는 것 빼곤 다 할 수 있긴 해."
"뭐?"
자신의 숙적이라고 인정한 것을 너무도 깔보고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쇠파이프가 얼켄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려졌다. 검은 더듬이가 찰나 바짝 서고, 순식간에 등의 팩에서 네 개의 기계다리가 뻗어 나와 파이프 끝으로 향했다.
"그게 아닌데."
그가 자신에게 가진 감정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던 것.
딥의 말에 짐이 멈칫하며 기계다리들을 거두기 전에 딥의 발이 그의 배를 가격했다. 무게 중심을 실은 발차기를 정확히 맞은 짐이 소리 지르기 전에 뒤로 굴러 엎어졌다. "크, 악!!" 높고 괴로운 소리가 잠시 멈춘 호흡 대신 터져 나왔다.
딥은 등을 보여 엎어진 그가 갑작스런 격통에 숨을 고르며 정신 못 차릴 때, 그 몸 위에 걸터앉아 발버둥치지 못하게 하반신을 눌렀다. 그가 숨을 들이키며 어지럽게 흩어진 기계다리를 딥에게 내지르려 했으나 딥이 더 빨랐다. 파이프를 눕혀 그의 뒷목에 서늘하게 내리누르며 더듬이 근처에서 속삭였다. "하지 마, 죽어." 내리깔린 눈과 그의 옆모습은 여유롭게도 보였다.
"힉……."
얼켄이 더듬이 가까운 속삭임에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딥은 능숙하게 등의 틈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팩을 가볍게 떼어낸다. 접속부와 연결부가 마치 자석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을 손등으로 막고 엎드려있는 짐의 눈앞으로 팽개쳤다. 얼켄이 순식간에 다가온 죽음에 몸을 떨며 소리 지르기도 전에, 딥은 파이프 끝으로 날카롭게 뻗은 기계다리의 조인트 부분을 하나하나 내려찍기 시작했다. 오른쪽 위, "딥," 오른쪽 아래, "딥!!!" 왼쪽 위, "그만, 그만해!!" 왼쪽 아래. "내가 네 뇌를 씹어 먹기 전에!!!"
그가 분노보다 절망으로 소리치는 것을 달게 들었다. 걸레짝이 된 기계다리를 파이프로 쳐 짐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밀었다. 여섯 번째의 넌 저걸로 내 손등을 찍었었지, 딥은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며 파이프를 마지막으로 들어올렸다. 무거운 금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얼켄이 등을 바싹 떨고 숨을 들이켜 손을 뻗는다. 딥은, 인간은, 부러진 손가락 두 개로 감각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중얼거렸다. 내려찍듯 내려오는 파이프 끝이 둥그런 팩의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얼켄의 손이 한 뼘을 남겨두고 자신의 뇌에 닿지 못한다. 그 애처로움이란, 몇 번을 봐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내가 써야 하니까."
딥은 얼켄의 등을 내리누른 채로 그의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얼켄보다 훨씬 크게 성장한 그는 그렇게 작은 몸을 품에 완전히 가둘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옆 바닥에 이마를 대고, 떨리는 눈을 마음껏 본다. 분노 이전의 공포와, 혼란과, 그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것, 그러나 인간에겐 십 수 번 익숙한 것, 인간은 생각한다. 이 마음이, 네 절망과 혼란을 볼 때 미칠 듯 떨리는 이 마음이 사랑인가. 딥은 그것이 십 수 번 익숙하지만, 중독은 익숙할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다.
"짐," 딥이 그의 외계인의 이름을 상냥하게 속삭이며 파이프 끝으로 팩을 툭툭 쳤다. 검은 장갑을 낀 작은 손이 그때마다 움찔거린다. 그가 아무 소리를 못 내는 이유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딥은 웅크렸던 몸을 더욱 바짝 그에게 붙이며 그 손을 왼손으로 잡았다. 잡기 전에는 이것이 그렇게 여린지 몰랐다. 검지와 중지가 확실하게 부러졌지만 그를 만질 때 아픔 같은 것은 없다. "어디 가려고 했어?" 팩을 그의 눈앞에서 저 너머로 완전히 밀어버리며, 파이프를 옆에 내려놓고 물었다. "어디 가려고, 기지 프로세스 정지까지 진행하고 있었냐고."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쥐고, 그의 몸 위에서 웅크려 눈을 마주쳐 속삭인다. "이야기 좀 들어줄래?" 사실 너한테 궁금한 건 없거든.
"머리 굴려도 소용없어." 네 뇌는 저기 있잖아. 딥은 손끝으로 장난스레 가리키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가볍고 건방진 말투에 아래에 깔린 작은 몸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안간힘을 써 들썩거리는 몸짓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어깨 누른 손에 힘을 줘 내리눌렀다.
"놔!!! 이건, 말도, 이럴 순 없어, 네까짓 게 어떻게, 감히, 감히 내……!"
"그건 내가 이 짓을 열일곱 번째 반복하기 때문이지."
"아까부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정말 미치기라도 했어? 넌 지금 이게 어떤 짓인지도 모르지?!"
"아니, 짐."
딥이 그의 머리를 내리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굴욕적인 소리가 이빨 사이로 샌다. 팩을 잃은 그는 한없이 연약하고 그 다움을 잃고 있으며 호흡조차 힘들어진다. 인간은 그것을 가만히 느낀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일이 아닐지도 몰라." 속삭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심하게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난 널 몇 번을 강간했어, 두 번은 시간이었지."
온갖 생체실험도 다 해봤어. 네 실험실에 있는 기구를 가지고 네 배를 가르는데 손이 다 떨리더라. 아, 한 번은 맨손으로도 했어. 사실 그건 그냥 곤죽을 만드는 거였지만. 네 피부 진짜 약하더라. 난 네가 그렇게 부드럽고, 여린 줄 몰랐지.
"지금은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인간의 입에서 차분하게 흘러왔다. 얼켄의 더듬이가 빳빳하게 섰다가 잘게 경련했다. 그것이 인간의 귀와 비슷한 기관이라면, 그는 그것을 틀어막고 싶을 것이다. 대체 이 미친 인간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고, 너무나 끔찍하고 역겨우며, 굴욕적이고, 자신이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차분한 광기 뒤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웃기는 건 이거, 이 말, 전부 저번의 너에게 했던 말이라는 거야."
"뭐?"
"난 네가 어떻게 대답할지 다 알아."
"미친 소리 집어치워!"
"미친 소리 집어치워."
얼켄의 눈이 찌푸려지다 확 떠졌다. 붉은 빛이 갈팡질팡하게 바닥을 훑다 노란 눈에 닿았다. 얇은 유리에 기대어있는 덩어리진 광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창, 투명하고, 맑은 것 너머로 짙게 깔린 연기가 목을 조를 것이다. 미친, 거야. 저건 완전 미친 거라고. "내 탓이 아니야, 짐."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칠 수가 없었다. "네가 떠났잖아." 얼켄은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네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잖아."
"아니……. 아니, 저리, 꺼져, 떨어져."
"그래서 네 시공간 전송 장치를 사용했지."
"이게 뭐든 다 집어치워, 딥,"
"생명체 하나를 통째로 전송하는 건 무리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한번 작동하고 고장 나 버렸고."
"딥, 이 괴물아, 떨어지라고!!!"
"닥쳐, 짐."
들어. 목소리의 온도가 한순간에 낮아진다. 얼켄은 몸을 움츠렸다.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인정할 순 없으나, 그 낮은 온도에 한껏 다가온 죽음이 두려웠다. 얼켄이 몸을 떨며 얇은 혀로 숨을 집어삼키자 마르고 딱딱한 손이 뻔뻔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어쨌든 네 시공간 전송 장치로 내가 과거로 넘어왔어. 난 바로 메인 베이스로 올라가 네 컴퓨터를 손봤지. 진행되고 있는 프로세스 정지 시스템을 다운시키고 널 찾으니까 이동선 수리실에 있더라. 난 음성 인식 조작과 생체스캔 시스템을 폐쇄하고 이동선 수리실로 향했어. 거기엔 지구를 떠나기 고작 몇 시간 전인 네가 있었는데, 음, 내가 그때 좀 화가 났어. 넌 너무……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거든.
그래서 내가 널 덮쳐서 목을 조르고 팩을 떼어냈을 때, 아, 그때는 이렇게 쉽진 않았어. 너무 자존심 상해하진 마. 아무튼 그때, 과거에서 온 또 다른 나와 마주쳤고, 그 녀석이랑 정말 미친 듯이 싸웠지. 그 녀석은 "네가 짐을 죽였어! 네가!!" 하면서 소리쳤는데, 웃기지 않아? 내가 널 죽이지 않았으면 그 녀석은 네 시체도 못 봤을 텐데. 난 그자식의 머리를 벽에 내리찍어서 죽여 버렸어. 네 시체를 빼앗기기 싫었으니까.
넌 그때 반쯤 죽어가면서 내가 또 다른 나를 죽이는 걸 보고 있었지. 내가 화나는 건, 네가 보고있던게 내가 아니라 그 자식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 생각했거든. '여기 오기 전에 날 먼저 죽여야겠다.' 내가 몇 명의 나를 죽였는지 알아? 알면 놀랄걸.
딥은 모든 것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고작, 네 시선을 독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나를 죽였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잠깐 높아졌다가 다시 내려왔다. 아, 이건 확실히 해 두자. 난 널 사랑하는 건 아냐, 짐. 그건 우리 사이에 너무 달콤하고, 역겨운 거잖아. 그치. 동의를 바라지 않는 물음이 싸늘하게 퍼졌다. 그저 집착이지.
사랑 없는 집착은 있을 수 있어도, 집착 없는 사랑은 있을 수가 없어. 내가 널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던 간에, 집착이 없을 수가 없다는 거야. 넌 그것 때문에 죽은 거지. 차분하고 싸늘한 손가락이 점점 창백해지는 초록빛 뺨을 더듬어 내려갔다. 얼켄은 그의 숨 막히는 무게에 저항하지 못하고, 초 단위로 짧아지는 수명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짙은 연기 같은 그의 광기를 그대로 내려 받고 있다. 질식할 것 같은 금빛 눈. "몇 분 남았어? 4분? 3분? 이번엔 좀 짧게 걸린 것 같은데."
