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논란에 대한 한 가지 참고자료 by socio
http://socio1818.egloos.com/3838998
최근 "전학생은 홍어녀" 라는 만화에 대한 이글루스의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쟁에 참여한 유저들의 모든 글들을 세세하게 검토해보지는 못하였지만, 개략적인 인상비평을 하자면 좁은 차원에서는 지역주의 문제에서부터 넓은 차원에서는 소수자-전라도인을 소수자라고 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논의가 있어야겠지만-에 대한 조롱의 정당성 문제까지 다양한 층위에서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포스트에서는 시간과 역량의 한계로 인해 넓은 차원의 문제는 다루지 않은 채 좁은 차원에서의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서만 논하도록 할 것이며, 이 역시 현 사태 자체에 대한 필자의 독자적인 의견보다는(즉, "전학생은 홍어녀" 만화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시시비비는 논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사태의 해석에 도움을 주는 선행연구를 인용하는 것을 통해 대체하도록 할 것이다. 본 포스트에서 인용할 텍스트는 후마니타스 출판사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의『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이다. 이는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 속설이 아닌 엄밀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 규명을 시도한 기념비적 문헌인 만큼 논지에 대한 찬반여부를 막론하고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카피레프트에 해당되는 저서인지라 제목의 링크를 클릭하면 전문의 PDF 파일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아래 인용문에 제시된 참고문헌의 출처나 인용부분 후의 전개가 궁금하다면 전문을 다운받아서 보면 될 것이다.
----------------------이하 인용-----------------------------
-일상 속의 질문들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게 되니 흥미로운 질문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이 역사적으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옛날 문헌들에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을 인용하곤 한다. 대표적으로는 ‘풍전세류’(風前細柳)니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니 하면서 ‘간사하고’ ‘뒤끝이 나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으로 따지면 안 그런 지역이 없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해 이익을 좇는다’라는 충청도에 대한 평이나 ‘미련하다’는 강원도에 대한 평도 있었다.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은 말할 것이 없고 영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을 담은 역사 기록을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조반정 이후 영남 사대부는 오랫동안 차별받았고, 영조 때는 무신란을 계기로 ‘반역향’으로 낙인찍혔으며, 정조 때는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면서 이 지역 출신의 과거응시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반대로 호남을 좋게 평한 옛 문헌을 찾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윤선도나 정철의 글이 대표적이지만, 그 밖에도 전라도의 ‘전’을 뜻하는 전주는 조선 왕실의 고향이라 해서 어향(御鄕)으로 칭송되었고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은 우국과 충절의 지역으로 상찬되었다.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고, 김정호는 호남을 “전국 팔도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고 했으며, 정조는 “가장 어질고 충성스러운 고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기해야 할 질문은, 왜 호남에 대한 좋은 평가는 배제되고 오로지 나쁜 것만 선택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왜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는지, 어떻게 해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지금의 지역주의적 해석 틀로 변형될 수 있었는지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호남에 대한 나쁜 기록을 있는 대로 모아 반호남 지역주의가 역사적으로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역주의적 해석의 틀로 뒤틀린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여러 사람들에게 지역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물어보는 일도 재미있었다. 누구든 처음에는 오래전부터 지역주의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것이 언제의 기억인지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실제로는 그리 멀리까지 가지 못했다. 일제 때 태어난 노인들의 경우 해방 직후부터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이 심각했다고 말했다가도 그게 몇 살 때쯤인지 물어보면 대개 청년 이후가 되고 시기는 금방 1960년대로 올라왔다. 해방 직후엔 오히려 함경도 등 이북 출신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더 심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한참 생각하다가 대부분 그렇다고 인정했다. 서울 토박이들의 인색함에 대해 이주민들이 느끼는 감정도 있지 않았냐고 하면 비서울 출신의 대부분은 이를 긍정했다. 그런데 왜 이주민들끼리 서로 지역감정을 다투게 되었을까를 물으면, 서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존해야할 사람들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월남한 이북 출신들은 남한에 정착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체제 차원’에서는 이들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지역과 관련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지역적 차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지역적 차이에 동반된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너무나 많았다. 호남을 백제와 동일시하며 삼국시대부터 영호남 지역감정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백제의 지리적 중심이 실제로는 지금의 서울과 충청이었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 역시 경상도 상주 출신이라고 말해 주면 다소 당혹해 하기도 했다. 함께 정치학을 공부했던 한 친구는 어느 논문에서 읽었다면서 1987년에 실시된 한 조사 결과를 이야기했다. 그 논문에 따르면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호남 출신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밝히기 꺼렸던 경험이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그 조사는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 조사 결과, 출신 지역 밝히기를 꺼렸던 경험이 있는 호남 출신 응답자가 17% 정도로 분명 다른 지역 출신보다는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는 호남 출신 응답자가 83%라는 사실이 아닐까 라는 의견을 말하자 그 친구는 다소 고민스러워 했다. 더 나아가 1970년대 말 조사 결과를 보여 주며, 그때까지는 호남 출신이 영남 출신을 심리적으로 가장 가깝게 느꼈고 반대로 호남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충청과 서울 경기, 강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는 더 당혹스러워 했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아무튼 이런 과정에서 필자는, 누구든 지역주의에 관한 특정의 해석 틀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의 과거 경험과 주관적 느낌뿐만 아니라 객관적 역사조차 그러한 해석의 틀에 맞게 변형되어 기억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호남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정치적 이용’(political use of the past),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 ‘전통의 발명’(invention of tradition) 등과 같이 역사학이나 정치학 연구에서 자주 쓰는 개념들을 소개해 주면, 한국의 지역주의 역시 보편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임을 금방 이해했다. 실제의 역사보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 따라서 역사는 과거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특정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재의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럴 때 특정 방향의 의미 구조를 담고 있는 편향성 내지 편견은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옛날부터 그랬다는 생각이나 전통이라는 것도 잘 따져 보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작위적으로 창조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론들이지만, 한국 지역주의의 사례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영남이나 호남과 같은 옛날식 지역 개념이 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 충청남도 금산이나 논산처럼 그 가운데 일부가 과거에는 전라도였던 곳에서 왜 더 강렬하게 스스로를 충청이라고 호명하고 싶어 하는지와 같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역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면서 그 망국성을 강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힘들었다. 아무리 뭐라 해도 지역성이라는 게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거나, 안 그러면 어떻게 한 지역에서 특정 후보에 90% 이상의 지지율이 나올 수 있냐면서, 어떤 경우든 그런 맹목성은 지역주의 때문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역주의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보면될 이 간단한 문제를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면서 도리어 필자에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많았다. “지역주의는 없다는 거냐”라고 되묻거나, “지역주의 극복하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이들과 대화는 불가능했다.
여기쯤에서 지역주의 망국론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는 게 좋겠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일반에 워낙 익숙한 주장이다 보니, 필자의 문제 제기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훈,『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p.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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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가지 기초적 논의
-반호남 지역주의
오늘날처럼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지역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그때의 지역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이었나? 옛날부터 있었다는 ‘지역색’ ‘지역 정서’ ‘지역감정’이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결과인가, 아니면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가? 197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고흥화‧김현섭(1976), 김진국(1977)의 조사 연구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구는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자료와 방법에 의존해 출신 지역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갈등의 내용을 조사 분석한 최초의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다.
고흥화‧김현섭에 따르면, 이 시기 60%에 가까운 피조사자가 결혼‧친구‧동업 관계에서 호남 출신을 기피 대상으로 꼽았다. 반면 호남 이외의 지역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은 평균 10% 미만에 불과하다. 김진국의 조사 역시 호남 이외 지역 출신 모두가 호남 출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적어도 1970년대 중후반 시점에 호남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이 다른 지역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과 분명히 구별될 정도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호남 출신은 어떤 근거로 호남 출신을 기피했고, 반대로 호남 출신은 지역 차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시 이들의 조사를 살펴보자.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비호남 출신이 호남 출신을 사회적 관계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주관적 편견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호남 출신이 호남 출신을 기피하는 이유는, 호남 지역이 갖는 정치경제적 특성이나, 호남 출신이 주로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 출신은 ‘간사하다’ ‘신뢰성이 없다’ ‘이기적이다’ ‘뒤끝이 나쁘다’와 같이 객관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개성적 특질 내지 행동 양식을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옛날부터 늘 있었다는 식으로 그 기피 의식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에 반해 호남 출신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갖는 소외감의 근거를 지역 간 경제적 격차, 특정 지역에 대한 인사상의 차별 등 권위주의 통치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해, 호남 출신의 경우 ‘사회구조적 차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체제’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비호남 출신의 경우 호남 사람의 타고난 부정적 특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해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국 1988, 236).
-영호남 갈등이 아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관점은 지역주의 문제를 영호남 갈등 혹은 이들 간의 지역감정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1977년 자료를 이용, 지역민 상호 간의 호오 정도를 측정한 김진국(1984)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준다. 지역주의 문제가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라면 지역민 상호 간 호오 태도에 있어 영호남 간의 거리가 크게 나타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우선 호남 출신이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 출신이었다. 역으로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서울과 충청 출신이었다. 호남 출신을 가장 덜 기피한 것은 영남 출신이었다. 이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호남 간 지역감정의 대립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호남 출신에 대해 비호남 출신 전반의 사회적 거리감은 크게 나타났지만, 그중에서 영호남 출신 간의 거리감은 가장 작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 영호남 사이의 거리감이 작았고 오히려 호남에 대한 서울과 충청 출신의 편견이 더 크게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문제를 큰 차원에서 제기해 보자. 압축적 근대화의 정점에 달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기에, 어떻게 출신 지역과 같은 귀속주의적인 차이와 주관적 편견에 바탕을 둔 반호남 지역주의가 부각될 수 있었을까? 시기적으로 그 기원을 어느 시점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통 사회에서부터 있었던 ‘전근대적인 것’ 의 연장인가, 아니면 ‘냉전 반공주의 체제에서의 권위주의 산업화’ 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근대적인 것’ 인가?
