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北, 직접 연락하라"… 공개 무시당한 韓 중재외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면서도 여지를 남겼다. 서한 말미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마음을 바꾼다면 나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교란책을 쓰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직접 하라는 메시지라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원색적 비난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같은 선전전은 하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그간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던 한국을 거치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서한에서 “북한이 회담을 요청했다고 전달받았다(informed).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요치 않다”고 했다. 이와 관련, 이날 오전 최선희는 담화에서 “저들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앉자고 청한듯이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이 김정은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대미 소식통은 “미국은 투명성을 중시하는 사회라 알려진 것과 달리 뒤로 숨겨진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론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은 이전 대통령들과 달라서 양보하는 일은 없다고 했는데, 최선희의 주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뭔가 내줬다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받았다’면서도 ‘누구로부터’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숨겨진 단어는 ‘한국으로부터’로 추정할 수 있다. 지난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을 만났고,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을 원한다고 전해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선희가 상반되는 주장을 내놓고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에서 이를 다시 바로잡으면서 한국이 북·미를 오가며 각기 다른 말을 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특사 외교’가 탈이 났다는 비판과 함께 한국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의 의구심은 3월8일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 카드를 들고 온 정 실장을 만났을 때부터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 실장과 면담한 뒤 갑자기 “오늘 논의 내용을 한국 대표들이 발표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정 실장은 백악관 웨스트윙 바깥에서 급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정 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조윤제 주미 대사가 카메라 앞에 섰고, 미측 인사들은 보이지 않게 뒤로 빠졌다. 북·미 정상이 만난다는 사실을 한국 국가안보실장이 발표하는 비상식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당시 외교가에서는 “혹시 나중에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을 떠넘길 심산으로 한국이 발표하게 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백악관은 청와대와의 온도차를 숨기지 않았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3월8일 한국으로부터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과 트럼프 대통령을 가능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전달받았다”고 확인했다. “한국 특사단이 백악관에 와서 전달한 내용”이라며 정 실장이 백악관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 한국이 ‘북한이 정상회담을 원한다’고 했는데 북한은 아니라고 한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
 
이 관계자는 또 “(22일)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북한의 비핵화 의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솔직담백하게(forthright) 전달했고, 이런 여건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문 대통령에게 공유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 시작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김정은과의 회담이 취소 가능성을 처음 밝혔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정의용 실장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가능성이 99.9%라고 언급한 데 대해서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확률에 대해서 할 말은 없고, 우리는 정상 간 대화를 통해 김정은이 초래하고 있는 회의적 분위기를 한국이 확실히 잘 전달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우리가 북한과 외교 교섭을 하는 과정과 관련해 한국은 모를 수도 있는 것, 우리가 맞닥뜨린 어려움들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했다”면서다.
 
 
하지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24일 새벽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도 기자들에게 “정의용 실장이 99.9% 열린다고 하지 않았나. 북·미 정상회담 성사는 될 것으로 관측이 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24일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공식 발표하기도 전에 NSC 상임위원회를 주재했고, 청와대는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첫 번째 조치임을 평가하고, 폐기 참관 동향 점검 및 향후 조치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어떤 식으로 핵실험장을 폭파했는지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시작했다는 장밋빛 전망을 유지한 것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정상회담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다만 서로 상대가 대화를 요청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대화 재개도 상대의 선제적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결국 비핵화 조건과 시기에 관한 조율이 진전돼야 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