얼켄의 가는 목이 푹 숙여졌다. 인간은 어깨를 내리누르던 손을 떼어낸다. 이제 저항할 힘도 정신력도 없을 것이다. "짐, 나랑 거래하자." 그럼 살려줄게. 인간은 거래를 원하지만 그건 협박이다. 목숨을 담보로 칼을 심장 앞에 두고 하는 협박, 그것을 모르는 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다.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네가 어딜 가든 관심 없어. 네 지도자가 널 호출했든, 이 지구에서 흥미가 떨어졌든, 아무 상관도 없다고. 넌 그냥 여기 있으면 돼. 조곤조곤했던 목소리가 점점 끝이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 미친 짓거리를 그만하게 해 줘." 깊은 색으로 빠지고, 짙어지고, 검게 질척이는 무거운 중얼거림이, "제발." 얼켄의 심장을 꽉 쥐어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붉은 눈이 뜨였다가, 얇은 꺼풀이 닫혔다가, 다시 가늘게 떠지고, 얼켄은 그 광기의 이름을 불렀다.
"딥." 2분, 남은 시간은 2분이다.
"네가 크게 착각하는 것 같다." 목숨이 위태로운 얼켄 인베이더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박또박한 말소리가 인간의 고막에 닿았다. 딥은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열일곱 번 이 짓거리를 반복하면서, 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잠, 잠깐, 짐?" 딥은 순식간에 그를 구속하던 모든 손을 거두고 손을 입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금빛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켄은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뒤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떠나는 게 아니야. 다시 올 생각이었지. 네가 무슨 망상을 해서 이딴 헛짓거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잘 들어……. 이 더러운 먼지덩이 행성은 내 거야, 네 게 아니라, 내 거라고. 패배한 개처럼 도망칠 일은 없어."
"하지만, 프로세스 정지 시스템은……."
"걸이 메인 회로와 뇌 포트를 연결해버려서 언인스톨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내게 살려달라고 이러는 거지? 넌,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없어, 이건,"
"난 톨리스트께 갈 생각이었어."
"…….네 지도자에게?"
"얼켄 인베이더가 평생의 숙적을 찾았으니,"
얼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남은 시간은 1분,
"메이트를 맺을 수 있는 증표를 하사해 달라고."
딥은 피가 머리에서부터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피가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잘린 발가락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
"아냐, 그건……, 미친, 아니라고, 거짓말이야……."
그는 모든 것을 부정당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가 저질렀던 모든 짓이 헛짓거리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했으나, 거부한다면 그가 말한 모든 것과 기회를 날리는 짓이 되는 것이다. 그는 혼란으로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쥐며 그의 몸 위에서 일으키고, 얼켄은 자유로워진 몸을 일으켜 그와 마주보았다. 30초, 그가 가눌 수 없는 몸을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움직인다. 가늘고 검은 손가락이, 혼란에 절여진 인간의 뺨을 스쳤다. 금빛 눈이 곧 꺼질 듯 흔들렸다.
"딥,"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가 한평생 듣지 못한 것이다. 차분하고 소름끼치고 적막, 낭떠러지에 서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 그 아찔함에 심장이 울렁거려 중독될 것 같은 위험함, 전부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아찔해진다. 그리고 30초,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얼켄의 가는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인간의 입술을 쓸었다. 마디진 혀가 까끌하게 메마른 입술을 맛보다 도로 들어갔다. 그는 숨을 들이킨다. 심장을 산 채로 뜯겨 바닥에 팽개쳐지는 기분이 이것인가, 내가 그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 그의 떨리는 눈이 바닥을 훑다 바닥에 널브러진 팩에 닿았다. 창백한 손이 그것을 재빠르게 집어 들었다. 그러나 검은 장갑을 낀 가는 팔목이, 그것을 쳐내 떨어트리고, 그 반구체 뇌는 동그란 면으로 계단을 타고, 아래로,
절망보다 더 깊은 절망,
"넌 행복해져선 안 돼."
시체 삼백 구를 먹어치운 늪이 있다면 저 계단 아래일 것이다.
20초, 손가락 세 개가 인간의 뒷머리를 잡아 내렸다. 다른 손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죽기 직전의 농밀함에 인간은 깨닫는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수치스럽게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얼켄 인베이더가 밟아온 삶에서 죽음이란 건조할 만큼 당연한 것, 그는 훈련받은 전사이고, 병사이고, 침략자이고, 죽음으로 그의 숙적을 침략할 수 있다면,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건 네 죄야."
말끝에 그의 낮은 웃음이 터졌다. 그의 반쪽짜리 뇌는 이제 호흡을 중지했다. 그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은 채로 얇은 혀가 다물리지 않은 입술을 벌려 침입했다. 얇은 뱀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것이 인간의 혀를 먹어치울듯 다가와 휘감고, 입천장을 훑다 목구멍에서 식도를 타고 넘어가 더 깊이, 깊이 내리꽂혔다. 그가 헛구역질을 하려 들자 목을 세게 졸랐다. 10초, 뾰족한 손끝이 인간의 목에 여섯 개의 줄을 남긴다. 그 상처에서 피가 떨어지기 전에 혀가 거두어지고 얼켄은 만족감에 찬 웃음을 띤 채, 5초, 눈을 감아 속삭였다.
"평생 후회하면서, 미쳐 가시지."
* * *
딱딱한 시체를 껴안은 채 웅크려 있던 인간이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이동선 수리실에서 그의 검은 등과 얼켄의 검은 손이 깊게 잠겼다 나왔다. 인간은 차가운 볼에 손바닥과 손등과, 손바닥을 느릿하게 대어 보다가 작고 뾰족한 손가락을 만졌다. 마른 침이 목구멍 너머로 내려갔다. 얼켄의 혀가 어디까지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심장을 꺼내 바닥으로 팽개치기엔 충분했다. 인간은 일으킨 몸에 시체와 기계 뇌를 껴안고 일어섰다. 아이를 안듯 꼭 안고서 나아가는 발은 비척비척, 그 걸음은 전에 없던 것이다.
그는 시체를 십 수 번 해부한 생체 실험실로 향했다. 반투명한 피가 흘러넘치던 실험대가 있는 곳, 그는 그의 작은 외계인을 그 위로 올려두지만 매스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몸을 돌리기 전에 얼켄의 눈 위를 만지작대었다. 얇은 꺼풀이 나비 날개처럼 쉽게 찢어질 것 같아 참아야 했다. 잘게 떨리는 손을 거두어 몸을 돌렸다.
그는 수많은 샘플과 시약을 건드렸다. 그의 눈이 수많은 모니터를 훑었다. 염기서열, 분자구조, 의미를 모를 숫자들과 외계의 언어가 온통 어지럽다. 그는 그 엉킨 문자들 사이에서 원하는 답만을 골라 섞었고, 그것은 곧 액체 형태로 시험관에 한두 방울 흘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용액이 절반까지 차기를 기다리며 회복 용액에 부러진 손을 담근다. '그건 네 죄야.' 투명한 용액에 상아빛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얼켄의 마지막 속삭임이 그 와중에 미친 듯 맴돌았다. '평생 후회하면서, 미쳐 가시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무릎 꿇고 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이 울었고 이것은 눈물로 사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 끝내야 했다.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한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신이라도 된 듯 착각했으나, 그에게 제어할 수 있는 과거란 없다. 그저 그는 그의 사랑을 죽이고 후회하며 등을 굽혀 떠는 것만을 반복했다.
그가 차가운 시체를 내려다본다. 실험대의 조명을 켜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짐," 그의 손에서 반쯤 찬 시험관이 찰랑였다. 그가 고개를 숙여 얼켄의 더듬이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그 가까이에서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있어."
* * *
마른 몸이 시공간 전송 장치 앞에 섰다. 그는 낮은 패널을 조작하기 위해 무릎 꿇는다. 능숙하게 버튼을 몇 번 누르자 패널 옆에서 포트 연결을 위한 케이블이 나왔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온 팩에 연결했다. 삑삑 하고 짧은 연결 음이 들리면, 그가 중얼거렸다. "이게 끝이야."
그는 속삭이다가 패널 위에 엎드려 얼켄의 뇌를 끌어안았다. 금빛 눈이 깜빡이며 모든 눈물이 별처럼 쏟아졌다. 목구멍에 울렁거리는 흐느낌이 괴로워 입을 막았다. 높고 낮은 쉰 소리가 샌다. 감정을 마비시킨 광기 같은 것, 이름 없는 절망이 갈 곳을 잃고 그는 이제야 울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목을 쓸어 본다. 여섯 개의 줄을 따라 손톱을 세웠고, 검은 피가 손톱에 스며든다. 아파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 바로 그다.
그는 흐느낌 끝에 몸을 일으켜 거대한 거울 같은 기계 앞에 섰다. 비틀거리는 무릎이 버겁다. 떠 있는 모니터에서 그의 집이 깜박였다. 그는 손에서 만지작대던 시험관을 내려다본다. 흰 빛을 탄 붉은색이, 감겨있는 눈 같아 한숨을 흘렸다. 차가운 유리관을 집게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좁은 입구에서 찰랑이는 것을 본다. 그가 속눈썹을 떨다가, 눈을 감았다.
"널 놓아줄게."
목소리의 끝은 들을 이 없이 처연하게 사그라졌고 인간은 시험관 안의 액체를 들이켰다. 그것이 목구멍으로 내려가기 전에 호흡을 멈추고, 한 발짝 딛는다. 흐린 빛 속으로 부츠 끝이 사라졌다. 그는 반대편 팔을 집어넣었다. 작은 불빛이 튄다. 앞으로 내민 가슴팍이 그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난생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만약 신께서 허락한다면,
그의 머리가 그 안으로 사라졌다. 짧은 머리칼이 빛 속에서 흔들렸다.
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를.
* * *
밤이 어두웠다. 별이 적다. 약한 가로등은 정원 안쪽 창고까지 닿지 않았고, 아직 여름이 오지 않은 새벽은 공기가 차다. 어둠 속에 있던 남자는 뺨에 닿는 서늘한 바람에 정신 차렸다. 금색 눈이 반짝 떠졌다.
"어……?" 열린 입술에서 멍한 소리가 새었다. 그는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며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정원, 자신의 창고 앞, 문은 아래로 내려져 잠겨 있다. 몸이 찌뿌둥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발걸음을 한번 떼자 무게중심을 잃을 듯 휘청거렸고, 토할 것 같아 입을 막았다. 생소한 역겨움에 입술을 떨었다.
"욱," 속이 메스꺼워 바닥에 앉았다. 무릎 꿇은 채 한참 숨을 고르자 목덜미가 따가워 손바닥으로 잠시 쓸어본다. 뾰족한 것으로 패인 세 개의 줄이 양 옆으로 나 있었다. 눈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들자 굳게 내려닫힌 창고 문이 있었다. 무릎으로 조금 기어가 그 앞에 섰다. 못 보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런 구식 자물쇠를 언제 달아뒀었지.' 생각하며 묵직한 그것을 만지작대면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빛 옅은 가로등에 은색 자물쇠가 반짝거렸다. 그는 순간 흠칫했다. 손끝에 무언가가 있었다.