2. 반호남 지역주의의 역사적 기원
-전통 사회의 유산인가
반호남 지역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는 입장은 크게 두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지역주의가 1960~70년대의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보는 주장이다. 두번째 견해는 고대 국가 시기부터 강한 반호남주의가 존재했고, 바로 이 ‘반호남 지역주의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가 호남에 대한 경제적 차별, 엘리트 충원에서의 차별을 동반했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 견해는 한마디로 근대화론에 따른 이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론이 기초하고 있는 ‘확산 모델’에 따르면, 근대화의 충격은 귀속주의적이고 지방주의적인 가치와 1차적 유대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 사회를, 성취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가치와 합리적 유대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때 지역주의는 ‘전근대적인 것’, 혹은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전근대적 유산’의 하나로 정의되고, 근대적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비판된다(이영일 1971; 홍동식 1991). 두 번째 견해는 근대화론과는 정반대의 ‘시원주의적 접근’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이는 영남에 지역 기반을 둔 권위주의 정권이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을 때,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반호남 지역주의 때문에’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영남이 혜택을 받고 호남이 차별당했다고 보는 것으로,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지역주의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김만흠 1991; 신복룡 1997; 남영신 1991; 남영신 1992).
근대화와 지역 차별의 인과관계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두 견해 모두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적 유산에서 지역주의의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전통 사회의 지역주의와, 앞서 살펴본 1970년대 중반의 지역주의는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까? 사실 여부를 따져 보기 위해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설명 요소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호남 지역주의의 최초 기원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대립,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통일신라의 등장에 있다. 둘째 후백제와의 치열한 군사적 대립을 통해 고려가 건국됨에 따라 후백제 출신은 지배층의 구성 에서 배제되었다. 셋째, 농업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에 호남 지역은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었으므로 민란과 모반이 잦았고, 그 결과 영남 출신이 중심이 된 지배층에게 차별을 받았다. 넷째, 반호남 지역주의는 옛날부터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구조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맞는 말일까? 하나씩 따져 보자.
-신화로서의 시원주의적 지역주의관
삼국시대와 관련해 ‘백제=호남’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백제를 세운 온조(溫祚)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이주민 세력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존립했던 678년의 기간 중 493년 동안 정치적 중심지는 오늘날의 서울과 경기 지역이었고, 나머지 185년 동안은 오늘날의 충청도 공주와 부여였으며, 그 아래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서도 호남 출신이 지배층의 구성에서 차별되거나 배제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고려 전기 지배층의 배출 지역을 보면 후백제 지역 출신(31성관)과 신라 지역 출신(27성관)이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왕비의 배출 지역 역시 지역적으로 고르게 편재되었다. 특히 고려 말 몽고 침략에 대항하는 장기간의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과거 고대국가를 복원하고자 하는 지역주의적 경향은 사라졌고 그 뒤 지난 1천 년 동안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농업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적 관료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호남 지역이 특별히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거나 이로 인해 민란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크기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기준으로 볼 때, 특별히 호남의 과다 수취를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민란의 발생 빈도는 호남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영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남영신 1991). 조선시대 중앙 관료의 출신지로 볼 때도 특별히 호남이 차별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만약 조선 시대에 특정 지방이나 그 출신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호남이 아니라 서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서북 출신의 경우를 보면, 당상관이라는 중앙의 고급 관리에는 단 한 사람도 임용되지 않았으며, 후기에 와서도 지방관에 한해서 몇 사람의 예외만 있었을 뿐이었다. 중앙정부의 이런 차별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경기 이남에서는 의병이 많았던 반면 서북 지역에서는 의병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피난 온 왕자나 대신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이이화 1983, 121-123).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근대 이전부터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체계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근대 이후에 표출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적 오류’다. 무엇보다도 위계적 신분 사회이자 전통적 농업 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 전근대 사회는 개인과 집단의 자율적 의식 체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Gellner 1987). 따라서 혈통이라고 하는 귀속주의적인 기준에 의해 절대다수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삶이 사전에 결정되었던 전통적 신분 사회에서, 집단적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오페‧비젠탈(Offe and Wiesenthal 1980)이 “집단적 정체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은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절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을 토지에 결속시키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는 그 공간적 한계를 넘는 이동의 필요성을 갖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간적 이동을 허용하지도 않는 사회다. 그것은 대다수 생산 집단의 생활 세계에서 여타 지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치적 필요나 지배층 내 권력투쟁의 계기로 인해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부과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식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지배층 내부에 한정되었을 뿐 지역민의 의식구조에 침투해 자연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토대를 갖지 않는다.
-창조된 전통, 발견된 편견
물론 근대 국민국가로의 이행이 서구의 경로처럼,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산재해 있던 다수의 독립된 공동체들을 강제로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누군가 지역공동체에 대한 정치적인 충성심과 문화적인 정체성을 동원해 중앙 정부에 대항하려고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지역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적 민족’[1] 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으며, 전통적 사회구조의 해체가 외부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을 민족이 아닌 지역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날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도 근대로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 후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지역이라는 단위와 민족이라는 단위의 갈등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비교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약한 지역성이야말로 한국사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부정적 지역 편견이 호남에 집중되면서 전라도 사람은 ‘잘 속이고’, ‘배신을 잘한다’는 등의 편견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인식처럼 받아들여졌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근대 이후 여러 사회에서 ‘전통’이라고 주장되는 의식과 행태가 대개는 “정치경제적 필요 때문에” 작위적으로 발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석하면서 홉스봄‧레인저(Hobsbawm and Ranger 1983, 2)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들 ‘창조된’ 전통의 특이성은 …… 역사적인 과거와의 연속성이 대체로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 낸 산물로서, 과거의 맥락과 연관된 형태를 창출하거나 혹은 준강제적 반복을 통해 그 자신의 과거를 새로이 확립한다."
한국의 지역주의와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는 전통적 인식 역시 마찬가지의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분명 반호남 지역주의는 그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새로운 것이다. ‘충의지향’(忠義之鄕) ‘고국의 풍토를 가진 지역’ 등과 같이 호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나, 호남을 칭송했던 수많은 내용들은 배제되고,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 중에서 오로지 호남에 대해 부정적 편견만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호남에 대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인식이란 것은 새롭게 ‘불러들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석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호남인이 본래 갖고 있는 특질’을 이유로 호남을 인간적 관계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 편견은 언제, 어떤 사회적 계기에 의해, 누가 불러들였을까?
-지역 편견의 변화 과정
해방 이후 1950년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지역적 고정관념은 비단 호남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깍쟁이’ ‘영남 문둥이’ ‘호남개땅쇠’ ‘함경도 이전투우(泥田鬪牛)’ ‘강원도 감자 바위’ 등은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고정관념 내지 편견들이다. 당시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은 주로 서울에서 나타난 것이었는데, 이는 절대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평생 출생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지역에서 삶을 마감했던 전통 사회에서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지역성의 차이가 부각되고 여기에서 사투리와 지연 관계가 집단적 정체성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근대사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 시기 부정적 편견의 집중적인 대상이 된 것은 서울로의 이주가 많았던 지역민들이었다. 북한 지역으로부터 내려온 이주민과, 그중에서도 하층민을 이루고 있던 함경도 출신이 대표적인 예다. 반대로 서울 토박이의 인색함에 대한 이주민들의 부정적 감정도 컸다.
