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 특별법, 남녀차별 금지법 등 성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속속 마련되는 등 성폭력 예방을 위한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다.뿌리깊은 남성중심주의에 편승해 성폭력이 날로 늘어만 가는 현실은 이 같은 노력을 비웃고 있다. 29일로 개원 10주년을 맞는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최영애 소장과 6년째 성평등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영자 가톨릭대 교수가 그 원인과 대안을 이야기했다.
■이영자 (李令子)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심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제10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대학원(E.H.E.S.S)에서 정치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82년부터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가톨릭대 성평등연구소장(95년),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전문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최영애 (崔永愛)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보은ㆍ김진관 사건 대책위원회 공동대표(91~94년),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 대책위원회 공동대표(93~95년)를 맡았고 현재는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한국성폭력 상담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우리나라 성폭력 실태를 말씀해주시지요.
▦최영애= 부끄럽게도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1990년대초 인터폴의 발표에 따르면 인구비례 성폭행 발생률이 미국, 스웨덴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3위였어요.
95년 이후부터는 우리나라가 미국에 이어 2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수치가 경찰에 신고된 건수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외국은 성희롱까지도 포함해 신고하는 반면 우리는 강간이나 성추행 정도만 신고한다는 거예요.
또 외국은 실제 발생 건수의 20%가 신고되는 반면 우리는 겨우 6% 정도라는 게 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입니다.
▦이영자= 그럼 사실상 우리나라가 성폭력 발생률 세계 1위라는 얘기네요.
-이렇게 된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영자= 우선은 우리 나라 남성들의 성 개념이 왜곡돼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지요. 가부장적 문화속에서 성관계란 그저 본능적이고 일방적이어도 된다는 의식이 뿌리깊습니다.
때문에 강제 성관계에 대해서도 죄의식 같은 게 별로 없지요. 여기에 소비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성 산업이 성장하면서 상황을 악화시켰어요. 물론 세계 어디에나 남성들이 돈을 주고 성을 사거나 폭력으로 성관계를 맺기는 해요.
하지만 우리처럼 일반적이지 않아요. 프랑스 유학시절 남자 친구들에게 들어보면 정상적 성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돈을 주고 성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프랑스에 그렇게 환락가가 많아도 그런 곳을 찾는 사람들은 부인을 데려올 수 없거나 애인이 없는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들에겐 어려서부터 성이란 함께 즐기는 것이란 의식이 내면화하고 있어요.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거나, 상대방이 전혀 즐겁지 않은데 자신만 쾌락을 느꼈다면 자살할 정도로 수치심을 느낍니다.
▦최영애= 그래요. 우리나라 성관계에서는 여성은 대상이나 객체일 따름이었지요. 공식적으로는 성을 금기시하면서 비공식적 영역에서는 탐닉하는 이중적 태도도 문제입니다.
남성은 성을 마음껏 행사해도 오히려 남성다운 호방한 사람으로 여겨지지요. 여기에 성폭력 피해 여성은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순결 이데올로기’까지 겹쳐 성폭력이 더 만연하게 됐습니다.
▦이영자= 우리 사회는 성폭력 가해자가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숨기고 그냥 넘기도록 방치해둡니다.
정신대 피해자의 증언이 그동안 잘 안 나왔던 것도 이런 이유이지요. 우리나라 국민 정서는 전반적으로 그런 일을 당하도록 한 국가를 창피해 하지않고 끌려간 여자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10년간 여성계에서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니까 겨우 일부 증언이 나왔습니다.
▦최영애= 얼마전 5세 여아가 이웃 할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는데요, 엄마가 고소를 하면서 주변에 함께 있던 아이들을 증인으로 삼으려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 엄마들은 자기 애들에게 “너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고 하고 걔하고 놀지도 말아라 ”고 가르치고 피해를 당한 아이가 지나갈 때 “너는 이제 몸을 버렸는데 어떻게 하니?”라며 비아냥댔어요. 결국 그 아이의 가족은 이사를 가 버렸지요.
이런 문화니까 택시 강간을 한 기사가 나중에 다시 피해여성을 불러 금품을 갈취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영자= 옛날 우리 어른들은 성을 본능이라고 여겨 아이들에게 아예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성을 본능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거에요. 예컨대 밥을 먹는 게 본능이라면 밥 세 끼를 어떤 방식으로 먹느냐는 건 문화잖아요.
우리는 성충동이 있으면 그저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런 충동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느냐, 그래서 어떤 식으로 성관계를 맺느냐를 중요시합니다. 그런 교육만 제대로 돼도 성폭력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최영애= 우리나라의 나쁜 특징이 또하나 있어요. 앞서 말한 남성중심 성문화에 탓에 성폭력이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1960~70년대 노동현장의 책임자가 근로여성에 대해 성폭력을 빈번히 행사했지요. 노동통제의 수단이었습니다.
또 상담을 하다보면 경리사원들은 회사비밀을 유출하지 않도록, 유능한 보험사원들은 다른 회사로 옮기지 못하도록 성폭력을 당한 경우가 많아요.
▦이영자 = 남녀간 권력관계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하지만 이것이 다시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성폭력 위협으로 인해 여성들의 사회적 운신폭이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직장에서 대개 여자 혼자 출장 보내거나 밤에 숙직시키는 것을 꺼리는 데 결국 승진의 기회도 줄게 되지요.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강간하는 남성은 소수지만 그런 남성들 때문에 남성의 권력이 유지되는 것을 빗대 “소수의 남성이 다수의 남성을 대변해 남성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지요.
- 어떻게 해야 성폭력이 줄어들겠습니까.
▦최영애= 우선 성교육을 지금과 반대로 해야 합니다. 성교육을 주로 여자들에게 했고 여자에게 성폭력을 조심하라고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남자들에게 제대로 된 성문화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영자= 맞아요. 저는 주부들에게 여자 아이들의 귀가시간을 통제하지 말고 남자아이들을 일찍 들어오도록 하라고 강조합니다.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소지를 없애야지 피해자에게 이렇게 하지 말아라, 피해라 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부모들은 남자아이들에게 만일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 성관계를 했다면 그녀의 자존심을 상처낸 것이라고 인식하도록 교육시켜야 해요.
가해의 원인에 대해 먼저 관심을 갖고 예방대책을 찾는 게 순서가 아니겠어요? 아울러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성과 폭력은 문화 소비재로 더 많이 팔리고 유사 범죄를 더욱 촉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성폭력 피해자만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감수성과 인격도 황폐화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세대가 폭력 외설 등이 가득찬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데 사회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최영애= 저희 상담소에도 문화와 교육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성평등교육문화센터, 21세기 여성미디어운동센터를 열었습니다.
또 교사들에 대한 성교육, 특히 남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돼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국방부에서 전 장병에게 성교육 테이프를 상영했다지요.
성폭력이든 희롱이든 자신의 아내와 딸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가만있을 남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성들이 그런 심정으로 자신을 추스리고 성폭력에도 여성과 함께 대응하는 풍토가 정착된다면 성폭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30대 남성들은 직장에서 남녀고용평등법안의 직장내 성희롱 규정을 자세히 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등이 제정돼 사람들로 하여금 성폭력과 성희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것이지요.
중장기적 관점의 문화적 접근방식과 별개로 우선은 법과 제도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앞으로는 통신상의 사이버 폭력과 스토킹 등에 관심을 갖고 관련법 제정을 위해 힘쓸 생각입니다.
진행=유성식기자
ssyoo@hk.co.kr
정리=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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