"뭐지……?"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자물쇠를 놓고 손을 들여다본다. 손끝을 비비자 까슬까슬한 가루가 흩어졌다. 혀로 살짝 맛보자 비린 느낌이 확 퍼졌다. 깜짝 놀라 손을 떼어내었다. 이건 피다. 내 것 아니면 누군가의 피.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피잖아……."
"맞아, 이젠 네 머리통에서 나올 그거지."
건조한 목소리가 찬 바람에 실렸다. 담담하고, 서늘한 광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깨닫는다. 아무 것도 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숨을 들이키고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네가 남긴 마지막 것을 마지막에 느끼기 위해서. ‘넌 행복해져선 안 돼.’ 죽기 직전의 주마등은 이토록 짧고 쓴맛 나는 것, 그는 금빛 눈을 감았다.
메론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퍽 하고 잠시 났다가, 곧 다시 고요한 새벽이 된다. 그가 지나온 수많은 시간들, 모든 것이 지옥에 가깝지만, 또 다른 그가 생각한다. 서늘한 봄은 좋은 계절이다.
내용 구성 : 4TH-17TH-8TH-17TH-15-17TH-17TH-17TH 형태입니다.
마지막에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시고 과거로 돌아갔다가, 머리 맞고 죽는게 17번째 시간을 되돌린 딥입니다. 이 점은 모르셔도 아셔도 글 읽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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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설 2013.07.28 00:07#144 24
ZADR/짐딥
등록일 2013.07.28
CONTINUE
"24."
얼켄이 검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가 얇은 혀를 타고 느지막하게 떨어졌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가늘고 불안하게 까딱이는 손가락이 의자에 앉아있는 실험체에게 향했다. '그건', 얼켄도 미크롭도 볼트인도 아닌 종족이었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안경과, 더듬이나 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북이 난 체모, 작게 반짝이는 금색 눈, 이상한 형태의 코. 작은 얼켄은 의자에서 세 발짝 떨어진 채 그것에게 말을 내뱉다가 혼자 대답했다.
"내가 널 다시 만든 횟수야."
얼켄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추었다. 지퍼같이 촘촘히 난 이가 혀를 깨물고 씹어 삼키듯 내뱉었다. 검은 손가락 세 개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패드를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스파크가 잘게 튀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그것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인데! 난, 난 네 냄새나는 시체를 한참이나 뒤져서 세포부터 재구성했어. 썩어가는 가죽도 재생시켰고, 끊어진 신경도 모조리 연결했지! 네 뇌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 내가 몇 번이나 레이저 출력을 조절했는지 알아? 네가 아냐고!!!"
낮았다 높았다 소리 지르던 목소리가 터졌다. 작은 기계음만 웅웅대는 기지 바닥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역겨움이 울렁댔다. 짐은 고개 숙인 그대로 팔에 손톱만 세웠다. "널 또 죽여야 해."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씹었다. 두려움이나 찝찝함의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모든 것이 그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있던 그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가늘고 긴 두 팔을 벌려 웃었다. 부드럽고 힘없는 움직임,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몸. 이 모든 모순은 무지 속에 있다. 단지 저것은 화사하게 피는 시체다. "짐."
상냥하고 건조한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숙여졌던 고개가 그도 모르게 움직였다가, 붉게 일그러졌다. 가는 혀가 입 안에서 떨렸다가 내뱉었다. "넌 아니야." 넌 그게 아니야.
"네가 아무리 그 멍청한 안경을 써도, 냄새나는 코트를 입어도, 넌 그게 아니야. 그 자식은,"
그 벌레 같은 자식은,
"절대 날 그런 목소리로 부르지 않아."
얼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의자 옆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패배와 가까운 몸짓을 그가 기꺼이 하는 이유는, 저것이 그의 숙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가는 손가락이 시체의 가는 발목을 만지작대었다. 그건 부드러움과 상냥함에 가까웠다. "짐." 그 시체는 똑같은 목소리로 그 달콤한 이름을 부르며 얼켄의 등을 쓰다듬고, 얼켄은 뿌리치지 않은 채 그것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얼켄이 저지른 이 이야기의 끝은, 끝이 없는 끝은 항상 똑같으나, 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24."
건조하고 낮고 젖은 목소리가 얇은 혀를 타고 무릎 사이에 묻혔다.
"그건 내가 널 죽인 횟수이기도 하지."
죽인 횟수와 살린 횟수가 24번으로 똑같은 이유는 짐이 딥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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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6.20 05:43#136 하관(下棺)
ZADR/짐딥/딥짐
등록일 2013.06.20
수정일 2015.03.29
하관이라는 건 관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미국식 장례는 방부 처리된 시신을 관을 내리기 전에 보여줍니다. 딥은 열 다섯 정도입니다.
CONTINUE
왔어?
가는 손이 책 한 장을 넘겼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세 시 햇살이 병실의 하얀 시트를 물들이고 있다. 빳빳한 종이 위엔 검은 글자가 없었다. 손가락이 그 위를 더듬다가, 곧 책을 덮었다. 왔으면 말 좀 해. 차분하게 병약한 목소리는 웃으며 손님을 질타했다. 손님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보여?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깔려 물었다. 손가락 네 개는 검은 잉크가 없는 책을 협탁 위로 옮겼다. 침대가 잠시 삐걱였다. 아니. 그 대답에 반박하기 위해 손님은 입을 열었다. 그 눈이 붉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건 너 뿐이니까 알지. 여긴 4층이야. 가는 혀를 가진 입이 빠르게 다물렸다. 검은 더듬이가 잠시 흔들렸다. 하얀 이가 몇 번 드러났다가 다시 입 안으로 사라졌다. 답지 않은 짓이다. 손님은 침묵 끝에 더듬더듬 말을 꺼내었다. 그럼 그건, 뭐야.
이거? 기분 좋은 바람이 옅은 녹색 커튼을 천천히 흔들었다. 손이 협탁 위를 더듬었다. 아이는 두껍고 무거운 책을 찾으려 어설프게 손을 놀리다 물병을 툭 건드리고, 잠시 흔들리던 물병이 곧 중심을 잃고 아래로 쏟아졌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가 질척하게 났다. 당황한 손은 딱 멈추었다. 아─아, 또.
그는 손을 거두고 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여기 물병 뒀어, 작은 소리로 불평하는 아이는 바로 앞에 자신이 찾는 것이 있다는 걸 모른 채 가볍게 포기했다. 아무튼 이건 점자책이야. 나 같은…사람들을 위한 책이지. 포기라는 것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손님은 창틀에 앉은 채 시트를 그러쥐는 손을 보았다. 그리고 감은 눈을 보았다. 의미도 없는 안경알 너머의 그건, 소름끼칠 만큼 담담했다.
사후 세계에 관한 이야기야. 넌 유령을 본 적 있어? 창 너머의 인공 숲이 나뭇잎을 부딪쳐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유령? 그게 뭐야. 잔디가 눕고 꽃더미가 흔들릴 것이다. 죽은 사람의 혼령, 난 본 적 있어. 어렸을 때 아기 유령을 봤지. 아이는 제정신이 아닌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한다는 평가를 한 평생 받아왔으나, 지금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꺼풀 뒤의 눈동자는 마주치기 싫을 만큼 차분할 것이다.
얼켄에게 죽음이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는지는 모르겠지만……인간들은 대다수 육체를 그릇으로, 영혼을 내용물로 생각해. 죽음이 오면 그게 분리될 수 있다고 보고. 분리된 영혼은 사후세계로 가는데, 그러지 못한 영혼이 유령이지. 이 세계에 남아있는 거야. 차분하고 조곤한 목소리가 주말의 한가로운 병실을 메웠다. 나는 유령이 있다고 믿어. 온갖 끔찍한 할로윈 괴물들도, 영혼 약탈자도 직접 봤는데, 아, 외계인까지도, 근데 유령이 없다면 이상하잖아. 아이는 외계인에 대해 언급하며 킥킥대며 웃었고, 손님은 무례하게도 표정만 굳혔다. 그 외계인 손님은 걸터앉았던 창틀에서 내려와 침대로 다가갔다. 관심 없어. 그렇겠지.
침대 옆에 선 얼켄은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시트를 살짝 쥐었다. 아이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느끼고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만히 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변장 안하고 왔어? 그래. 왜? 어차피……
의미도 없어. 쓰다듬던 손길이 멈칫했다. 그건 그렇지. 차분한 동의, 커튼이 두세 번 더 펄럭였다. 아이는 손을 거두고, 몸을 숙여 작은 외계인을 안아 올렸다. 외계인은 무례한 손님답게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 올라왔다. 그는 아이의 마른 다리 위에 앉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아이의 손길을 거부하고 화냈던 적이 있다. 아이의 눈이 아직 흐릿하게나마 보일 때, 시력과 함께 사그라드는 증오가 꼴 보기 싫어 병실의 꽃병을 부수고 바닥에 홈을 남겼었다. 아이는 멍하게 흐린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가, 씩씩거리는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 때야 노란 눈을 깜빡였다. '얼마 안 남았어.' 그 중얼거림, 탁한 동공에 가슴이 내려앉는 감각. '너무 화내지 마.'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이 시트에 얼룩을 남겼고 작은 물방울 비슷한 것이 그렇게 아플 수 있는지 얼켄은 처음 알았다.
얼켄은 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 회상은 지긋지긋하고 의미 없는 것이다. 아이의 다리 위에 옆으로 앉아 머리에 볼을 부비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 그는 까마득한 생각을 잠시 하려 했다가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죽음이 뭔지 알아? 고래 같은 거야. 얼켄은 침묵했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인간이 느끼는 거라면, 그게 맞을 수도 있겠지.' 아이는 말을 이었다.
거대한 입 속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의 시체랑 뒤섞이는 거지. 나도 그때는 시체야. 그 안에서 불을 피우면 나올 수도 있다고 어떤 책에서 봤지만……어떻게 불을 피워, 나도 시체인데. 그치? 동의를 바라지 않는 말을 웃음소리와 함께 소근대었다. 얼켄은 시트 위에 늘어진 가는 손을 손끝으로 건들다가 천천히 쥐었다. 맞아. 그가 대답했고 아이는 목 안으로 웃었다. 약 냄새나는 환자복이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두었다. 가만히.