1955년 6월 6일자 『중앙학보』에 실린 글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이전투우”적 특질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고, “그 자식 함경도 자식인데 더 말해서 뭐해!”라는 편견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같은 해 10월 22일자를 보면 “내가 시골에서 듣기엔 서울 사람들은 아주 인정 있고 얌전하고 궁한 사람을 도울 줄 …… (안다)던데, 웬걸 내가 와서 겪어 보니 인정 있고 얌전은 고사하고 궁한 사람의 입속 것을 내어 먹을랴 하니 어찌된 일인지 어리벙벙하다”라며 서울 토박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타난다(고흥화 1989, 89-92에서 재인용). 1960년 조사된 이진숙(1960)의 연구는 서울 사람에 대해 피응답자의 40% 이상이 ‘인색하다’고 평가했으며, 30% 이상은 ‘간사하다’는 고정관념을 부여했음을 보여 준다. 어떤 자료를 보든 적어도 1960년대 초반까지 호남은 지역과 관련된 부정적 편견이 집약되는 대상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반호남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대표적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은 1961년 당시 강원도 지역의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에서 61%를 득표했으며, 전남과 전북에서도 각각 62%, 54%를 득표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반호남 지역주의를 보여주는 조사 결과가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화와 대규모 인구 이동 과정에서 이주민들 사이에 지역적 정체성을 둘러싼 편견의 교환이 본격화되었지만,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호남 출신을 중심으로 한 배제와 소외의 갈등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의 반호남주의는 1960~70년대의 권위주의 산업화와 그것이 가져온 사회 변화의 맥락에서 부각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권위주의 산업화의 공간적 특성과 지역주의
-지방이 아닌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적 사회 변화가 집중되었던 1960~70년대 경제개발 혜택과 엘리트 충원의 공간적 분배에서 수도권과 영남은 집중적인 혜택을 받았다. 비단 호남만이 아니라 그 밖의 지역 모두가 산업화와 엘리트 충원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첫째는 왜 영남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다. 즉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비해 영남이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에서 압도적인 수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균열의 분획선은 왜 수혜 지역으로서의 영남과 비수혜 지역으로서의 비영남의 갈등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왜 호남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즉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에서 호남과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지 못한 충청권과 강원도 출신 역시 왜 반호남의 편견에 쉽게 반응했는가? 혹은 해방 이후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경쟁적으로 형성되었던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 가운데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만 호명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라디오‧텔레비전‧신문 등 대중매체가 생활 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1970 년대 중반까지 집단 간 상호 의식이 형성되는 소통 구조의 기술적 조건은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압도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로 삼는 지역 혹은 지역성이라는 차이가 만나는 지점은 각 지역 출신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지역과 관련된 편견은 지방이 아니라 중심과 도시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역으로 지방으로 확대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박정희 시기, 지역성의 차이가 교차했던 도시는 급격히 성장하는 산업도시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타난 지역주의는 산업화, 도시화, 계급 분화라는 시간적 축과 지역성이라는 공간적 축이 교직되는 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0~80년 사이, 도시 지역 인구 증가분의 50% 이상은 타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에 의한 것이었다. 도시로의 이주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 체계의 정비에 따른 도시의 인구 흡수 능력이 증대된 것이나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얻고자 하는 기대 등은 대부분, 같은 광역 행정 지역 안의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실현되었다. 따라서 광역지역 내 도시로의 이주는 지역 갈등의 소재가 되기 어려웠다. 반면 산업 부문의 유인에 의한 이주는 달랐다. 1960년대 산업 생산의 중심지였던 서울과 인천의 인구 증가 요인을 보면 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이동이 기여한 정도가 각각 70%와 114%에 이른다. 1970년대에 새로운 산업도시로 등장한 부천, 안양, 울산, 포항의 경우는 각각 83%, 73%, 69%, 69%에 이른다(전광희 1990, 118-119). 이주민만으로도 거의 두 배 가까이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산업도시로의 이주는 두 개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울-경인 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남 지역이었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경우 산업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주로 영남 지역의 농촌퇴출 인구로 채워짐으로써 지역성의 교차 정도는 경인 지역에 비해 훨씬 덜했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에, 출신 지역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주로 경인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경인 지역이 개발되기 이전인 1960년대의 경우, 절대적인 수의 농촌 인구가 유입된 지역은 서울이었다.
-왜 호남에 대한 편견만 호명되었을까
서울로 유입된 지역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호남과 충청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호남권과 충청권의 인구는 주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자나 일용직 혹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저소득층의 출신 지역별 분포에 대한 서울시의 조사를 보면 호남이 28.3%로 가장 많고 그다음 충청이 17.3%, 서울이 14.2%, 뒤이어 영남은 12.5%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김만흠 1991, 72). 1980년을 기준으로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의 인구구성 비율이 30.5 : 16.2 : 11.7인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충청권과 호남권은 자신들의 인구 비중을 넘는 서울로의 하층 이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영남권의 서울로의 하층 이동은 인구 비중을 훨씬 못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의 경우 농촌 퇴출 인구의 대부분은 영남 지역의 산업 도시에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 출신의 상당 부분은 대학 진학, 관료 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의 이주였기 때문이다.
당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 부문 종사자, 대다수 실업 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은 출신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 출신이 다수를 점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고용자나 피수혜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도시에서의 정착과 고용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비호남 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또한 세입자와 피고용인의 위치에 설 확률이 가장 높은 호남 출신이 집주인이나 고용주와 갈등 관계를 갖게 될 때, 호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쉽게 부과될 수 있었다.
-하층 이주민 사이의 경쟁
산업화의 초기 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사회 하층 내부의 갈등이 좀 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정착과 고용을 둘러싼 경쟁은 거의 생존의 문제에 가까울 만큼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김진국(1984)의 조사에서 나타나듯이, 호남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은 하층계급의 최다수를 차지하는 호남 출신과, 규모면에서 그 뒤를 잇는 충청 출신 이주민, 그리고 서울의 토박이 하층민 사이의 경쟁 관계에서 비롯된 바 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된 반호남주의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는 것이었을까? 객관적인 증거를 들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이 집중되었던 서울에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점차적으로 편견과 기피 의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현실성이 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이북 출신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거나 점차 약해졌을 것이라는 것도 합리적인 가정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까지 반호남 편견과 기피 의식이 집단적 갈등이나 정치 경쟁을 자극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반호남주의가 집단적 갈등과 정치적 경쟁의 소재로 불러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1971년 대선은 이를 살펴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 반호남주의의 정치적 호명과 조직화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어땠을까?
4. 지역주의의 정치적 동원과 편견의 조직화
-박정희 정권, 영호남을 지지 기반으로 출발
지역주의가 위로부터 조직되고 동원되었다는 증거를 확인하기에 가장 용이한 사례는 선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제도화된 정치 참여가 제한되어 있던 권위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이 단기간 내에 가장 폭발적으로 동원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 반호남 지역주의가 최초로 동원된 사례는 1971년 대통령 선거였지만, 그 이전 1960년대에도 지역성이 동원된 선거가 있었다. 1960년대 선거에 동원된 지역성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이었다. 영남의 지역성이 정치적으로 동원된 이유는 박정희 후보가 영남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영남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상회하는 최대 인구였기 때문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영남 이외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 등 개혁주의를 강조한 반면, 영남에서는 연고 의식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이 전략은 효과적이어서 서울과 경기, 충청에서는 40% 초반의 지지율로 고전한 반면 경북 61%, 경남 67%, 전북 54%, 전남 62%의 높은 지지를 집중시킴으로써 당선될 수 있었다.
더 전형적인 사례는 1967년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여당은 전체적으로 경제 발전의 성과를 부각시키면서도 영남 지역의 선거 유세에서는 여전히 지역성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선거에서는 영호남의 개발 격차에 불만을 갖기 시작한 호남을 제외하고 전국 모든 지역에서 지지율의 상승과 함께 경북과 경남에서는 71%와 75%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영남 지역의 유권자가 박정희를 지지한 것은 산업화의 혜택이 이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63년의 시점에서 경남의 일인당 지역 주민 소득(GRP)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경북 역시 전북에 비해 13%가 낮았다. 그러나 1963년 이후 영남의 경제 수준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1970년의 시점에서 영남은 충청과 호남을 크게 앞질렀으며 경기 지역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영남 유권자가 박정희를 지지했던 것은 산업화의 혜택을 대가로 권위주의를 감수하는 일종의 정치적 교환(political exchange)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의 위기와 지역주의
그렇다면 왜 그 이전 선거와는 달리 1971년 선거에서는 반호남주의를 동원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일 것이다. 첫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60년대를 거치면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의 경쟁 후보가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실은 1960년대 박정희의 경쟁 후보가 충남 출신의 윤보선이었으며, 충남의 경우 지역 편견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과는 대비되는 변화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반호남 지역주의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있어 일종의 필요조건이었을 뿐, 인과관계를 연결해 주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야당 후보가 충청 출신에서 호남 출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야당 후보의 도전과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이 선거 과정을 압도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첫째 1970년을 전후로 해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본격화되었고, 산업화의 비용을 감수했던 사회집단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69년 3선 개헌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재야라고 불리는 사회 세력이 등장한 것도, 학생운동이 반독재의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 시기다. 또한 ‘전태일 분신 사건’ ‘광주 대단지 사건’ 등 산업화가 만들어 낸 하층계급의 저항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다. 둘째 김대중 후보가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제도와 기구, 불균등한 분배 구조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중앙정보부의 수사 기능을 축소시키고 국회의 심의 대상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으며, 1968년 창설된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적대적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4대국 보장안’을 제시했고 ‘대중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운영 원리를 주창하면서 ‘부유세 도입’을 공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간을 공격하고 나섰을 때 그의 대중적 영향력은 폭발적이었다. 4월 18일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유세에 수십만의 군중이 모인 것은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야당 스스로도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권위주의 정권이 갖는 위기감을 보여 주는 증거는 많다. 예컨대 당시 집권당이 사용한 선거 자금이 1971년 국가예산(5천2백억 원)의 10%를 상회하는 6백억 원에 달했다거나,[2] 선거 유세 종반에 박정희 후보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호소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위 관리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충식(1992, 315-318)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호소는 김대중 후보의 상승세가 예상외로 강력하고 이에 따라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감지한 중앙정보부의 ‘작품’으로 설명한다. 중앙정보부는 이 과정에서 공화당의 지도부를 설득하고,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막역한 관계를 갖는 인사를 내세워 박정희를 설득했다고 한다. 선거 이듬해인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은 이런 상황과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
그렇다면 이런 위기 상황에 직면해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 지역주의의 의미 구조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선거 국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 지역주의는 당연히 김대중이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접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호남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이자, 반호남주의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반호남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 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이 ‘호남 대통령’이었다면, 반공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 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은 ‘사상이 의심스런 자’라는 언술이었다. 박정희 후보 측이 제기한 “이런 사람이 호남 대통령은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동아일보』1971년 4월 23일)라는 주장과, 예비군제 폐지를 둘러싼 ‘안보 논쟁’에서 그를 ‘이적 행위자’ 로 몰아 부친 것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이례적으로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의 남침을 촉진 유도하는 이적 행위다”라는 내용의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전라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반호남주의의 정치 동원이 효과를 갖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 확산되었던 ‘간사하고 앞뒤가 달라 배신을 잘하는 호남 사람’이라는 지역 편견은 개인들 간의 사적인 관계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었을 뿐 집단적인 갈등이나 정치 경쟁의 분획선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반공주의를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만 커졌다. 이런 이유로 1971년 선거에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호남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호남 사람들
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는 주장이나(『중앙일보』1971년 4월 22일),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내용의 전단이 영남지역에 뿌려진 것(김상웅 1992, 340)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똘똘 뭉친 호남’이라는 고정관념을 조직화한 것은 반사적으로 다른 지역민의 반호남주의를 결집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는 박정희의 영남 지역 유세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영남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거나 “쌀밥에 뉘가 섞이듯 영남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영남 사람 쳐놓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 라는 주장(『조선일보』1971년 4월 18일), 그리고 “우리 지역이 단합하여 몰표를 몰아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 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 낼 수 없다”는 주장(이상우 1993, 355) 등은, ‘호남이 똘똘 뭉쳐 호남 대통령을 만들려고 하는데’라는 의미 구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었다.
