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통렬한 반성문
한 개의 대기업 관료조직에
나라가 의존하던 환경
노키아가 한 순간에 무너지자
젊은이들 사고 완전히 바뀌어
노키아가 남긴 유산
글로벌 시장 주도하며
IT 기술 이끌던 인재들
벤처기업 400여곳 세워
지난 16일(현지 시각) 핀란드 수도 헬싱키 시내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이테메렌카투 지역의 7층짜리 대형 유리 건물. 오후 3시였지만, 북극에 가까운 헬싱키의 겨울은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건물 맨 위쪽에 2개의 기업 간판이 밝게 빛났다. 수퍼셀(Supercell)과 욜라(Jolla)라는 이름이었다. 한때 '노키아'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던 자리다.
3년 전 설립된 수퍼셀은 핀란드 벤처기업의 우상이다. 전 직원이 130명에 불과하지만, 올해 매출 1조원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난 10월 소프트뱅크가 지분 51%를 1조7000억원에 인수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욜라는 2년 전 노키아 출신 엔지니어 100여명이 모여 만든 스마트폰 운영체제 개발사다.
이 두 기업이 입주해 있는 이 대형 건물은 작년 말까지 노키아 휴대폰 사업부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 R&D 센터였다. 지금은 노키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일하던 노키아 엔지니어 1000여명은 노키아의 자체적인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주로 개발했는데, 작년 초 노키아가 독자 운영체제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폰 체제를 따르기로 하면서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때문에 이 건물에 있던 개발 조직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고, 이 건물은 부동산 회사에 매각됐다. 그리고 지난 9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 부문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건물 로비 중앙에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텅 빈 휴대폰 진열대만이 이곳이 얼마 전까지 노키아 건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줬다.
핀란드는 노키아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른자위 땅에 있는 7층짜리 이 건물 중 수퍼셀과 욜라가 쓰는 2개 층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층이 1년 넘게 텅 비어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핀란드 경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핀란드의 민간 경제연구기관 ETLA는 지난 3월 0.3%로 예측한 올해 핀란드 경제성장률을 9월엔 -0.4%로 낮췄는데, 지난 9월 핀란드에서 노키아 휴대폰을 생산하던 유일한 공장인 살로(Salo) 공장 폐쇄로 인한 수출의 급격한 감소가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그 공장의 폐쇄로 직원 78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 2007년 이후 핀란드의 노키아 직원 수는 2만5000명에서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노키아가 한창 잘나가던 지난 2000년 핀란드 전체 고용의 1%를 차지했지만, 올 6월에는 0.4~0.5%로 떨어졌고, 내년엔 0.2%로 떨어질 것이라고 ETLA는 추정했다.
노키아 매각은 핀란드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ETLA의 연구이사 페트리 루비넨씨는 와이어드 인터뷰에서 "매각이 발표된 그날 아침 핀란드의 분위기는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우리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핀란드가 노키아의 몰락에서 중요한 교훈들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키아의 폐허 위에 벤처 창업 붐이 일면서 노키아의 공백을 메워나가고 있다. 기자는 핀란드에서 만난 여러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핀란드의 '노키아 반성문'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반성문은 오늘의 한국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소수 대기업이 국가 경제를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노키아뿐 아니라 목재 제지 분야의 큰 대기업들이 많지요. 그 가운데 노키아는 정점에 있었습니다. 인구 대비 대기업 수로는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한국과 사정이 비슷할 겁니다."
창업 콘퍼런스 운영 비영리단체인 '슬러시(SLUSH)'의 미키 쿠시(Kuusi) 수석 운영위원이 말했다. 이 단체는 매년 11월 헬싱키에서 '슬러시'란 이름의 세계 창업 콘퍼런스를 개최하는데, 노키아를 그만둔 기술자들이 5년 전 처음 만들었다.
그는 "5년 전만 해도 핀란드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대학생들이라면 예외 없이 노키아, 맥킨지, 런던의 투자은행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고, 창업은 이상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됐다"면서 "최근 슬러시의 참가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핀란드의 창업 지원 기구인 혁신기술청(TEKES)의 야네 페라요키 스타트업 담당 국장은 정부 입장에서도 노키아라는 거대한 존재가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재가 너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전체적인 경제 발전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키아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노키아는 핀란드 전체 법인세의 23%를 차지하고, 수출의 20% 가까이 차지했을 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지난 17일 헬싱키 근교 에스푸(Espoo)에 위치한 노키아 본사를 가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노키아 본사에 가자"고 했더니 "아 노키아의 집(Nokia House) 말이죠?"라고 했다. 노키아는 핀란드인에게 집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 노키아의 역사는 핀란드보다 길다.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게 1917년인데, 노키아는 1865년 설립됐다.