사람이 왜 죽는다고 생각해, 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얼켄은 아이 외의 인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으므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절박하지 않아서야. 차분한 품 안에서는 죽어가는 것의 냄새가 났다. 내가 진짜 살고 싶으면, 단추 몇 개 사이로 보이는 명백한 병의 흔적들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겠지. 얼켄의 숨을 막히게 했다. 나는 그러기 싫어. 숨이 막혔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겪었던 것들, 아마도 말이야. 집게손을 가지고 살거나, 튜브를 목에 꽂고 연명하거나, 아빠가 개발한 티타늄 외골격을 사지 대신 쓰거나……그런 거 말이지. 그러기는 싫어. 목을 조르는 말들이 더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켄은 숨을 억누르고 자신의 껴안은 아이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럼 넌 패배해. 손가락 세 개가 아이의 볼에 닿았다. 아닌 거 알잖아, 짐. 나는,
네가 날 떠나기 전에, 먼저 널 떠나는 거야. 그게 내가 이기는 방식이지. 이건 게임이야. 더 고통스러워하는 쪽이 지는 게임.
속삭임은, 건조하고 위험하게 다가온다. ……내가, 네 죽음으로 고통스러워 할 거라고 생각해?
그건 잘 모르겠네.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으며 감은 눈을 또 감았다. 하지만 난 네가 죽거나 떠나면 많이 아플 거야. 지금보다 더.
그래서 그걸 겪기 전에 죽는 거야. 아이의 이마가 얼켄에게 톡 닿았다. 말라빠진 손이 천천히 다리를 더듬어 올라왔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스침, 마치 죽기 전에 너를 더, 만지고 싶은 듯이. 얼켄은 조용히 혀를 깨물었다가 아릿아릿한 혓바닥으로 물었다. 그의 숙적, 이젠 의미 없는 꼬리표를 단 15살짜리 인간에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 물음.
내가 널 살리면, 넌 살아날 거야?
허벅지까지 올라오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손끝이 타이즈 위를 두 번 건드렸다. 네가? 그래. 글쎄, 난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걸. 만약 그런다면? 넌 날 존중하잖아,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다 알아.
'난 너 따위를 존중한 적이 없어.' 얼켄은 얇은 혀로 할 말을 집어삼켰다. 아이의 대답을 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하늘은 변덕스럽게도 금방 어두워졌다. 회색 구름이 창 밖으로 꾸역꾸역 몰려왔다. 나무 잎사귀들은 요란스럽게 굴었다. 짧은 잔디가 눕고 꽃더미가 흔들렸다. 파스스……. 그 위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색 커튼이 펄럭이던 1인실 창틀 위로도 비구름이 스쳤다. 톡 톡 떨어지던 것들이 곧 시끄럽게 변하지 않았다면 시간이 멈춘 줄 알았을 것이다. 환자에게 알맞은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천장의 환기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 아이는 상냥하게 스커트 안을 파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피부에 딱딱한 손이 닿았다. 얼켄은 몸을 굳혔다가, 곧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안 울어. 그는 천천히, 아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이는 메마른 입술을 이마에 자꾸 눌러왔다. 그 느낌이 싫지는 않지만, 그것이 부드러웠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회상과 후회는 지긋지긋하고 의미 없는 짓이다. 손가락 네 개가 그의 볼을 감쌌다. 축축한 피부다. 그때 안 울려고 지금 우는구나? 아이는 다정한 손길로 웃으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마 최후까지 다정하겠지, 얼켄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이름을 불렀다. 딥.
응, 그래. 지금은 울어도 괜찮아. 딥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눈을 맞추고, 내가 닦아줄 수 있어. 입을 맞추었다. 짐은 눈을 감았다. 하얀 시트에 온통 파묻혔다. 검은 더듬이가 그 위에 늘어지고, 딥은 더듬더듬 그를 만지며, 어둑해진 실내가 더 어두워질 때 까지 소근댈 것이다. 곧 관을 내릴 거야. 상냥하고 다정하게, 건조하고 아픈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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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5.21 20:06#121 사지(四肢) 03
ZADR/딥짐/앰퓨터 소재 주의/수위
등록일 2013.05.21
수정일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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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무릎 꿇은 채 그를 안아들었다. 작은 몸이 달콤하게 팔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몸이 너무 가벼워 잠깐 멈칫하지만 그것을 눈치 챈 그는 코트 자락을 이로 물어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 검은 천을 물고 있다. 하얀 이 사이의 검은…것들, 그 아래의 가늘은 혀, 그리고 축축한 열망들……. 지금은 4시 13분이다. 숨 쉬기 버거운 시간, 공기가 온통 가라앉은 어둑함 속에서 그의 깜빡임은 가만히 나를 홀리고 나는 그 이마에 키스했다. 그는 쪽 하는 작은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동자를 접어 흘겼다가 고개를 돌려 코트를 끌어당겼다. 작은 그의 작은 움직임은 몇 번이고 나를 가슴 떨리게 하겠지, 나는 코트를 한 손으로 서투르게 벗어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웃옷을 마저 벗었다. 차가운 공기가 팔을 스쳤다가 가슴팍에 그의 더듬이가 닿아 긴장했다.
한 팔로 안아든 그의 몸뚱이, 초록색 피부에 닿고 싶은 손이 그 주위에서 망설였다. 어디를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으나 단내 나는 피부 조직들이 끊임없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머뭇거리지 마, 짜증나." 혀 차며 그렇게 내뱉은 그는 몸을 움직여 내 팔 안으로 파고들었고 짧게 남은 다리뿌리가, 이런 생각 하면 벌 받을 거야, 딥, 그러나 사랑스럽다, 나는 그의 몸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떨긴……."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심장이 덜컹했고 손 끝이 더욱 초조해졌다. 그가 고의인 것이 분명하게 더듬이를 가슴팍에 부볐다. 간지러움과 함께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듬이 그러지 마." 사실은 거짓말이다, 계속 하는 것이 좋다, 뭐든지. 네가 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그의 쫑긋 선 왼쪽 더듬이를 끝에서부터 천천히 만졌다. 손끝으로 이 질감을 기억하고 싶다. 그 끝을 이로 살짝 씹으면 그 몸이 살짝 뛰고, 매끈한 검은 것이 젖어 들어갔다. 안타까운 짧은 한숨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손을 내려 그의 다리뿌리를 천천히 만지작대었다. 절단면과 환부……그는 아무 말도 없다. '네가 화낼 줄 알았는데.' 그 말은 삼켰지만,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아파?" 내 물음에 그는 가슴팍에 기대었던 몸을 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남몰래 호흡을 참았다. 그 건조한 눈동자, 그 건조한 말들,
"아파, 죽을 것 같아."
"나도 아팠으면 좋겠다."
"건방떨지 마. 죽을 거다."
"그러면 안 돼?"
한없이 푸석푸석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그의 더듬이가 짧게 파르르 떨리고, 2초, 침묵이 찾아왔다,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줄게. 있잖아, 짐, 네가 지금 없어서 괴로운 것들, 내가 전부 줄게."
그는 눈을 깜빡이고 있다. 찌푸리지도 않고, 매끈한 각막에 내 눈동자만 담듯, 증오도 기쁨도 원망도 없다.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저 그 눈은 깜빡 감겼다가, 뜨이고, "필요 없어." 아,
"내가 필요한 건 네 패배와 시체야. 쓸모없는 팔다리 따위가 아니야."
어째서,
"난 이미 졌어, 짐."
내 마음은 갈팡질팡, 네가 가져간다면 좋을 텐데.
"아직이야, 아직. 내 완벽한 미학으로 널 집어삼킬 거다. 너는 그때 내게 무릎 꿇어야 해……증오와 공포로 복종해야 한다고."
'동정과 애정 따위가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은 문장이 침묵으로 맴돌았다. "그때까지 기다려." 단호한 말끝과 흔들리는 너의 혀가 무섭도록 권위적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할 뻔 했다. 네가 분명 찢어지게 웃을 것이다. "좋아……, 기다릴게." 듣고 싶지만 이 순간엔 어울리지 않겠지, 나는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나 이런 거 처음봐, 짐."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다리 사이 살짝 들어간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다가 중얼거렸다. 그의 늘어져있던 더듬이가 쫑긋 섰다. 당연하지, 처음 보여주니까. 이건 보여주는 거야? 내게? 그래. 왜? 물어보지 마, 스스로 알아내, 그게 네가, 해야 할……거기, 거기야. 여기? 물어보지 말라고. ……알았어.
그의 말에 따라 매끈한 피부결 사이에 살짝 들어간 부분을 천천히 문질렀다. 조금 있던 굴곡은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곳은 분명하게 촉촉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매끈한 점액이 손가락을 타고 내려왔다. 뜨거웠다. 말도 안 되게 뜨겁다. 아주, 작은 구멍, 그 곳에 검지를 밀어 넣기 시작했고 그의 몸이 화들짝 뛰고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 그가 힘들게 얇은 소리를 내었지만 힘든 것은 나였다. 더, 그가 짧게 명령했고 그의 삽입구는 손가락의 굴곡을 매끄럽게 삼키며 나를 불렀다. 그 안의 뜨거운 열락,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들, 모든 것이 엉망이다, 그러나 전부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아래가 뻐근해졌다.
"하……." 세 마디가 끝까지 들어갔고, 구불구불한 얼켄의 내벽에 맞추어 손가락을 굽혀 그 안을 더듬어야 했다. 수많은 세포덩어리 조직들, 신경다발, 부드럽거나, 오돌토돌한 부분들, "음, 후……." 손가락 끝으로 한 곳을 누르거나 비비면, 그는 팔 안에서 배를 내보이며 움찔거렸다.
그는 눈을 가리고 싶어 했고 나는 그 팔목을 잡아채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음을 깨닫고 우리는 시선을 맞추었다. 단지 네 차갑고 따가운 손 끝이 등으로 파고들길 바랐다, '네 맨손이 보고 싶었는데.' 나는 이 말도 삼키고 그를 품 안에서 내려놓으며 키스했고 그는 얇은 혀로 응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들, 그러나 원한 적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의 안에 여전히 하나 밀어 넣은 채로 이마를 맞대었다. 그는 눈을 잔뜩 찌푸렸고 불쾌한 듯 으르렁대었. 하얀 이로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지만 이건 정말 귀여울 뿐이야, 그는 더듬이를 빳빳이 세우고 말했다.
"나 지금 네 머리를 쥐어뜯고 싶으니까……눈 깔아."
"……내 눈이 어때서?"
"날 씹어 먹을 듯한 그 눈빛 말이다, 아주 건방져……."
"아니……, 네가 뭘 잘못 본 것 같은데."
난 그냥,
"난 그냥 지금 네가 사랑스러워."