-지역주의 정치 동원의 제한적 효과
그렇다면 이 시기,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에 당시 사회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반응했을까?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첫째는 당시 권위주의 지지 세력의 구성원들은 반호남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상층계급이나 급격한 산업화의 수혜 집단 그리고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특혜를 얻은 이들 지지 세력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권위주의 체제의 위기와 불안은 곧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위기와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반호남주의의 동원에 반응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반호남주의의 자발적인 조직자, 적극적인 동원자 역할을 했다. 둘째,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이 동원한 반호남주의에 대해 일반 대중이 보인 반응은 그다지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을 호남 대통령으로 상징화하려 했지만 이보다는 권위주의 정권에 투쟁적인 야당 후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영남과 그 출신이 경제개발과 인사 충원에서 독점적 수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도 강했다. 김대중은 지역개발의 불균형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라고 공격했고, “내가 당선되면 나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호남 사람이라서 못 찍어 주겠다고 생각하면 안 찍어도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3]
‘똘똘 뭉친 호남인’이라는 조작된 이미지를 이용해 비호남 유권자의 반호남주의를 자극하고자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호남의 집단적이고 강렬한 움직임은 없었다. 따라서 김대중을 ‘호남 대통령’으로 호명했던 것이 야당지지 성향을 가진 도시의 유권자들을 김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했고, ‘똘똘 뭉친 호남’에 대한 반사적 반호남주의가 영향력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1971년 선거가 반호남 지역주의에 의해 압도되었다면 적어도 영남 지역의 경우 그 이전의 대통령 선거보다 박정희 지지가 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는 달리 박정희의 득표는 경남에서 오히려 줄었으며 부산에서는 매우 많이 줄어들었다. 영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의 득표 결과만 보면 야성이 강한 도시지역, 특히 서울에서의 지지에 힘입어 김대중이 1만7천여 표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국한해 본다면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는 대체로 위로부터의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박정희 정권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조직된 반공주의와 반호남주의의 접합은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성 권위주의의 등장과 지역주의
1971년 선거에서 가까스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정치 경쟁을 극도로 제한시켰다. 그러나 잠재적 경쟁자이자 반독재 투쟁을 자극하는 김대중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1971년 선거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과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반김대중과 반호남의 이미지와 편견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정권은 김대중에 대해 좌경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사적인 생활 세계에서 반호남, 반김대중의 이미지와 편견의 조직자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었다. 1971년 선거를 전후해 이들이 경험한 반독재 투쟁과 하층계급의 저항에 대한 불안감은 반김대중 혹은 반호남과 직접적인 의미 연관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하에서 반호남주의가 ‘지배’와 ‘통치’를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1980년 광주항쟁 시기에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1979년)에 일어났고 반독재 민주화의 열망이 표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사례였던 부마항쟁과는 달리, 유독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호남의 지역 정서를 불러들여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외부 세력’과 ‘과격 세력’, ‘폭도’가 주도했고 소외 의식과 ‘한’을 가진 지역민이 이에 동조했다고 설명했으며, 주류 언론은 이에 맞춰 기사를 작성했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접합은 하나의 공식처럼 이루어졌다.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데 기인한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4] 나 4백 대 가까이 파손된 차량 가운데 유독 경상도 번호판을 단 두 대만을 부각시키는 등 이미지 조작을 통해 지역감정을 동원하려 했던 관제 언론의 보도 태도는 대표적이다(이남재 1993, 47). 이런 해석이 작위적으로 동원되었을 때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치환하려는 이들의 해석이 큰 효과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광주에서의 비극을 통해 집권했던 5공화국 정부는 반호남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추구했지만 반권위주의 저항 연합의 전국적 확대를 막지는 못했다. 지역주의가 사회적 갈등의 분획선이나, 정치 갈등의 분획선으로 표출된 사례도 없었다. 반호남주의가 권위주의 정권이나 그 지지 세력에 의해 광범하게 조직화되고 동원되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이 계속 시도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배의 욕구를 공유하는 집단 사이의 문제였을 뿐, 사회 대다수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정도의 효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후,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행기에서는 어떠했을까? 이 문제는 3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5. 2차적 균열로서의 한국 지역주의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지역주의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정희 정권 시기 권위주의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형성에서 인격적 특질 운운하는 편견에 기초해 호남 출신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이런 반호남 지역주의는 급격한 ‘근대화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전근대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중첩되었던 급격한 도시화와 계급 분화, 그리고 영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재생산하고자 했던 권위주의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근대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균열을 반영하는 호남에 대한 편견은 ‘발견’되었고, ‘동원’되었으며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창조’되었다.
반호남 지역주의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2차적 균열’혹은 냉전 반공주의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 산업화가 만들어 낸 ‘파생적 균열’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언어‧종교‧인종‧문화‧전통‧역사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지역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지역주의이다. 이들 나라의 경우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 역사적 기원을 갖는 원형적 지역성(proto-regionalities)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다른 지역 집단과 객관적으로 구분되는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그 표출 형태는 정치적 충성심을 지역공동체로 회귀시키고자 하는 지방적(local)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정치적 동원 역시 분리나 자치를 지향하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동질적인 언어‧인종‧혈연적 기초 위에서 일찍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확립된 한국의 경우 원형적 지역성은 매우 미약했다. 적어도 고려 시대 이후에는 분권화된 통치 공간을 갖춘 어떤 지역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지역 갈등이 불거졌다 해도 그것이 원형적 지역성이나 지역공동체의 존재 때문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러한 분획선이 호남과 비호남 사이에 그어질 객관적‧논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호남 출신을 기피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호남민의 타고난 인격적 특질’이란 편견이자 허위의식이며,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역성이 아니라 권위주의가 기원
또한 호남의 지역성이 반호남 지역주의의 형성에 있어 전제적 조건이거나 필수적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소외 의식에 기반을 둔 호남의 지역주의 역시 호남이 갖는 지역성의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호남의 소외 의식에 앞서 반호남 의식이 먼저 형성되었고, 이런 반호남 의식이 지배와 통치의 계기와 결합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호남의 지역주의가 비호남의 반호남주의와 같은 차원으로 대비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비지역적 차원에서 파생된 균열로 보는 것은 지역주의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도 의미를 갖는다.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지역주의 이슈의 초점은 계속해서 변해 왔다. 예컨대 영남 지역의 투표 행태는 끊임없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분할과 통합을 반복해 왔을 뿐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한 정당의 득표 독점성도 끊임없이 유동해 왔다. 지난 2000년 선거 이후 충청권은 대체로 3당 체제에 가까운 결과를 보였다. 호남권 역시 2004년 총선 이후, 특히 2006년 지방선거에서 양당 체제적 경향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변화는 2004년 총선에서 호남 지역의 선거 시장을 독점했던 열린우리당이 그 이후 지배력을 상실한 사례일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갖는 2차적인 균열의 성격을 이해하지 않는 한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지역주의의 정치적 표현은 권력관계적 계기가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2차적 균열로 정의하는 것은 규범적 차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지역주의라는 틀 속에서 해석하고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지역주의로 용해시키는 접근이 왜 잘못인가를 효과적으로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역주의 문제를 파생시킨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몹쓸 지역주의를 없애겠다고 흥분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석
[1] ‘역사적 민족’(historical nation)의 개념에 대해서는 E. J. Hobsbawm(1990) 참조.
[2] 김종필의 증언에 따른 액수인데 강창성은 이보다 많은 7백억 원이었다고 주장했다(김충식 1992, 295).
[3] 각각은『조선일보』(1971년 4월 3일 3월 28일 4월 9일) 참조.
[4] 계엄사령부, “담화문,” 1980년 5월 21일.
박상훈,『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p. 34-59
-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전라도는 왕조의 기반이 된다하여 풍패지향이라 불렸습니다.
수많은 국란에서 국난극복의 본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훈요십조8항은 인문적 소양이 부족한 일제 이니마시와 이병도가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훈요십조(訓要十條) 제8항의 차현이남 (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 위치
http://blog.chosun.com/casy/3220308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장흥)任, 시조 임호),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전주김(全州金, 시조 完山君 김태서)"
위의 15개 본관들을 보면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정안임,전주김),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다.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중에서 전라도가 충청도/경상도보다 많다.
그림1. 조선중기 전국지도인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에 표시된 차현고개 위치.(음성군 차현고개 주변에는 수레의산(車依山,679m),수레울,車谷,車坪,車坪川 등 車관련 지명이 많다)
그림3. 차현고개 주변에 있는 화봉육교
이익이 26세때에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친 둘째형 이잠이 역적혐의로 장살되었고 종친인
이중환도 역적 가담혐의로 벼슬이 막히고 고초를 겪게되지요.