핀란드는 잃어버린 이 집을 찾아야 할까? 수퍼셀의 일카 파나넨(Paananen) 창업자 겸 CEO가 말했다. "핀란드가 노키아를 되찾아야 할까요? 핀란드 국민이나 정부나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하나의 기업 노키아가 맡았던 일을 지금은 훨씬 많은 회사가 나눠서 맡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최근 핀란드에선 예년보다 훨씬 많은 벤처기업이 창업하면서 노키아 없는 핀란드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각성의 계기
파나넨 CEO는 "노키아가 무너진 것이 장기적으로는 핀란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키아가 무너지면서 전체 산업, 특히 IT 산업 쪽에 생존에 대한 절박함과 위기의식이 강해졌고, 그런 분위기가 국내 기업의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수퍼셀이라는 회사 이름과 조직 구성도 노키아 같은 실패를 겪지 말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수퍼셀이라는 이름은 세포(cell)조직처럼 작은 조직이 모여 강력한 회사를 만든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실제 조직도 5~6명이 한 개 셀(팀)을 이뤄 별도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 상업화까지 책임지는 구조다. 그는 "혁신의 상징이었던 노키아가 너무 거대해지면서 조직이 관료주의적으로 바뀌고 경직됐고, 그 때문에 노키아 내부에 있었던 수많은 인재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면서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막으면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가 지금의 회사 조직"이라고 말했다.
'슬러시'의 미키 쿠시 운영위원은 "핀란드는 원래 IT 창업을 선호하는 분위기와 정반대"였다면서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모험을 회피하는 문화
한때 혁신의 상징이었던 노키아의 기업 문화는 노키아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관료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문화로 바뀌어 갔다. 핀란드 젊은이들도 입사 1순위가 노키아였던 것은 이 회사에 들어가 혁신을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많은 월급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혁신과 모험을 통해 휴대폰 시장을 평정했던 노키아는 가장 모험을 싫어하는 기업으로 바뀌어갔다.
욜라의 토미 피에니마키(Pienimaki) CEO는 "노키아는 아주 크고 뛰어난 회사였지만, 결국엔 혁신을 이루기 어려운 회사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욜라라는 회사가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 노키아의 관료 문화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욜라는 노키아에서 '미고(MeeGo)'라는 이름의 휴대폰 운영체제를 개발하던 이들이 퇴사해 설립한 회사로, 전 직원 100여명 중 95%가 노키아 출신이다.
원래 노키아는 자체 스마트폰 운영체제인 '심비안'이 있었으나 보급이 잘 안 되자 이를 포기하고 인텔과 함께 '미고' 개발 프로젝트에 공을 들인다. 하지만 당시 경영진은 스마트폰 운영 체제로 심비안, 미고, 윈도폰 등 여러 대안을 놓고 오락가락했고, 결국 미고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미고 개발이 막 결실을 보려는 순간, 노키아 경영진은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폰'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고 개발진은 노키아를 뛰쳐나와 욜라를 창업했고, 미고를 기반으로 '세일피시(Sail Fish·돛새치)'라는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개발, 이를 탑재한 '욜라폰'을 지난달 출시했다.
노키아의 유산
노키아의 쇠락은 핀란드 사회에 새로운 각성을 가져왔다. 2011년 봄 노키아의 CEO 스티븐 엘롭의 "우리는 불타는 플랫폼 위에 서 있다"는 발언이 핀란드 사회에 충격을 던졌고, 그 해에 벤처기업 로비오의 '앵그리버드'라는 모바일 게임이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노키아가 고용을 창출하기는커녕 고용을 줄이기에 이르자 핀란드 정부는 다양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핀란드 혁신기술청의 올해 예산은 8000억원. 이 가운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2000억원으로 지난 10년 사이 3배가 늘었다. 올해 투자 대상 벤처기업은 600여곳에 이른다. 야네 페라요키 국장은 "민간 벤처캐피털 회사들이 손대기 어려운 리스크 높은 혁신 프로젝트를 골라 심사한 뒤 초기 단계부터 지원한다"면서 "단기적인 투자 회수가 아니라 기업 생태계 형성을 통해 국가 경제의 균형 잡힌 성장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노키아 고위 임원 출신인 페카 소이니 혁신기술청장은 "노키아 출신 인재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해 IT 산업을 활성화시키느냐가 당면 과제"라고 강조한다. 현재 노키아를 떠난 인력이 주축이 돼 시작한 벤처기업만 400여곳에 이른다.
그러나 노키아가 핀란드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신감이다. 쿠시 슬러시 운영위원은 "노키아가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점유했었다는 것은 핀란드인에게 '우리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과거와는 야망의 수준이 다릅니다. 모바일 게임이나 다른 IT 분야에서 제2의 노키아가 나오지 못한다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슬러시란 핀란드에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쯤 녹은 눈을 의미한다"면서 "캘리포니아의 쾌청한 여름이 아니라 춥고 질척거리는 11월 헬싱키에서도 얼마든지 뜨거운 벤처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노키아처럼 혁신 능력을 잃어버린 회사는 아닙니다. 여전히 잘하고 있어요.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고, 혁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의 인재들이 삼성전자로만 몰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서 뛰어난 스타트업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게 더 바람직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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