"아, 아!!" 작은 얼켄의 몸으로 들어찼다. 매끈한 그의 생식기가 자신을 뿌리 끝까지 삼키는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고개를 흔들어 겨우 빠져나왔다. "후…아, 짐……." 나는 숨을 삼키며 튀어나올 것 같은 목소리를 계속해서 추슬러야 했다. 좁은 장기가 꿈틀거리는 작은 움직임까지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곱씹는다. "으, 이…무식한……" "크…미안, 괜찮아?" "아, 아파……." 그가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흘렸고 나는 잠시 어린아이처럼 불안해졌다. 사탕을 도로 빼앗길까봐. "…지금 후회해?" "하, 후회? 그딴 건, 너나 해…, 이 얼간아. 얼른 움직여, 빨리……." "움직여도 괜찮겠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떤 여자도, 겪어본 어떤 것도 이런 미친 달콤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그에게 끝없는 애정을 느껴서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다른 누군가에도 이런 것을 맛보여줄 수 있을까, 있었을까. '그건…….'
역겨워.
'싫어.'
나는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작은 몸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 안에서 조금 나왔다가 숨을 잠깐 몰아쉬고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아아악!!!" 들어가는 것 보다 더 거칠게 휘감기는 내벽, 말도 안 되는 비명, 그 어떤 울림이 이렇게 표독스럽고 거칠고 고통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나를 녹일 수 있을까, 나의 열망이 손 끝에서 검게 더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흰 시트에 얼룩을 남길 것이다.
"아, 히악, 아, 말도…안, 이건, 힉,"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짐……." 나의 끝이 그의 안에 삼켜졌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며 난폭하게 작은 내장을 휘젓고 있었다. 그때마다 젖은 안쪽이 그것을 먹어치우고자 달려드는 것 같았다. "큭, 아, 딥, 디입, 아!!" 그가 부르는 내 이름, "소리치고, 싶은 건, 내 쪽이야……." 오싹한 목소리에 등을 떨며 그의 오른쪽 더듬이를 휘어잡았다. 순간,
그의 고개가 뒤로 꺾이고 눈이 크게 떠지는 그것에 나는,
"아……넌, 진짜,"
미칠 것 같아.
"미쳐버릴 것 같아……."
자제를 전부 날려버리고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안으로 들어찰 때 마다 그의 짧은 다리뿌리가 쾌감으로 빳빳이 펴지고 흔들렸다. 그것은 보았던 몇 편의 포르노보다, 더한 음란함, 의도하지 않은, 홀림. "아, 크윽, 힉, 하, 시…싫어……." 내부를 거칠게 쑤셔 박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얇은 혀를 입 밖으로 내었다. 찌푸려진 눈동자 사이로 맺히는 참을 수 없는 뜨거움,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계속해서 더듬더듬 꺼냈다. "하…괜찮아, 괜찮아……." "아으으, 아니, 아니야…싫, 아악, 아!!!!" 그는 쾌감에 몸부림치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풀어진 혀로 어떤 소리를 내는지, 명백하게 기뻐하는 네 몸이 어떤 방식으로 뛰는지, 숨 막히는 내부가 어떻게 나를 먹어치우는지……나만 알면 되는 것들, 말이다.
"짐, 쉿……방문, 열려있어." 나는 그의 벌려진 입에 손가락을 하나 걸치며 속삭였다. 지퍼 같은 이가 단단히 닫히려 하다가 뼈마디 위에서 겨우 멈추고, "물어뜯어도 괜찮은데." 조금 아쉬운 소리를 하면 그가 숨을 고르며 눈을 흘겼다. 사소한 관능. "난, 크, 소리…, 안 참을 거야……." "그럼 내가 막아줄게." "후…네 혀가, 피걸레가 되겠지, 딥." "그거 좋은데." "뭐…넌, 변태야?" "아니, 음, 그럴지도 몰라." "이 멍청한─흡!! 읍!!"
난 그냥 네가 주는 상처를 가지고 싶어.
"미안……. 나도 이제 힘들어, 짐."
그와 나는 수도 없이 몸을 겹쳤다. 끊임없이, 새벽이 끝날 때까지. 그 힘없이 늘어지는 까만 더듬이, 축축한 혀, 미치게 만드는 목소리, 모든 것에 헤매며 서로를 더듬거렸다. 그의 피부를 잔뜩 긁어내렸다. 짧은 손톱 아래의 얇은 살점들, 그가 못하는 만큼. 닿은 부위가 너무 뜨거워 손을 델 것 같았지만 괜찮다. 모든 것이, 괜찮다. "힉, 아아……."
그의 달콤한 관능이 더듬이 끝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두 팔 두 다리가 있을 때 꿈도 꾸지 않았던 것,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적어도 나의 마음은,' 그에 대한 동정이나 얄팍한 욕정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지난 9년 간.' 내가 너를 짝사랑했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 단어 하나로 단정 짓기엔 아쉬울 테니까. 온통 엉킨 수십 가지의 실타래는 어떤 색도 아닌 것처럼, 차라리 물감이라면 검은 색일 텐데, 한 가닥의 실 위에 온갖 색들이 조잡하게 얽혀왔고 그건 이제 풀 수가 없을 것이다. 자르던가, "딥……." 뭉쳐버리던가, 둘 중 하나.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길게 떨었다. 나는 품 안의 작은 몸을 내려다보고 눈을 내려 깔았고, 검고 마른 잎사귀가 가냘프다. 끝 오돌토돌한 환부에 내가 고통스럽다. 이 상처는 점점 아물지만 네 마음은 썩어 들어갈지도 몰라, 깊은 피비린내가 나는 착각에 그의 어깨에서 숨 들이쉬고 그는 나를 밀어낼 팔 조차 없었으나…더듬이를 세워 내 이마를 톡 건드려주었다. 작은 기쁨 같은 것,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자자, 짐."
"난 잠 따위 필요 없어."
"두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째일 거야, 그 말. 넌 필요 없어도 난 필요해."
"그럼 너 혼자 자라고, 이 짜증나는─"
"싫어."
베개에 옆으로 누워 그를 품 안에 가두었다. 매끈한 피부에 볼을 부볐다. 눈이 찌푸려져도, 그것도 좋았다. 넌 내게 짜증내지만 밀어내지는 않을 거야, 이제 난 알아. "같이, 자자. 응?" "……알았어."
나는 어쩌면, 하다가 깨닫는다. 내가 이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던 것, 네가 내 사지를 남김없이 가져가길 원하고 네가 남긴 상처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올 육체적 고통보다 너 잃을 외로움이 더욱 괴로워 그것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다.
"짐."
"뭐야……잔다며."
이제 다 알았다. 나는 그와 이마를 맞대었다.
우리가……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는 것들, 할 수 없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을,
"짐, 내가."
다시 움직여야 했다, 고요함은,
"내가 다 되찾아올게."
고요함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 명령해."
그의 잠시 잠겼던 얇은 꺼풀이 천천히 떠지고, 넓은 호수처럼 잔잔히, 흔들림 없이, 그러나 고요하지 않다,
"좋아, 내 노예야……. 명령하지."
그 얼굴은 어느 때보다 소름끼치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져, 발 아래 두고, 나 또한 발 아래 두고 근본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나와 섞었던 혀를 내밀며 속삭였다. 끝없는, 관능.
되찾아 와.
그건 네 거야.
나는 이미 그의 팔다리가 되길 자처했고, 그는 나머지를 내게 준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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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5.20 01:20#120 사지(四肢) 02
ZADR/딥짐/앰퓨터 소재 주의
등록일 2013.05.20
수정일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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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누운 침대 옆에서 꼬박 삼일을 뜬 눈으로 보내었다. 그는 잠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몇 번이고 소리쳤지만 그가 아프다는 것은 확실했다. 몸의 휴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많이 아팠다. 작은 몸이 한밤중에 떨리기 시작하면 그는 짧게 남은 팔다리 뿌리를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가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저주의 말을 흘렸었고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이 목소리 안에 내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적어도 네가 나를 원망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생각했고, 그의 떨리는 더듬이 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등을 굽히고 싶어 했지만 몸을 마음대로 돌릴 수조차 없다. 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몸에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가 닿고 싶어 했다가 곧 다시 오므렸다. 고개를 숙였고 길지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눈동자가 똑바로 떠져 있었지만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가냘프게 떠진 눈에는 그가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이 스쳐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것을 마주하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시선은 요동치는 시트 주름에만 머물렀다.
스물, 하나, 나는 수년간 그를 겪어 왔지만 그를 마주하는 나는 아직도 어렸다. 나는 방법을 몰랐다. 그에게 제대로 속죄하는 방법, 용서받지 않아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방법, 그가 날 저주해도 편히 잠들 수 있는 방법, 그가 언젠가 날 떠나도 주저앉지 않을 방법, 주저앉아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 사람들이 찬사했던 내 머릿속에는 들어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두 다리가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약할 것이다. 나는 그저 자기만족으로 그가 아팠던 만큼 나도 아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침대 가에 얼굴을 묻고 날이 밝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건 완전히 어린 아이의 방법인 것을 '알고 있어.' 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새벽 네 시쯤 얌전해졌다. 시계가 깜빡깜빡하는 건 내 눈이 감겼다 떠졌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아직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한층 안정된 그의 호흡이 나를 안심시켰다. 잠시 망설이다가 잔뜩 주름진 시트에 손을 뻗었다. 수면 모드로 들어간 그의 눈은 잔뜩 찌푸려 감겨 있다. '언제쯤…….'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사치스러운 것임을 깨닫고 곧 접는다. 시트 쥔 손이 버겁다. 아주 가벼운데도.
나는 조심스레 침대 옆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몸 옆에 걸터앉았다. 수면 모드의 그는 완전히 얌전하므로 손가락을 살짝 굽혀 두 번째 마디로 그의 얼굴 피부를 스쳤다.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가 눈을 뜨고 날 비난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를 만지거나 나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둘 중 하나는 하고 싶으니까. 그의 눈 아래에서부터 턱까지 천천히 손가락을 내리다가 잠시 멈추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는 것들, 할 수 없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안자고 있지? 짐."
여기서 멈추어 버린 듯이, 조용하고,
"……얼켄은 잠 따위 필요 없어."
고요하다. 그의 눈이 그렇다. 얇은 꺼풀이 천천히 떠지고 넓은 호수처럼 잔잔히, 흔들림 없이, 나는 또 빠진다. 그건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물웅덩이처럼,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어?"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고 있었지."
식은 피처럼,
"미안해."
"뭐가."
"널 멋대로 만진거 말이야."
"하, 전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집어치워."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될까?"
"아니."
응고된 끈적한 감정들,
"내 옷 벗겨."