불우한 남인 집안인 이익이나 그의 제자, 종친들이 조선왕조에 반감을 가지면서
조선왕조 본향인 전라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겁니다.
전라도 산세에 대해 이익이 풍수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도선과 다른 의견을 개진한
것은 오늘날 폴리페서들이 자기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논조를 보인
것과 같습니다
훈요십조에 왕실은 반역지역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고려초인 왕건,현종에 이어 고려 중기이후에도 전라도가 권력의 핵심으로 고려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
http://blog.naver.com/jh753320/110015578799
http://travel.jangheung.go.kr/contents/people/contentsList.jsp?categoryCd=12
전남의 장흥임씨와 전북의 전주김씨는 고려왕실이 고려후기까지 전라도에서 출생한 여자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경기도빼고 전라도는 고려의 개국과 존립에 가장 깊이 관여한 지역이 되었는데 전라도만큼의 권세도 없었고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도 없었던 지역에서 전라도가 차별받았다고 말할수 있을까!!
또한 전라도 송광사는 고려시대 최상류 지배층들인 승려를 대표하는 국사를 16명이나 배출했다. 국사의 영향력은 때로는 왕을 능가했다.
통합의 한을 품기는 궁예가 온갖 역경을 딪고서 나라를 건국하여 20여년이 지나 어느정도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는데, 왕건이 몇몇 측근들과 공모하여 하루 아침에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긴 궁예와 추종세력이 제일 클 것이다. 그래서 궁예의 추종세력들은 1980년 12.12 전두환 반란을 진압하고자 의분에 찬 군인들이 궐기했던 것처럼 청주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이 자기에게 반항한 군인들을 모두 옷을 벗기거나 죽여버린 것처럼 왕건은 자기와 가까이 있는 궁예 추종세력이 제일 두려웠을 것이다.
두번째의 통합의 한을 품은 세력은 9백년 사직을 잃어버린 신라의 유신들과 백성들일 것이다. 신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귀순을 거부한 것이나 신라의 유신 김사미/효심이 신라회복을 기치로 수년간에 걸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그렇다. 후백제는 견훤이 왕건을 도와서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했으므로 궁예의 태봉이나 신라보다 반란이 덜 했다
역사 | 2008/09/05 18:00
http://gamchoyung.tistory.com/entry/훈요십조
호남을 차별하고 자신들의 호남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 근거로 드는 것이 훈요십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전했다는 훈요십조에는 "호남이 배역의 땅이니 이곳의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호남은 고려시대부터 차별받아온 것이므로, 현대사에서 비극적으로 일어난 호남차별 역시 역사적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 의도적으로 조작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호남차별의 원인이 호남차별을 조장해온 가해자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도록 차별을 받아온 호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결국 차별의 책임마저도 호남에 전가하게 되는 '피해자 탓하기'식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호남 = 배역의 땅'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과연 올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해석을 전제로 삼아 파생된 결론 또한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부터 호남차별의 역사적 근거가 되어 왔던 훈요십조에 대해 그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가리킨다?
아래는 호남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는 훈요십조 제8조에 나오는 문제의 구절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고려사절요』(1), 민족문화추진회,1968. pp.470-471)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근대에 들어와 훈요십조를 처음 해석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 龍)라는 일인사학자였다. 이마니시는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이라는 문구를 호남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정설처럼 굳어져 호남이 배역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처구니없게도 명백한 오역이었다.
이마니시 류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1) 첫째, '차현(車峴)'을 지금의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해석한 점이다.
차령산맥은 지금까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북방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뻗은 산맥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2005년에 실시한 국토연구원의 조사 결과 차령산맥은 실존하지 않는 산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달달 암기해 왔던 그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국토연구원의 설명에 의하면, "차령산맥뿐 아니라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노령 등 여러 산맥도 구릉(언덕) 상태인 것으로 드러나 실제 산맥으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차령산맥을 포함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산맥체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제시대 '고토분지'라는 일인 지질학자였는데, 1903년에 일꾼 6명과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그것도 단 14개월 동안 답사하는 것으로 산맥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먹구구 방식으로 측정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산맥체계였던 셈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령산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따라서, 1903년에 실수로 '만들어진' 차령산맥이 900년 무렵을 살던 왕건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왕건이 말했다는 '차현이남(車峴以南)'의 차현은 차령산맥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다는 뜻이다.
2) 둘째,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 남쪽으로 해석한 점이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로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인데, 대체로 차령산맥(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곳)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이 점에 착안하여 공주강 외(外)라는 표현을 금강 남쪽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마니시의 해석에 대해 설성경은 "'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고 반박했다.
또 'OO以南 OOO外'라는 한문 표현은 '~에서 ~까지'라고 하는 지역적 범위를 설정하는 문구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어 공주강 북쪽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공주강외를 단순히 금강 남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이마니시의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시대 호남사람은 차별 받았나?
1) 호남세력은 배역이 아닌, 왕건의 친위 세력이었다.
왕건은 모두 알다시피 궁예를 왕으로 모신 후고구려의 신하였다. 왕건이 궁예 아래에서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나주정벌이었는데, 이때 왕건은 나주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아내로 맞이하는 등 나주호족들과 굳건한 결속을 맺게 된다. 이후 나주세력은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세력과 함께 왕건을 후원하는 친위세력이 되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2) 오히려 왕건은 호남사람을 중용하였다.
신복룡은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 살아서는 상주국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또한 광주지방에 근거를 둔 호남 호족 세력이기도 했다)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3) 고려 전반에 걸쳐 호남출신이 공직에서 배제된 적이 없다.
설성경은 태조 사후 즉, 훈요십조의 유훈이 전해진 직후였던 4대 광종부터 8대 헌정 때까지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두 번이나 역임했던 전북 전주 출신의 유방헌을 예로 들며 "태조 사후 후대에도 후백제인이 관직임용에 제한받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4) 왕건은 분열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자였다.
왕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보더라도, 그는 통합을 강조한 통합주의자였지 분열을 획책하여 왕권을 도모하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자신의 라이벌이였던 견훤이 투항해 오자 백관 최상위의 벼슬을 내리며 크게 환대하였다. 그리고 공신과 호족은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들과의 혼약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왕건은 거란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호족들의 단결을 이끌어내었다.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분열시키고 차별하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시도되는 4대 광종 이전까지 고려 왕권은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는데, 굳이 호남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설정하여 호남 호족들의 반감을 자초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3. 풍수지리적으로 호남은 배역의 땅인가?
조선후기 유학자 성호 이익은 금강을 "반궁수"라 일컬으며 금강 유역 일대를 배역의 형으로 보았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익의 주장에 대해 설성경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된 성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었던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해 독설에 가득 찬 이익의 지방 편견을 보아도 그의 풍수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신복룡은 "호남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라면서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2) 도선의 비보(裨補)사상이 태동한 호남은 배역지가 될 수 없다.
선각국사 도선은 신라말 풍수대가였다. 그는 '비보(裨補)사상'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비보사상이란 땅이 커 명당이 찾기 쉬운 중국과는 달리 국토가 좁아 명당이 부족한 한반도에서는 승탑과 사찰을 세워 지덕(地德)의 운기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명당을 만들 수 있다는 도선의 개성적인 풍수 사상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전라도에 머물면서 인근에 미우사, 도선사, 운암사, 삼국사를 창건하고 많은 비를 건립했다. 따라서, 호남지역이 설령 배역지라고 하더라도 도선의 의해 명당지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선은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해주어 후삼국의 통일비법을 전수해주었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배역의 땅을 내버려 두어 왕건의 통일을 방해했을 리 없다.
물론, 왕건과 도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신라말 명망이 높았던 도선의 이름을 왕건 측에서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고승이었던 도선을 왕건과 연결시킨 인물 역시 최지몽이라는 호남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전라도에 불리한 풍수지리사상은 후대에 와서 왜곡되었을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풍수지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귀신 씨나락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맹신하고 호남차별의 근거로 삼는 부류가 꽤 있기에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차원에서 논해 보았다.
4. 호남이 아니라면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어디를 가리킬까?
1) 왕건의 아킬레스건은 궁예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온후한 왕이었지만 궁예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왕건으로서는 궁예 세력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궁예 세력의 존재는 곧 왕건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건에게 궁예라는 존재는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그리고 지워져야할 역사의 어두운 과거였던 것이다. 500년 뒤에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모조리 배에 태워 수장시키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정통성은 왕권의 명분이자 생명이었다.
2)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친궁예 지역를 가리킨다.
설성경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유력한 장소로 친궁예 세력이 밀집해 있던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주·홍성 지역의 반란 사건은 왕건이 즉위한 지 5일 만에 일어났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 · · · ·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 · · ·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 · · 청주 지역 출신 호족세력의 반역사건도 들여다보자. · · · ·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 · ·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3) 친궁예세력에 대한 가혹한 응징
설성경은 연이은 반란이 왕건에게 '생애 최대의 시련'을 주었다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목천현의 경우를 보면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목천 사람이 자주 배반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우(牛)·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내렸다"며 이 지역에 대한 왕건의 실제적 응징이 뒤따른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4) '차현이남'의 차현은 차현(車峴)고개? 차령 고개?
한편, 차령산맥으로 오역되어 문제가 되었던 차현이남의 '차현'이 실제 어디인가 하는 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 부근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는 설이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청주를 온전히 포함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차유령 고개라고도 불리는 차령 지역이다. 공주에 가까워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공주 근처의 유역이 설정된다.
