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일 김진덕 정경식재단 대표의 새해 소망과 기대...1,2차 한인커뮤니티 기금모금 외 27만달러 개인 기부로 채워...
▶ “‘한인커뮤니티 도우라’는 부모의 유언 같은 가르침 실천할 뿐”...독도*위안부 등 일본정부와 맞서는 일하다 일본측 압력받기도
김한일 김진덕정경식재단 대표는 2018년 새해 서울 중심부에 세워질 위안부기림비로 설렌다. 지난해 미 대도시 최초로 세워진 SF위안부기림비와 동일 조형물이 한국 2곳에 세워지면 인권의식 향상의 디딤돌로, 역사적 미래적 가치와 희망을 생산해내는 동력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한국의 기림비 건립 비용을 모두 부담할 예정인 김 대표는 “지난해 9월 SF기림비가 제막되던 날 감격스러웠다”면서 “평화와 인권의 상징물로 우뚝 선 기림비는 그야말로 피해자들의 간절한 염원과 살아남은자들의 책임, 후세대들이 열어야 할 미래가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일부는 “기림비 건립을 주도하는 중국계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했지만, 김 대표는 “주도자가 누구인지보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했다”고 밝혔다.
만약 그가 기림비 건립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상도, 한국 중국 필리핀 3국 소녀상 중 한국의 소녀상이 1인치 더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다음으로 위안부 피해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출처 위안부 보고서 55, 연구학자에 따라 피해자수가 다르다)도 나섰는데 한국은 뭘 하고 있었느냐는 질타와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김 대표는 “여성의 인권이 짓밟힌 위안부 문제는 세계인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슈”라면서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인신매매를 근절시키자는 인권운동”이라고 말했다.
한인커뮤니티는 1, 2차 기림비 건립모금을 통해 18만9천달러를 모았다. 여기에 김진덕정경식재단에서 27만달러를 기부해 총 45만9천달러, 기림비 총건립비용의 절반을 담당했다. 또 김 대표 홀로 한달간 베이브릿지, 팔로알토, SF공항, 산호세 공항 4곳에 위안부기림비 홍보 빌보드를 세워 광고비로만 수십만달러를 사용했다.
■급소 타격으로 동급생 제압
김 대표는 1976년 고등학교 때 이곳으로 가족이민 왔다. 그 시절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괴롭히는 동급생들을 한순간에 제압했던 일화는 지금도 그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바로 ‘미국 가서 맞지 말라’고 급소 타격법을 가르쳐준 사촌(태권도 사범) 덕에 교내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또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수학경시대회 학교 대표자로 수차례 출전했었다. 이후 UC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UOP(University of the Pacific) 치대를 나와 산호세에 김한일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지금도 의사만 14명인 치과병원을 운영하지만 그는 진료를 하지 않는다. 그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부동산 개발 사업이다.

한인커뮤니티를 사랑했던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김진덕정경식재단을 설립한 김한일 대표가 가족과 함께 했던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한일, 김순성, 김진덕 전 미주호남향우회총연합회장, 정경식 여사, 김순란, 김정권, 김순옥씨이다.
■아버지 별세로 한인커뮤니티에 나와
김대중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아버지로 인해 수차례 그의 집을 방문한 김 대통령을 가까이 만나 뵌 적이 많았지만 김 대표는 한국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인커뮤니티와도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러나 2011년 11월 아버지인 김진덕 전 미주호남향우회총연합회장이 별세하면서 그의 인생도 변화를 맞았다.
김 대표는 “그 다음해 봄 권욱순 SF한인회장과 윌리엄 김 축제준비위원장이 찾아와 한국의날 축제 후원을 요청하자 뿌리치지 못했다”면서 “‘한인커뮤니티를 도우라’는 아버지의 부탁이 가슴을 흔들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부모의 유지를 받든 김 대표는 2012년 10월 부모의 이름을 딴 ‘김진덕정경식재단’을 설립한 후, SF평통에 ‘통일장학금’ 1만달러를 지원하면서 한인커뮤니티를 사랑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게 됐다.
■독도 표기 바로잡기 지금도 꾸준히
그후 김 대표는 2015년 2월부터 245일간 구글 지도에서 삭제된 독도의 이름을 되찾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는 “쿠퍼티노하이스쿨 재학 시절 ‘East Sea(동해)가 Sea of Japan(일본해)로 표기된 것을 이상히 여겼던 기억, UC버클리 수학시절 룸메이트인 백인친구가 ‘Sea of Japan’이 맞는 것이라고 확인해줬던 무안함, 중학생이었던 아들이 ‘교과서에 왜 동해가 일본해로 되어 있느냐” 물어봤을 때 잘못된 것이라고 답했던 부끄러움이 쌓여 있었다”면서 “언젠가 이것을 바꿔놓겠다는 다짐을 했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구글이 2012년 10월 24일 기점으로 지도에서 독도 이름을 삭제하자 야후도 빙(Bing)도 따라하기 시작했다”면서 “잘못된 것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글측에 서명서를 전달할 방법이 막막했다. 그는 고심한 끝에 존 유 UC버클리 교수, 피트 윌슨(Pete Wilson) 전 가주 주지사(1991-1999년 재임)와 만남을 갖고 구글측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관인 BGN(미 지명위원회, Board of Geographic Name)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10만명 서명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면서 “독도 표기 바로잡기 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존 유 교수가 매년 주최하는 독도 세미나를 지원하면서 주류와 세계학자들부터 독도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는 기반조성작업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맘이 복잡할 때마다 해프문베이에 있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간다는 그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해답을 찾는다”면서 “독도 서명, 위안부 건립 참여 때도 산소를 다녀온 뒤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그러고 보니 일본정부와 맞서는 일만 했다”면서 “여러 채널을 통해 활동을 자제하라는 일본측의 압력도 받았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미친 사람, 무모한 사람이란 말을 들어도 내가 뿌린 ‘작은 씨앗’들이 세상을 바꾸는 역사가 되고, 커뮤니티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굳은 신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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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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