그것들이 나를 옭아맸다. 그 눈은 차갑게 식어있지만 내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잠시 숨을 삼키고 그가 고개를 살짝 움직여 내 검지 두 번째 마디에 닿는 살결이 더욱 깊게 스치는 그 찰나……. 나는 후회할 것이 분명하면서도 들이킨 숨을 내쉬지 못하고 손을 움직일 것이다. 가벼운 시트 아래의 섬유자락들, 그의 두 팔과 다리가 있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건 욕정이 아니야.' 변명이 아니라, '어쩌면 동정일지도 몰라.' 짧은 뿌리만 남은 그의 타이즈를 손끝에 걸며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짐."
내가 너를 동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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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5.10 22:12#114 학교, 점심시간, 과학실
ZADR/딥짐/짐딥
등록일 2013.05.10
수정일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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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첸은 딥을 좋아했다. 이 학교에서 머리 큰 미친 녀석이라고 불리는 그 딥이냐고 물으면 그 아이가 맞다. 그녀는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부류였지만 딥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그녀를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관심이 없을 뿐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항상 딥을 보고 있었으며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는 꽤나 열렬히 호감을 표시했지만 딥은 그녀의 발렌타인 고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니까.
그녀가 빈 과학실에 그녀의 짝사랑 상대가 있을까 어슬렁댈 때 복도 저 끝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딥과 짐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챈 그레첸은 자신도 모르게 과학실로 숨어들었다. 아마 그들이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녀는 문과 멀리 떨어진 창가의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과학실의 길고 큰 책상은 그녀를 머리끝까지 숨겨주기에 충분했다.
"아, 그러니까 좀!!!"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딥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며 큰 소리로 과학실 문이 열렸다 닫혔을 때 그녀는 벌떡 일어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도대체 넌 뭐가 문제야, 이 외계인아, 내가 또 네 끔찍한 계획을 안 들어줬다고 이러는 거라면, 봐, 그건 비터스 선생님이 날 불러서 그랬던 거라고 몇 번이나─" "그딴 변명 집어치워! 알고 있으면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뭐? 왜, 어차피 쓸데없고 멍청한 계획이겠지." "지금 내 말을 쓸데없는 거라고 말했어? 네가, 감히?" "그래, 이 시끄러운 도마뱀아!"
그들이 싸우는 소리는 그레첸이 듣기에 충분히 컸다. 그녀는 이 흥미로운 대화를 더 듣기 위해서 더욱 몸을 웅크리며, 숨을 죽였다. 악쓰는 것에 가까운 대화가 오갈수록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둘 중 어느 하나의 몸이 책상에 부딪치고 의자가 넘어지고 발을 바닥에 끄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는 몸을 책상 안쪽으로 바짝 붙였다. 신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너 너무 제멋대로 구는 거 알아? 저번엔 네 베이스에서─" "뭐, 섹스할 때?"
그레첸은 그 말에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다. "……아, 제발, 짐. 조심성 없게 그런 말은," "왜, 이 멍청아. 조심성 없는 게 누군데? 너 그때 내 더듬이 절반을 아작 냈잖아, 아주 뜯어 먹지 그랬어, 허?" "…그건 내가 그때 사과했잖아."
오, 맙소사. 그녀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은. 그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창가까지 굴러왔고 그들과 그녀 사이에는 책상 옆을 막아놓은 얇은 나무판 하나뿐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발끝을 오므리고 입을 더욱 세게 막았다. 짐의 것이 분명한 가발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책상 구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지만, 그녀는 그들을 훔쳐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그건 너무 끔찍하고, "그럼 지금도 내게 잘못을 빌어, 비참하게, 얼른!" "내가 지금 뭘 했는데?" "닥치고 빨리 내게 키스하라고!!!" 역겨운 짓일 테니까.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얇은 숨 사이로 짐의 눈동자, 같은, 렌즈 한 쪽이 어설프게 굴러와 그녀 앞에서 픽 쓰러졌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좁은 구석에서 좀 더 물러날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짐, 이 멍청아." 듣고 있는 수 밖에 없다. 끈적한 소리와 옷자락의 마찰음,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클래스메이트의 높은 한숨,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그 외계인의 이름을 부르는 아주, 작은 소리, 질척한 그 모든 것, 그것들을. 차라리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은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녀, 그레첸이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한계점일 때, 다행이게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고 그들 중 한명이 서둘러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수업 시작이야!"
'짐! 빨리 와!' 라고 소리치며 후다닥 뛰어나가는 목소리는 아까 전의 낮은 부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레첸은 멀어지는 소리에 드디어 긴장을 풀 수 있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남은 한 명, 아마도 외계인…그러니까 그녀의 초록 피부 클래스메이트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있던 가발을 툭툭 털어 그 더듬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변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소리로 그 모든 것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가 빨리 이 교실을 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그가 몸을 일으킬 때조차 긴장을 풀지 못했다.
곧 손바닥으로 옷을 터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가벼운 발소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동자조차 자유롭지 못한 채로 한참을 불안하게 위로 고정하고 있다가 드디어 깊은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 그레첸은 자신이 들었던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잔뜩 긴장했던 몸을 추스르며 손을 바닥에 짚었다. 그, 바닥.
두 팔 사이에 그 외계인 클래스메이트의 매끈한 렌즈가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순간 소름 돋아 오므린 손 끝에서 조금 떨어져 까만 신발이 보였다. 그레첸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고, 그녀의 오므라든 손과 떨어진 렌즈 사이에 무언가가 내려박힌다.
그녀의 동급생은 몸을 숙여 매끈한 렌즈에 손을 뻗었다. 목이 졸릴 것만 같이 느릿한 움직임은 그녀의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불을 켜지 않아 조금 어둑한 실내, 그녀는 미칠 것 같았다. 저 가발 안에 그 더듬이라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한쪽 눈은 완전히 붉었고, 왜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그의 동그란 가방 같은 것에서 튀어나온 날붙이 같은 것이 바닥에 박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눈을 노릴 수도 있었던 날카로움, 가늘고 작은 손이 태연하게 당초의 목적을 집어 들었지만, 단지 렌즈를 주우러 온 것이 아닐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힉," 그녀는 처음으로 소리 내었다.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길게 웃는 입술, 지퍼 같은 이 사이에서 가늘은 혀가 매끈하게 움직였고 그녀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저건 내 거야.'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왜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넘보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날붙이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잔뜩 긁어 내렸다. '죽여 버리겠어.' 색 다른 동공이 잔뜩 가늘어지며 소름끼치게 웃는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포기했다.
"짐! 너 안와?"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저 복도 끝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분명한 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뒷문에서 짐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보이지 않겠지, 짐은 그 길고 날카로운 것을 가방 같은 것에 집어넣으며 숙였던 등을 펴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흘려 대답했다. "벌레가 있어서."
그녀는 둘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고개 들었던 그대로 굳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 그레첸은 천천히 침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딥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자신은 완전히 벌레였던 것이다.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책상은 어떤 피난처도 될 수가 없었고 그녀는 바닥을 더듬어 본다, 마주했던 죽음과 삶의 경계 같은 것, 바닥에 남은 선명한 자국이 그녀를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왜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가발 속에 숨은 더듬이든, 렌즈 뒤의 붉은 눈동자든, 그녀가 좋아하던, 딥이든 간에.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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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4.28 03:28#98 사지(四肢) 01
ZAD/딥짐/앰퓨티 소재 주의/수위없음
등록일 2013.04.28
수정일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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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안아 올렸을 때 그는 가느다란 팔다리 두개를 잃었을 뿐이지만 손 안에 잡힌 그의 목숨의 무게가 너무나 가벼워 나는 숨을 들이켰고 그는 들어본 적 없는 작고 높은 외계어로 길게 울었다.
모든 게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은 얼켄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몸을 지탱할 팔과 다리가 없는 그에게 베개가 높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작고 가벼운 몸은 침대에 출렁임도 남기지 못했다. 인간은 얇은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고 마르고 가벼운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덮어…줄까?"
얼켄의 탁해진 동공이 선명한 천장 조명에 잔뜩 찌푸려져 있다가 인간을 흘끗 쳐다보았다. 인간은 허리에 힘이 들어가듯 긴장하고, 필요 없어, 얼켄의 혀가 힘없이 늘어진 채로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꼼지락대던 손가락이 잠시 길게 펴졌다가 다시 오므라들었다. 인간은 얌전히 얼켄 옆으로 천을 치워 두었다.
무겁고 건조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눌렀다. 얼켄은 탁한 눈동자에 빛을 띄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얼켄에게 눈동자를 고정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었고 그는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그의 얼켄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자신과 한참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켄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저 초록색 외계인의 피부를 찢어 내린다고 해도 자신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 손에 들어오게 된…안쓰러운 나의 얼켄,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동정 받느니 아마도…….
"뭐 해? 앉아." "어? 어? 어…응……." 생각에 빠져들던 인간은 건조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짧은 물음을 거듭하며 얼켄을 쳐다보았다. 맨들한 눈으로 인간을 흘겨보던 얼켄은 그 눈빛을 거두었다. 인간은 자신의 침대임이 분명한데도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친구가 누운 곳보다 아래에 걸터앉았다. 작은 몸이 작은 출렁임에 크게 흔들리고, 초록 피부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궁금해?" "뭐?" 인간은 얼켄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그 물음에 한 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궁금하냐고 물었잖아, 내가 어떤…어떤, 그래, 역겨운 인간들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 일들…말이지." "짐, 난…." "날 동정할 생각하지 마." "뭐라고?" "알고 싶으면서 내가 불쌍해 죽겠다는 얼굴 하지 말라고, 역겨워……난 그 어떤 것보다 네 동정이 짜증나니까." "…짐, 내가," "입 다물어, 네 텅 빈 머리통이야 뻔해. 듣고 싶다면 말해주지, 네가 그 되도 않는 연민을 때려치운다면, 딥."
딥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안경 뒤의 갈팡질팡한 눈동자가 작은 몸을 천천히 훑었다,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 손을 천천히 거두고 입을 막았다. 가린 입 안에서 울렁이는 수천 마디의 말들이 혀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힘겹게 씹어 삼키고 고개를 떨구었다. "좋아… 이야기 해 줘." 다만 인간은 얼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동정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곧 얼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이 뭐였는지 알아? 모르겠지, 나도 모르니까."
딥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천장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검은 방에 푸른 조명, 쌓여 있는 자료와 불 꺼진 모니터, 벽에 붙은 많은 패러노멀 포스터들, 갈색 빛 띈 노란 눈이 외계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이를 불안하게 헤매었다. 그는 어떤 것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추잡한 것들은…일단 내 몸 구석구석을 뒤졌지. 내 피부와 더듬이를 잘랐고, 나는 묶여서……" 얼켄은 감각을 더듬어 지옥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팩과 내 몸에 여러 가지를 달기 시작했지."