5)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의 차별은 없었다.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반란지역 주민들은 항상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태조가 생각한 배역의 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성경의 말에 따르면 "태조는 홍성인 홍규의 딸을 12번째 부인, 즉 흥복원부인으로 삼았고 홍규를 삼중대광에 추증하였다. 또 견훤의 부하로 태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홍성의 성주 긍준은 중용되어 대상이란 관직의 등급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손자인 현종은 거란 침입 때 공주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왕후로 맞아들였으며, 후에 그녀의 동생 둘도 왕후인 원혜·원평으로 맞아들였다. 태조에 의해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목천 사람들은 문종 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복귀되었다."
5. 가해자의 알리바이
결과에 맞추어 원인을 찾으려는 결과론적 분석을 하게 보면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게 된다. 훈요십조를 근거로 호남차별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다. 역사적으로 호남이 차별받아왔다는 결론부터 짓고, 그에 걸맞는 자료들만 모아서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에 영남 지역이 차별받았다면 영조시절의 영남 차별을 근거로 삼을 건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미처 이런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호남차별을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호남차별의 원인을 과거로 떠넘겨야 호남차별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해자격의 지역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쉽게 빠진다. 훈요십조의 호남차별이 가해자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못 뗀 빨갱이 딱지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12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기득권층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195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이상적인 정치 세계 유토피아(Utopia)를 꿈꾼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자 정치인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수장령을 거부하다 처형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에 “세례명을 주신 신부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토머스 모어만큼이나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인동초(忍冬草)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특히 ‘김대중 죽이기’는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세력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사회 기득권일수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 최 아무개씨는 “김대중을 잡거나 최소한 괴롭히기만 해도 출세를 보장받았다. 제도권에 있는 사람일수록 반김대중 논리를 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 1970~ 1980년대 대부분을 범법자로 보내며 사형선고까지 받은 DJ를 금기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권총을 들고 김 전 대통령을 체포했고, 이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했다.
살해 위협, 감옥 그리고 망명
‘김대중 죽이기’가 본격 시작된 것은 1971년 대선에서 DJ 바람이 일면서부터다. 1971년 4월 대선은 DJ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비롯한 국가와의 싸움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공약을 발표하는 날마다 간첩 사건이 터졌다. 1971년 3월24일 경북에서 간첩 체포. 4월9일 거물간첩 체포. 선거 나흘 전 중앙정보부는 “김대중 후보의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의 공약을 북한이 지지했다”라고 발표했다.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 남침 촉진을 유도하는 이적행위다”라고 말했다.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했다. 하지만 차세대 지도자라는 DJ의 후광은 영남 패권주의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은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증언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박 정권을 실제적인 위협으로 몰아넣었던 김대중은 체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국가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1971~1987년은 DJ 인생의 암흑기였다. DJ를 제거하려는 공작이 이어졌다. 6년간 투옥됐고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다. 첫 고비는 1971년 5월에 당한 교통사고였다. 전남 목포에서 총선 지원유세를 마친 DJ의 자동차는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14t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처박혔다. 이 사고로 DJ는 골반을 크게 다쳐 지팡이를 들어야 했다. 사고 트럭이 공화당 의원 소유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위기는 계속됐다. 1973년 8월 DJ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 요원들은 DJ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북공작선 용금호에 태워 대한해협에서 수장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DJ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서거 직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김 전 대통령이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소설의 한 페이지에 나올 법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라고 보도했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납치 사건 이후 DJ는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가택연금과 징역살이를 번갈아 해야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DJ에게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 DJ에게 총을 겨누었다. 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DJ의 지령에서 시작됐다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DJ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구명운동을 벌여 DJ는 목숨을 건지고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81년 1월25일 당시 ‘김대중 사건의 청산’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김대중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의 감형 조처로 일단 원만한 끝막음을 보게 되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감형 조처가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통치체와 그 지도자의 폭넓은 금도와 포용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 뉘우치는 자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다스림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경지인 것이다.” 이 사설은 <조선일보 명사설집>에 실려 있다.
1985년 귀국해 민주화의 봄을 이끌었지만 DJ는 군사정권과 패권 세력이 쳐놓은 덫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DJ는 자신의 책 <평화로 가는 길>에서 “박정희씨가 유신을 원치 않으면 통일을 원치 않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라고 썼다. DJ가 독재에 항거하거나 통일을 외치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언론은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색깔론을 덧칠하기에 바빴다.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정일이 보낸 선거자금이 김대중 후보에게 전달됐다”라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며, 김일성의 육성 녹음이 비밀 보고서에 담겨 있다는 내용의 김대중 X파일도 이어 나왔다. 여기에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선거 때면 언론은 DJ와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
DJ에 대한 색깔론은 그 뿌리가 깊고 넓다. DJ는 측근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즐겨 사용하던 ‘동지’ ‘대중’ ‘민중’이라는 단어조차 북한을 추종하는 증거가 됐다. 그가 주장한 공화국연방제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과 비슷하며, DJ가 세운 아태재단은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나중에 그런 용어를 그대로 쓸 줄 귀신이 아닌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용어만 가지고 용공이라고 뒤집어씌운 것은 정말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1996년 12월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윈(WIN)>은 ‘5공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언론공작 전모’를 보도했다. 1980년 7월20일 배포된 이 홍보 문건은 DJ를 ‘북괴와 통하는 공산주의자이며 폭력주의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김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못한 16년 동안 군인과 대한민국의 공무원을 총동원해서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교육했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집사람도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1949년 남로당에 가입하고 반란을 꾸민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대비된다.
DJ라면 무조건 색안경
빨갱이라는 굴레만큼이나 DJ를 괴롭힌 것은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팠다는 비난이다. 1990년 11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DJ는 “박정희씨의 최대의 죄악, 영원히 역사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죄악은 이 지방색의 조성이다”라고 말했다. DJ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측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에 발목 잡혀 대권을 놓쳤다. DJ는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호남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어 다시 일어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보수 언론은 3김이 지역을 볼모로 토호정치를 한다는 비판에만 천착한다.
1987년 대선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비난의 화살은 DJ에게 쏟아졌다. DJ가 YS를 지지했다면 지역감정 구도를 넘어섰을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에 두고 있다. 비단 수구 기득권만의 비난이 아니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신의 책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전라도 혐오증’ 또는 패권적·반사적 ‘지역주의’는 ‘반김대중 정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DJ는 “당시 여론은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나에게만 돌렸다”라고 괴로워했다.
호남의 정서는 지역적 패권적 지역주의가 아니라 저항에 가까웠다. 특정 지역에서 20년 넘게 한 사람에게 90% 넘는 몰표를 던졌다는 것은 지역정치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한화갑 전 대표는 “표가 적은 지역은 지역주의를 조장해서 대결하면 무조건 불리하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DJ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가”라고 말했다.
DJ에 대한 가장 흔한 비방 중 하나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위해 18년간 독재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12년간 독재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이러한 비난은 없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DJ를 반대만을 일삼는 과격한 사람으로 묘사한 측면도 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영국의 BBC 방송은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위험한 급진주의자로 통했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1991년 6월23일 ‘김대중 총재의 거취’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의 정치는 반대와 공격, 타협과 술수로 대변된다. 그는 반대와 강성을 선명의 지름길로 삼아왔다”라고 적었다. 조선일보가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이 과격하다고 지적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에 항거한 것을 두고 반대와 강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거 직전까지 김 전 대통령이 부르짖은 것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였다. 이를 가로막는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한동안 거두었던 DJ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김대중씨’라고 호칭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을 지지하는 모임인 ‘전사모’는 “김대중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자살을 하라”는 성명을 냈다.
DJ 죽이기에 나선 것은 역시 보수 언론이었다. 지난 7월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노정치인으로서는 타락한 모습이었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금도를 넘어선 일탈이었다”라고 썼다. 김 고문은 DJ에 대한 인신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DJ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때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추종자들을 용도가 폐기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
동아일보는 “민중을 선동하는 것은 민주화 역사를 역류하는 죄짓기임을 DJ는 깨달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사경을 헤매는 김 전 대통령에게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남긴 국가적 갈등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비자금 문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문 대기자가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 기사는 법원과 검찰에서 근거 없다고 결론이 난 내용들이었다.
권위주의 세력이 지역주의를 창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005019
[한겨레] 김대중, 71년 대선 부산에서 43% 득표
박정희, 63년 대선 전남에서 62% 득표
유신뒤 일부 정당·언론, 민주화 요구에 위기감
개혁세력 없애려 지역주의 망국론 유포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박상훈 지음/후마니타스·1만5000원
다음과 같은 주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대다수 한국 유권자는 지역주의(지역감정·지역정서 등)에 이끌려 투표한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지역당을 만들었고 선거만 하면 지역분할구도가 드러난다. 지역주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옛날부터 존재했다. 지역주의의 핵심은 영호남 갈등이다. 이 두 지역 갈등이 사회 전체를 지역주의로 물들였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치 발전이 안 된다. 민주화됐는데도 정당체제가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에 따라 재편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지역주의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고질병이다. 그러니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
‘한국은 왜 민주화를 기점으로 지역이 중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 구조를 갖게 됐을까?’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만들어진 현실>에서 위의 주장 모두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허구이며, 책 제목이 암시하듯 설사 그게 ‘현실’로 일부 존재한다 하더라도 본디부터 그런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얘기한다. 지역주의가 망국적인 고질병인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가 망국적인 고질병이다’라고 외쳐대는 것이야말로 망국적인 고질병이라고 박 대표는 주장한다. 왜, 무엇 때문에? 그래야 자신들만의 특권적 이익을 키우고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지역주의는 풍토병이 아니라 그런 자들이 합성해서 퍼뜨린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이다.
