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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연구가인 경제학자 스탠리 엥거만은 얼마 전 방한 당시 가졌던 한 강연에서 조선시대의 노예제도를 언급하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징을 지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유인 즉은 조선시대 노예의 대부분이 동족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제외한 동시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 등 피정복지의 이방 민족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이웃 나라를 침공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로 쓸 수 있는 전쟁 포로나 이방 민족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 사람 중 절반이 노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인권과 민족 감정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라고 해도 타민족들이나 천한 신분으로 삼았지, 어느 정도 동질감이 있는 같은 민족을 천한 신분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적으로 꺼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허드렛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선은 노비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그들의 자녀를 다시금 노비로 만드는 <경국대전>을 통해 신분제를 확립했다. 이러한 조선의 노비규정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까지 지속됐다(인용: 김승욱 著, ‘제도의 힘’).

노비 이외에 광대, 공장, 백정, 기생, 무당, 상여꾼, 천민, 하천배 등을 ‘상농’이라고 불렀는데, 다 합치면 그 숫자가 전 인구의 70퍼센트(실제 노비는 40%)였다. 이처럼 하층민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의 가격은 조선시대 내내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수준이었다.

1801년 순조는 노비안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명했으나, 공노비에 한정된 것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땅 한마지 없는 농민은 노비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백성의 대부분이 상놈 신분이었던 조선시대에 생산성의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해방 이후에도 노비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0년대 경상도 울산, 웅상, 경주 등에서는 적어도 5~10명의 노비를 거느린 양반 가문이 존재했다. 이 지역에서는 양반촌과 노비촌으로 거주지가 구분되었고 신분에 따른 상호 간의 경어법이 존재했다고 한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1960년대부터 노비 계급은 대부분 사라진다. 1970년대까지는 그 존재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1980년대 이후로는 섬노예, 지적장애인 등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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