내려다보는 일곱 쌍의 눈, 인간과 다른 뼈마디가 삐걱거리고 몸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힘줄도 근육도 소용이 없고 성대는 소리 지르는 것조차 포기했었다, "내 장기들의 박동이 나타나 있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역겨운 것들을 주입했어." 끊어지는 숨만 내쉴 뿐, 온 몸에 퍼지는 지구의 끔찍한 독극물들은 핏줄로 스며들어 신경들을 전부 찢어버릴 것 같았다. "호흡, 체온, 박동, 그 모든 게 인간과 다르다는 걸 밝히고 나서는 바늘구멍을 늘렸지." 꽂히는 바늘, 떨어져나갈 것 같은 살점, 그들은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기록해 놔, 호흡곤란과 경련… 이들에게도 폐가 있나? "그들은 내 배를 갈라보고 싶어 했는데, 그건 마지막의 마지막에 할 생각이었을 거다." 그들은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아직은 죽여서는 안 돼. 숨이 턱까지 차는 감각, 1초 1초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고통에 PAK은 주인의 상태를 감지하고 자동모드로 돌아가려 했으나, 그에 연결된 수많은 장치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PAK을 제어당하고 있었어, 그건 지금 생각해도…끔찍하군."
차라리 기절하거나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면 편했을 것이다. 온 몸의 신경세포가 모조리 자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인간들은 실험체의 죽음을 허가하지 않았고, "그들은 날 깨운 채로 팔을 잘랐지, 일단 왼쪽부터," 그들이 가져온 실톱의 날은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다. "그 단면을 아주 흥미롭게 관찰했고… 그게 둘쨋날." 무디지 않은 날이 어깨 아랫부분을 잘라 내릴 때 뭉개지는 세포조직들, 얼켄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다음엔 오른 다리." 과학자들은 엄청난 집중력과 끈기를 발휘했다. 원하는 결과를 찾아내기 위해 실험체에게 몇 날 며칠이고 매달려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작은 몸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몸 위를 넘나드는 메스, 평평해지지 않는 심전도그래프, 인간들은 반신반의한 초현실생물이 진정한 과학 앞에서 현실이 되는 것을 느끼고 인간의 지식이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을 체감하며 전율에 떨었다. "끔찍한… 역겨운 눈빛들." 인간들에게는 매 찰나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엔 오른팔, 그 다음엔 왼 다리, 내 피부를 뜯어가고, 핏줄을 뒤지고, 내 팔다리를 유리관 안에 넣었지." 인간의 실험체, 이제는 너무 작아진 얼켄, 그는 위대한 얼켄의 정신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었다. 얼켄은 거기까지 기억해내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떼었다. "탈출 시도를 안 했던 게 아냐, 나는 수면같은 비생산적인 짓을 하지 않으니 밤은 좋은 시간이었지. 하지만 내 PAK이 통제당하고 있었다고 말 했지? 난 그 시간에 눈만 뜨고 있을 수 있었어."
그는 세균이 거의 없는 깨끗한 곳에서 실험체로 쓰였다. 후각이 마비되어 약품 냄새를 구분할 수도 없었다. 실험에 도취된 인간들의 웃음소리와 흰 시트에 흡수된 옅은 분홍빛 혈액, 깨끗한 실험실에서 가장 난잡한 것은 얼켄의 몸뚱이였다, 팔과 다리와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그것이다. "그리고 네가 왔고."
거기서 얼켄의 이야기가 끝났다. 가볍고, 내용 없는, 그런 말들은 실험실의 상황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딥은 걸터앉았던 침대가에서 미끄러졌다.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얼켄이 말했던 것은, 그가 들었던 것은…….
"맙소사."
인간은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그를 동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동정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인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싶었으나 지금의 막막함과 참담함이 그의 호흡을 막았다.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얼굴을 묻고 캄캄한 눈을 감았다. 안경이 콧대를 누르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지쳐버린 인간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들이…욱, 너를……." "지금 날 역겨워하는 거야?" "미쳤어? 난 지금…아, 모르겠어, 믿을 수가…물론 믿어, 믿지만…, 미안해." "동정하지 말라고 했지." "동정이…아니야."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잖아."
뭐?
그는 목을 지탱할 힘도 모조리 빠진 것 같았지만 얼켄의 말이 그의 고개를 번쩍 들게 만들었다. 뭐… 뭐라고 했어? 딥은 덜덜 떨리는 턱으로 그의 외계인에게 다시 한 번 묻고, 흰 빛 섞은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간에게 향했다, 얇게 뜨여진 눈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붉은 진심이 섞여 있고 인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네가 끊임없이 말했었지, 날 잡아 가두고 해부하겠다고." "아니, 물론 그랬었지만 그건─" "내 말이 틀려?" "짐, 나, 난─"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쳐졌던 어깨가 바짝 힘이 들어가고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얼켄이 내뱉는 말에 정신이 까마득해진 인간은 말을 고를 수가 없다,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네가 원하던 짓이 그들과 다를 게 뭔데." 딥은 얼켄의 한 마디 한마디에 바싹 마른 입술이 새하얘질 때 까지 깨물었다. 눈을 애처롭게 굴리며 대답할 말을 찾아보려 했으나 어떤 말도 변명이다. 얼켄의 몸에는 너무 큰 흉이 졌다.
"실험윤리? 집어치워, 개 같은 인간들."
인간은 천천히 침대를 올랐다. 힘 빠진 팔을 팔꿈치로 겨우 지탱해가면서 느릿하게 그의 얼켄에게 다가갔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절망이 불비처럼 내리고 있다, 화끈화끈한 대지는 전부 다 타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인간은 손을 덜덜 떨고, 떨었다.
"네가 그들과 다르게 날 취급할 거라고 생각해? 그건 착각이지."
참담해진 인간의 정신과, 바싹 타버린 얼켄의 육체는 거짓이 하나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잔인하리만치 진실이다, 단 한줄,
오만이라고,
인간아.
인간은 작은 몸 앞에 무릎 꿇고 눈을 가렸다, 작게 벌려진 입에서 문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들이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비참하다, 믿을 수 없이 비참하다, 흐린 눈이 깨진 유리병처럼 눈물을 쏟아내었다, 뚝 뚝 하고, 시트 위에 얼룩을 남기지만 그 얼룩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절망이 불비처럼 내리고 있으니까. "넌…그런 짓을 당할 때 계속 내 생각을 했겠구나, 짐, 내가 했던 말들을……" 인간은 모든 것을 후회했다,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하다가 선택한 것은 후회이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후회라도 언제나 늦다.
높고 낮은 울음소리가 침묵에 섞여들었다. 그는 둥글게 몸을 굽혔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짐……." 말끝은 심하게 흐려지고 그는 얼켄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 분홍색 옷 위에도 눈물자국이 남을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얼켄은, 그 하나에게 감정을 내뱉을 권리가 있었다. 얼켄 짐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인간의 떨리는 굽은 등을 응시했고, 내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지만, 하고 생각했다가 곧 그림자 진 눈을 감았다. 떨리는 울음소리가 밤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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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4.24 20:38#94 못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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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3.04.24
수정일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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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를 먹었다, 너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목소리가 조금 변했고 눈높이가 높아졌다, 너는 목소리가 똑같았으며 눈높이도 여전했다. 나는 손도 커졌고 힘도 조금 세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을 못 입게 되었다. 너는……글쎄다.
옷장의 새 옷은 늘어갔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은 그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벽에 걸린 내 옆에 나와 지극히 다른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들의 변화율을 구할 수 있을 만큼 똑똑했고,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너는 아니었다. 시계가 떼어진 벽에는 못과 자국이 남는다.
처음에는 나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와 그는 친구조차 아니었다. 나는 늘 녀석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도시를 헤집으며 건물을 파괴하고 변종 햄스터를 만들어 내거나 소시지가 되거나 호두 먹는 무스에게서 클래스메이트를 구해내는 것들 같은, 그런 것이 우리에겐 일상이었으나, 언제나 모든 것이 녀석에겐 침략 계획의 일부였다. 그는 내 모든 것을 끔찍하게 만든 최악의 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조차.
멍청한 초록색 집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없는 것은 그의 숙적과 로봇 강아지와 사악한 지구 침략 계획 정도였다. 보안망은 여전히 돌아가지만 나는 모든 외부 방어 시스템을 알고 있다. 그 곳으로 아주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수천 번 망설였다.
길고 짧은 것, 무겁고 가벼운 것,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은, 어째서인지, 내가 어리기 때문이었을까, 네가 지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왜 나는 일찍 인정하지 않았을까, 인정한다, 그가 사라지지 않았었다면 나는 평생 몰랐을 감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들, 그것은 나의 외계인이 전부였으나 그가 내 모든 것이므로, 내 내면 세계 안에서 와장창 부서지고, 유리창보다 더 쉽게,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소파 위에 걸린 원숭이 액자가 그들의 지도자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을 알고 있다. 베이스로 내려가는 내부 요소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 나는 또 수백 번 망설였다. 나의 숙적이 실존할 때, 내가 망설인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미쳐버린 줄 알았다. 몇 날 며칠은 녀석의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의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그의 사악한 계획이 튀어나올 것 같아 안심하지 못했다. 정말 그가 모행성의 함대를 끌고 와 지구를 먼지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부푼 눈알에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것은 다 헛짓이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쫓았던 것들이 전부 먼지만도 못했다는 걸 깨닫기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베이스의 음성 인식 명령 체계와 보안을 뚫고 갈 만한 길은 전부 알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깊은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나는 다시 수십 번 망설였다.
그가 내 비참한 인간의 삶을 남겨두고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살아가는 것도 살아지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살아가는 것은 명백히 숙적이 있을 때 더욱 힘들었지만 살아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밤마다 떨었다. 나의 끝없는 불안감과 내가 보든 모든 것의 환상과 나를 괴롭히는 환청들, 나는 어깨를 감싸고 두려워했으며 나에게 남은 것은 손톱자국 밖에 없었다. 다만 나는 머리를 자르지도 손목을 긋지도 않았다. 목을 매거나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길은 있지도 않았지만, 가끔 아주 가아끔 높은 곳을 지나갈 때 짧게 떠오르는 생각들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엔 그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 짓거리는 내가 네게 가졌던 감정이 명백한
애정
이라고 인정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죽음으로 그따위 것을 인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또한 내 인생에서 아마도 너 없는 죽음이라는 답안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펜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그것은 잉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금까지 죽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시 장치로 본 녀석은 늘 이곳을 거만한 걸음걸이로 누비고 다녔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건드려 보아도 어떤 보안음도 신경질적인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무엇보다 원하던 기지 침입을 몇 천 번 망설였던 것은 내가 몇 만 번 헛된 기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들보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머릿속으로 일기를 쓸 것이다. 베이스 바닥을 밟으면서, 이것들을 증명 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매일 매일, 숙적에 대해 조금씩, 지워 가면서,
너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인식하면서,
이 모든 절망,
"걸!!! 그건 거기에 두지 말라고 말 했잖아!"