여러분 자신은 정말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따져볼 것도 없이 무조건 ‘우리 지역’ 출신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묻지마 투표’를 하는가?
박정희-김대중이 맞섰던 1971년 대통령선거가 영호남간 지역주의 선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기억의 정치’, ‘편견의 동원’, ‘전통의 발명’에 따른 산물이다.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던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 부산에서 42.6%를 득표했다. 이는 그전 대선 때의 윤보선이 얻은 것보다 11%포인트나 더 많았고 대구에서도 8.8%포인트 더 많았다. 박정희도 1963년 대선 때 서울과 경기, 충청에서는 40%대 초반 지지율로 고전했으나 전남·북에선 각각 62%, 54%의 득표율을 올렸다.
1977년 조사(김진국)에 따르면,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이 아니라 서울과 충청 출신이었다. 반면 호남 출신자가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 출신이었고 호남에 대한 기피증이 가장 덜한 쪽이 영남인들이었다. 이는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불균등 개발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업화가 수도권과 영남 축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영남의 하층 이주자들은 부산·울산 등 같은 영남권 내 개발지역으로 이동했으나 호남과 충청 지역민들은 대부분 서울 쪽으로 몰렸다. 영남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학력자나 관료 등 엘리트 중산층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몰리는 도시권, 그중에서도 수도권에서 하층민들간 생존경쟁이 격심했고 호남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싹이 거기서 자랐다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개발독재의 성장정책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에 이런 불균등한 성장과 차별적인 엘리트·인력 충원에 따른 지역간 편견과 불만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지역주의로 ‘발굴’하고 증폭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특정 정치세력이었다.
이미 1971년 대선 때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눈물로 애소해야 할 정도로 권력상실 위기에 처했다. 영호남을 빼고 계산하면 김대중 지지표가 더 많았고 유독 전남에서만 10만표 이상이 무효 처리되는 부정행위 등을 통해 박정희는 간신히 이겼다.(96만표 차)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기능 축소와 국회심의제, 향토예비군제 폐지, 적대적 남북관계 개선과 4대국 보장안, 대중경제, 부유세 도입 등 권위주의체제와 불균등 개발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대중들은 사실상 그의 팔을 들어준 셈이었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제도화한 ‘유신헌법’이 공포된 것은 바로 그다음 해였고 그때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지역감정, 지역주의가 대대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를 앞세운 권위주의 기득권세력은 이에 저항한 민주화세력의 도전을 지역주의 문제로 치환하고 그것을 극도로 부풀림으로써 진실을 호도하고 정치적 곤경을 피해가려 했다. 거기에는 반유신 민주화 정치세력 리더가 호남 출신이라는 점과 호남인들의 소외의식(선행한 차별로 말미암은 소외의식과 거기에 대한 반발 내지 저항은 합리적 선택이며, 그것을 지역주의로 몰아가는 건 본말전도다)도 작용했다.
지역주의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고 1980년, 1987년, 그리고 지금까지 기존 권위주의체제가 흔들리는 고비 때마다 더 한층 증폭됐다. 이른바 ‘3김’(3K)으로 대표됐던 지역주의가 ‘망국적’ 차원으로까지 부각되고 전면화한 것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제도적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의 일이며, 그것은 민주화로 기득권 상실 위기에 처한 개발독재체제와 한 배를 탄 동조세력이 느낀 공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3김정치와 지역주의, 지역감정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다며 지역감정과 3김의 청산을 그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민주화와 권위주의 독재청산 문제를 지역주의 문제로 바꿔치기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 거기에 앞장선 것이 정당(우파 집권당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개혁과 극좌세력까지 포함해)과 언론이었으며, 언론 중에선 <조선일보>였고 또 그 전면에 나선 이가 전 주필 김대중씨였다. 그들이 망국병을 타파할 대안이라며 밀어올린 게 바로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줄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이었다. 그들 기득권세력의 ‘3김과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언설은 기실 ‘민주화를 그대로 두면 우리가 망한다’는 얘기였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은 지역주의를 발굴하고 창조하고 부추기며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지역주의야말로 그런 위장극을 숨겨준 알리바이 담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정당체제’는 지역주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문제이며,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지역간 화해로 망국병을 고치자고 외쳐봐야 고쳐질 병이 아니라는 것, 병을 고치려면 지역주의에 빌미를 주는 정치·경제·사회 구조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그것은 가치의 분배구조, 수도권에 초집중화한 사회구조,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동심원적 엘리트 카르텔 구조,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미미한 계층적 차별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 이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하층 배제적 사회문화 등 민주화 이후에도 아직 제대로 손대지 못한 난관들을 먼저 혁파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지은이와 함께 | 박상훈 대표
“고려·조선때 호남차별 근거 어디에도 없어”
충남 청양에서 떡방앗집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박상훈(45) 대표는 1987년 서울대(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6월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었다. 학과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사회과학 공부 하면서 시위에 열심히 참가했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땐 주로 노동문제를 고민했는데 과감하게 뛰어들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더 과격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진짜 내 모습일까 하는 반성을 했다.”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과정 때 지역주의 문제를 화두로 붙잡았다. “처음 지역주의 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호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편견에 항의하려는 마음이 컸다.”
2000년에 학위를 받은 뒤 최장집 교수가 소장으로 있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간사로 있다가 2002년께 출판사(후마니타스)를 차렸다. 그는 정치체제상의 호남 차별 지역문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등장으로 해소됐다면서도 “생활세계에서의 차별은 그와는 또다른 층위의 문제”라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내가 한 얘기는 해답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의견 제시 정도”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1987년 민주화 추세에 적응하기 위해 명민하게 움직이던 <조선일보>의 모습이 섬뜩했다”면서 조선일보야말로 구체제 세력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헤게모니 조직화 방안, 지역주의 지배담론화 작업의 주역이었으나 “지금은 그때보다 힘이 떨어지고, 좀 우스꽝스럽게 돼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엔 조선일보만 알던 정보를 시민들도 알게 됐고 그 때문에 떨어진 힘을 “억지와 두려움을 동원해” 메워보려 하고 있으나 “수준 미달”이라고 했다.
정권에 대해서도 “김영삼 정권 때는 사람들이 그 무능을 조롱했으나 지금 정권에 대해선 사람들이 증오하고 있다”며 실력은 물론 기본적 위엄조차 갖추지 못한 채 반대 목소리를 위력으로 억압하려고만 드는 모습이 “역대 통치그룹 중 가장 우스꽝스럽게 비친다”고도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도 자유도시가 있어 가능했는데, 한국은 민주화됐다지만 여전히 힘이 일원화돼 있고 비판적 의견 등 이견이 존립할 공간이 없다”며 실질적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호남 차별의 연원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제=호남’ 등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는 678년의 존속 기간 중 493년간은 서울·경기지역에 도읍이 있었고 나머지 185년간은 지금의 충청도 공주와 부여가 도읍이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영남 사람이었다. 조선시대에 곡창 호남은 가혹한 착취로 민란과 모반이 잦았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호남이 특별히 더 착취당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민란과 모반은 영남 쪽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중앙관료 출신지별 비교에서도 고려·조선 때 호남 출신자가 눈에 띄는 차별을 받은 적도 없다.
호남에 대해 부정적 세평들이 전하나, 악평 없는 지역은 없다. 충청도엔 “권세가에 아부해서 이익을 좇는다”는 악평이 있고, 강원도는 “미련하다” 따위의 세평들이 있으며 영남도 악평이 수두룩하다. 인조반정 뒤 차별받은 쪽은 영남 사대부들이었고 영조는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찍었으며 정조는 영남 출신의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호남에 대해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고 김정호는 “조선팔도 중 가장 축복받은 땅”, 정조는 “가장 어질고 충성스런 고장”이라 했다. 그런데 유독 호남에 대해서만 좋은 평가는 배제되고 악평만 선택적으로 부각됐다. 거기에는 지금의 권력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2대 총선은 1개 선거구당 2명을 뽑는 체제로 민정당에서도 의석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일부 민정당 1위 선거구는 야당표 분산의 결과이지 민정당에 대한 지지가 높았던건 아닙니다.
전남 출신의 김대중 후보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면서부터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 안보를 위해 지역 패권을 추구한다. 영남 출신을 중용하고 경제적인 특혜를 베풀면서 영남인들의 단결을 도모했던 것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골적으로 경상도인의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 ‘후백제 후보 김대중’이라는 명의의 흑색선전물이 난무하고 ‘경상도인이 전라도인을 찍으려면 이사를 가라’는 등의 노골적인 지역 감정의 메시지를 시시각각 내보낸 것이다. 1972년 유신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땅에 떨어진 다음부터 박정희 정권은 전적으로 경상도의 지역 패권주의와 호남 고립의 전략, ‘김대중 빨갱이론’에 의존하여 유신체제를 지탱해 나간다.
조선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역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이 영호남간의 갈등이나 차별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각한 것은 기호와 서북의 대립(경기도와 평안도) 이었는데, 그 역시 분단으로 서북세력이 지역기반을 상실함으로써 1950년대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20세기에 들어 일본의 식민정책, 냉전과 분단,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일제치하에서의 경부선철도와 한국전쟁 등과 같은 지정학적 요인들 때문에 의도치 않게 경인 및 영남지역은 호남을 비롯한 여타 지역에 비해 우월한 경제력을 지닐 수 있었다. 허나 이러한 발전격차가 낙후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박탈감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특히 호남 사람들이 이러한 발전격차 때문에 영남에 대해 소외감이나 질시의 감정을 갖는 일도 없었다. 요컨대 영호남간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참고 http://blog.naver.com/rozet77/80012854169)
한국에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서 영호남 지역갈등이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였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호남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으며,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 상처는 더욱 곪아갔다. 20세기초부터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생겨났던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부터 영호남간의 문제로 좁혀져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당시 집권세력이 엘리트 충원과 지역개발 면에서 의도적 차별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계,재계,금융,언론,군장성 출신들은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80%까지 영남출신들로 채워졌다. (5공정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모든 주요기관들 역시 반이상이 영남출신들로 채워졌으며, 영남정권 40여년동안의 기록을 보면 영남출신 재벌들이 그 당시 전체 기업 금융대출의 58%를 독식하였던 것을 알수 있다. 이는 이북출신이 받던 대출을 제외하면 서울,경기,충청,전라,강원,제주 출신 기업인들은 고작 20~25%의 기업대출을 서로 나눠먹는 정도로 영남정권 당시 영남을 제외한 전지역 출신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격어왔는지 알 수 있다. (참고: http://blog.naver.com/rozet77/80018110103)
지역감정이 최초로 시작된것은 역시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부터였다. 공교롭게도 이 선거는 각각 영남과 호남에 연고를 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이미 3선 개헌이란 무리수를 둔 박정희로서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젊은 야당 후보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세력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선거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된다. 경상도 사람 치고 박대통령 안찍는 자는 미친 놈'(「조선일보」 1971. 4. 18.)이라든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 표 이긴다'(「중앙일보」 1971. 4. 22.)는 등의 여과되지 않은 발언들이 유세과정에서 쏟아져 나왔다.
호남차별의 반대편에는 TK의 권력독점이 있었다. 61년부터 92년까지 30년 동안 한 지역의 인맥이 권력을 독점했다는 것은 “빽”이라는 차원으로 지역 하층민에게까지 그 혜택이 어느 정도 돌아가는 수준으로 “특혜의 지역주의”를 형성했고 이는 경남, 충청, 때로는 강원 등 모든 지역에서 “우리도 한 번” 하는 식의 지역주의적 열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호남의 경우 오래 동안 피해를 받은 만큼 이런 “특혜의 지역주의”적 열망이 무시할 수 없었고 이는 김대중 재임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호남의 투표성향을 타 지역의 지역주의와 동일하게 파악하는 것은 이면의 중요한 맥락을 놓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호남지역의 몰표 성향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닐뿐더러 분명 호남지역은 광주를 중심으로 잊을 수 없는 피해를 격었다. 또한 일부지역 사람들이 끈임없이 심어주는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과거 영남정권시절 방송언론과 신문기사의 묻지마식으로 보도 방송되는 지역감정 부추기기는 전라도 사람들을 끝없이 자극하였고 이는 반 한나라당 정서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영남의 타지역인구유입비율을 놓고 따져볼때 5.18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선후보로 대선을 치루던 87년부터 약 15년동안의 호남의 몰표 92%는 영남이 과거 몇십년간 줄곳 지켜왔던 65%~80%에 이르는 영남몰표와 따져볼때 그 차이도 없으며, 오히려 차별과 학살과같은 피해를 격지않은 영남지역에서 나오는 몰표가 더 심각함을 알 수 있다.
---------- 당시 투표율 -------------------------------
박정희가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처음 윤보선과 대통령선거를 치룰때에 전라도는 박정희를 지지했습니다. 이때의 투표형태는 서울등 중부권역은 윤보선씨를 영호남등 남부권역은 박정희씨를 지지하였죠. 한마디로 여촌야도 (당시 여당을 공화당이라고 볼때)입니다. 서울 경기 부산(영남이라하더라도 대도시인 부산) 및 충청 강원까지 모두 윤보선씨가 앞섰습니다.
호남= 박정희 (49.9%) > 윤보선 (33.8%) (전남 52%로 경북 50%보다 많았음)
영남= 박정희 (53.3%) > 윤보선 (30.5%)
부산= 박정희 (45.6%) > 윤보선 (44.9%)
서울= 박정희 (28.6%) < 윤보선 (61.8%)
경기= 박정희 (25.8%) < 윤보선 (51.7%)
강원= 박정희 (35.6%) < 윤보선 (44.1%)
충청= 박정희 (36.1%) < 윤보선 (43.9%)
도시와 중부지방은 윤보선씨를 밀고 영호남은 박정희씨를 지지하였죠. 그 결과 박정희가 겨우 10만표의 차이로 어렵사리 이겼습니다. (물론 엄청난 부정투표가 기인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윤보선씨의 승리라고 봅니다) 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때 영호남 지역감정이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러던 것이 71년 9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3선개헌을 비판하며 민주세력의 결집으로 신민당 김대중후보가 등장하였습니다. 초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김대중후보를 꺽을 방법을 찾던차 선거 3일전 박정희측은 영남지방에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삐라를 뿌려대며 영호남 대결구도로 몰아갔습니다.
호남 = 김대중(58.7%) > 박정희(32.7%) (서울은 김대중 58%)
부산 = 김대중(42.6%) < 박정희(54.4%)
영남 = 김대중(23.3%) < 박정희(71.9%) (경북은 이미 이당시부터 73%몰표 시작)
호남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하지 않았지만 부산을 제외한 영남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보냈습니다. 이때 호남은 90%가까운 지지율로 김대중을 지지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띠죠. (호남의 김대중에 대한 맹목적 지지율이 90%를 공산당투표라고 욕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광주사태와 호남 차별이 낳은 비극입니다. 보시다시피 호남이 처음부터 김대중을 90%지지한것이 아니니깐요. 오히려 박정희를 30%넘게 지지했습니다.)
이런 투표결과가 나온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이 집권하면 호남이 영남 다 죽인다하고 지역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부산같이 깨어있는 도시에서는 별로 약발이 안먹혔지만 부산을 제외한 영남에서는 유언비어가 퍼져서 결국 일거에 전세를 역전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쪽수가 많은 영남을 잡으면 이긴다는 아주 간단한 선거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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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임금을 뽑자
4 · 27 대선은 지역주의, 특히 영남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박정희는 경북에서 92만 표(박 133만, 김 41만 표), 경남에서 58만 표(박 89만, 김 31만 표)를 이겼는데, 영남 지역 승리는 전체 승리 득표 94만 표보다 56만 표나 많은 것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를 전북에서 23만 표(박 30만, 김 53만 표), 전남에서 40만 표(박 47만, 김 87만 표), 그리고 서울에서 39만 표(박 80만, 김 119만 표)를 이겼다. 박정희는 이미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에 비해 영남표만 1백36만 표를 앞섰는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박정희가 이긴 116만 표보다 20만 표나 웃도는 것이었다.32)
그러한 영남 몰표는 부정선거와 더불어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적극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 1971년 대선에선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는 1963년 대선에서도 9월 10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공화당 유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 지역 분열주의자였다.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33)
이효상은 1963년 대선에서 재미를 본 수법을 또 써먹은 것이다. 그는 선거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숱한 망언을 양산해냈다.34) 그 밖에도 공화당 정치인들은 영남 지역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경상도 대통령 아이가."
"문둥이가 문둥이 안 찍으면 어쩔끼고."
"경상도 사람 쳐놓고 박 후보 안 찍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
"1천만 명에 가까운 경상도가 주동이 되고 단결만 하면 선거에 조금도 질 염려가 없다."
"경상도에서는 쌀밥에 뉘 섞이듯 야당표가 섞여 나오면 곤란하니 여당표 일색으로 통일하자."
"우리 지역이 단합하여 몰표를 밀어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 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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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충식,『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319-320쪽.
33) 광주매일 정사 5 · 18 특별취재반,『정사(正史) 5 · 18 상(上)』(사회평론, 1995), 27쪽.
34) 김충식,『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305쪽.
35) 이상우,『박 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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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다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거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아울러 '우리가 똘똘 뭉쳐 몰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서울이고 경기도고 전라도고 우리 표를 빼낼 곳이 없다. 우리가 몰표를 던짐으로써 우리의 지도자,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건져내야 한다'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공무원들에겐 '김대중이가 만약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아울러 공화당원과 경찰,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서울에서 영남 지역으로 내려온 참관인들에게 '이 전라도놈(김대중 후보를 지칭) 앞잡이들아, 모두 꺼져버려라!'라고 스피커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협박하고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곤 했다. 이 때문에 영남 지역에는 참관인들이 아예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또한 영남 지역 야당 인사들에게는 '이 선거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인데 당신은 왜 전라도놈 앞잡이 노릇을 하고 다니느냐?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 마을에서 없어져라!' 하면서 여럿이 떼로 몰려와 구타 · 협박하였다. 혹은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하여, 투표 당일 야당 참관인으로 참석 못하게끔 했다. 설령 참석한다 해도 그들이 어떠한 선거부정을 저질러도 찍소리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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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김옥두,『고난의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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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 편』1권 (인물과 사상사, 2002) 에서 발췌
(http://cafe.naver.com/anti516park.cafe)
지역감정이 심화되며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이다.응답자의 92%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분석해 온 연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수있다.(지역감정연구 / 학민사 191~211편)
과거사위 “경찰 92년까지 선거 불법 개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011803151&code=940301
[출처] 과거사위 “경찰 92년까지 선거 불법 개입”|작성자 K2766201뉴스
지역별 범죄율 통계 (전국 범죄 발생률)
http://blog.naver.com/c879166/110188622720
전라도에만 섬노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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