스쳐 지나갈,
"3년밖에 안 됐는데 이렇다니, 컴퓨터 두뇌를 손봐야겠어."
끔찍한 것들,
"시큐리티 넷은 왜 또 작동을 안 해? 으! 이 진흙덩어리 행성은 말이야, 어? 좋은 거라곤……."
너와,
"아니, 머핀 아니야. 비스킷도 아니야, 타코도!"
나의 마음과,
"음?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이 모든 아름다움,
"하? 허? 너 뭐야!! 딥, 어떻게 들어온 거지? 어떻게─"
제발 내가 미친 것이 아니길,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왔군! 컴퓨터!!"
아니 미쳤다면, 영원히 미쳐 있길,
"오, 맞아, 지금은……네가 그런 거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내 컴퓨터를─이 벌레야!!"
길고 짧은 것, 무겁고 가벼운 것,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내가 소유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
"내가 손을 보고 나면 당장 널 여기서 내쫓아 주지, 아니, 내가 가지고 돌아온 위대한 얼켄 기술들로 널 샅샅이 분해─"
세계 안에서 부서졌던 모든 것들이,
"허? 헤이…그 눈에서 나오는 것들은 뭐야? 끔찍한…그런…, 딥?"
전부 거짓이라고 해도 나는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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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13.04.14 23:48#89 608호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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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3.04.14
수정일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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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른들 혹은 세상에게 바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자신이 준비한 외계 생명체와 지구 침략의 증거를 봐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그러나 흔한 어른들은 집세를 내야 했고 그들의 신용카드 청구서에는 최소 3명분의 식료품 비용이 끼여 있으며 기름 값은 날로 높아지고 죽을 날은 다가오지도 않는데 생명 보험료는 다달이 빠져나가는 고통을 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침대 매트리스가 전부 돈다발로 채워지지 않는 이상은 평범한 어른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물론 평범한 어른이 아니나 누구보다 더 현실적으로 아이의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말 듣지 않는 아이에게 정신병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아이는 608호에 입원 절차를 밟게 되었다.
무겁고 안에서 열리지 않는 철문은 굳게 닫혀 있다. 소아 정신병동의 가여운 아이들을 어른들의 통제 하에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이자 목표이지만 그것이 최선 같아 보이진 않는다.
608호실 환자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 강박장애, 정신 분열증
담당 의사인 Dr. XXXXX의 진단 아래 다음의 약물 치료와 인도를 받는다 : 자이프렉사/리스펜/로나센/프로작/솔리안/항우울제 클로마프라인/인지행동치료 요망/도파민 주기측정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완벽히 정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폭력적 행위도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구속복을 면제받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담당 의사와 임상심리학자는 '아직' 아이를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적당한 침대와 적당한 바닥, 적당한 조명과 적당한 창문이 있는 병실을 내어 주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도 밤도 별도 들어왔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과 서 있는 가로등 옅은 불빛 조금이 새벽의 담을 비추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신경 강박증 환자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출렁이는 부드러운 느낌은 아이가 이곳의 생활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줄여주었다가,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몸을 일으켜 깜깜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벽에 고정된 흰 창살 사이로 밤이 어둡고, 노란 눈은 검은 밤 속에서 빛을 찾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여기에 갇혀있을 시간에 그 녀석은…….' 작은 손이 녹이 슨 차가운 창살을 세게 쥐었다. 덜컹.
그는 철저한 정신병자로 취급받은 일주일 동안에도 그의 모든 정신력을 얼켄 인베이더에 곧 침략될 지구를 걱정하는 것에 쏟았다. 자신의 담당 의사인 Dr. XXXXX는 상담 시간에 최근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으며, 점심식사 도중 볼 수 있는 TV에서도 외계인 침략에 대한 기사는 한 자도 보이지 않았으나 똑똑한 아이는 그것이 정신병원의 검열에 의한 것이라 추측했다. 그는 그의 적을 믿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 완벽하게 대항했던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없다면 그의 외계인이 언제든 이 행성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아이는 2일에 한번 주어지는 산책 시간에 인솔담당에게서 빠져나와 3일 전의 폐신문을 주웠고 그 신문 3면에 살린 화재 사건이 얼켄 인베이더의 짓임을 알아냈다.
아이는 울지 않았지만 점점 초조해져 갔다. 그는 누구보다 똑똑했으나 어른들을 속이는 법을 몰랐다. 그가 어른들을 속여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생각하는 어른들은 모두 다 멍청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철저히 미친 취급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증거를 들이밀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을…몰랐다. 그러나 감옥에서 울어버리기엔 아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가 시간을 이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낭비하는 동안, 지구 정복은 한걸음 더 나아갔겠지. 의사들에게 이딴 말을 해봤자 그건…진료 카드에 쓸 문제점 하나를 더 주는 것 밖에 안 된단 말이야. 젠장, 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어째서 내가…내가……." 아이는 말을 하다 숨을 삼키기 괴로운 듯 잠시 멈추었고,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이로 깨물어 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차가운 창살에 이마를 대고 머릿속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게 다 네 탓이야, 짐, 다 …탓이야."
밤마다 밤마다 느꼈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시선을 밖으로 떨어트렸다.
산책길로 쓰이는 좁은 길옆으로 나트륨 등이 깜빡였다, 큰 쓰레기통과, 병원 옆 작은 숲으로 통하는 길과, 이렇게 훑어봐도 나가지 못할 것이 높은 뻔한 담이 주황색 깜빡임에 잠겨 있다. 아이는 조금 쿨럭였지만 자신의 낮은 기침소리가 밤의 정신병동을 깨울 것 같아 창백한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밤바람이 싸하게 불면 키 낮은 나무들이 우수수 흔들리고, 밤의 나뭇가지는 늘 갈라졌다. 둥글고 넓은 잎들이 바닥을 쓰는 소리……. 아이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시각 따위는 없었지만, 아마도 얼켄 인베이더가 이 지구에 있는 한은 말이다, 그러나 그는 밤이 좋았다. 별이 보였고, 자신이 외게인 침략에 의해 떠들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안쓰럽게 보는 눈빛들이 보이지 않았고, 그리고……. 가로등이 팍 하고 터졌다. 그리고 자신의 숙적이 찾아올 것을 바라는 때였으므로, 아이는 밤에 안심했다. 지금은 전율에 떨고 있었다.
"짐!!!"
"네가 거기 갇혀 있어서 한결 편하구나, 딥─"
분홍빛과 보랏빛 섞인 우주선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헤드라이트를 딥에게 비추었다. 딥은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빛을 막았다, 그는 증오와 기쁨 사이에서 목소리를 울렸다, 짐, 네가 찾아올 줄 알았어. 범인은 언제나 현장을 찾길 원하니까.
딥을 놀리는 것 같았던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딥은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렌즈 없이 매끈한 붉은 눈이 밤 사이에서 반짝이는 듯도 했다. "짐? 거기 있어?" "그래, 내가 내 미천한 노예를 거두러 친히 찾아왔지." 딥의 목소리는 심한 흥분에 들떠 있었고, 그는 노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숙적에게 기쁜 듯 손가락질을 했다. "네가 그 동안 어떤 흉악한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내가 다 알아, 3일 전의 화재 네가 낸 거지? 시약 공장 화재 말이야." "그딴 짓 안 했어." "거짓말 하지 마, 이 도마뱀아. 거기엔 네가 흥미로워 할 것들이 잔뜩이었다고…아, 좀 도와봐! 날 데리러 온 거 아니야?" "맞아, 하지만 설마 내가 문까지 열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하? 이봐 짐, 난 너처럼 등에 달린 그것도 없다고. 애초에 나 같은 어린애가 이 철장을 어떻게─" 딥은 그에게 신경질 내듯 녹 슨 철장을 쥐고 앞으로 밀었다. 창살 6개짜리의 작은 철장은 위험하게 덜컹이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더니 벽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졌다. "맙소사." 딥은 짧은 순간 중얼거렸고 지면에 고정된 쓰레기통과 창살이 부딪혀 병동의 사람들을 전부 깨울만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들이 다 깨겠어!" 딥은 귀를 막았다가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그의 외계인에게 말했고,
"얼른 이리 넘어와."
부트크루저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바람이 딥의 얼굴을 쓸었으며, 밤에 묻혀있는 검은 장갑이 딥에게 손을 내밀었다. 딥은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처넣은 주범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으며 웃었다. 왜냐하면.
"그래, 짐."
20XX.07.23 AM 02:22
608호실의 헐거웠던 철창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쓰레기통과 부딪쳤다, 자유로워진 608호의 환자는 그의 외계인에게 갔다. 시끄러운 방범 장치가 잠시 후에 울리고, 병동의 환자들을 절반 이상 깨웠으며, 강박적인 비명들이 시끄럽게 울렸다. 야간 당직 간호사는 자택에서 평안한 수면을 취하고 있던 Dr. XXXXX를 호출했다. 프로페서 멤브레인은 몇 개의 주를 건너와야 했으며 개즈는 학교를 쉬어야 했다. 왜냐하면.
멤브레인은 그의 아들을 보았고 어찌할 줄을 몰랐으나 그는 고글 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오, 아들아, 제발 그만 하라고 했을 텐데, 그 말도 안 되는 과학은……"
"이미 네가 증명했지 않니, 네가 3년 전 네 외계 친구를 붙잡아, 우리에게 전부 보여주었지 않니……."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벽한 정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폭력적 행위도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구속복을 면제받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담당 의사와 임상심리학자는 아직 아이를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수리가 필요한 병실을 큰 걱정하지 않고 내어 주었다. 아이는 손목을 긋거나 벽에 머리를 박는 자학적 행위를 하지 않았고, 자살을 할 심리적인 불안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갈 준비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새벽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것은 608호가 있는 제 3병동의 가로등 전구가 터져 작은 불꽃이 인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이 누군가가 뛰어내릴 이유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예상했어야만 했다, 그 곳은 정신병원 이었으므로.
딥이 마침내 짐을 붙잡고 해부해 세상에 외계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짐은 죽었고, 그 이후의 딥 이야기를 쓰고싶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