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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화과정의 최초의 것들..... 그런데 일본이 무슨 상관이라도?

- 출처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
일제시대의 잘못된 역사교육 탓인지 최초의 전력사업도 일본이 도와준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전기사업을 독점한 결과 역사와 전통이 왜곡됐기 때문이지요. 일본이 부산·인천·원산 등의 개항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전력사업에 참여한 것은 1901년부터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고종황제가 미국인 콜브란(Collbran)의 조언 아래 이근배, 김두승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설립한 우리의 민족기업입니다.

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습니다. '아~!'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점화된 것입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견한 지 고작 8년만에 서울에 전등이 켜졌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기는 문명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등 가설에는 큰 돈이 들었습니다. 궁정에 제일 먼저 전기불이 켜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발전 설비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16촉광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건달불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때의 발전기 조립·설치·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의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전기기사가 맡았습니다.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탄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렸는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 했다 합니다. 발전기 가동으로 연못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후로, 전등을 일러 물고기를 끓인다는 뜻인 '증어'(蒸魚)라 부르기도 했구요. 또 성능이 아직 완전치 못한 탓에 자주 불이 꺼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꼭 건달 같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건달불'(乾達火)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













1898년 1월 고종은 단독출자로 조선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고 이 회사의 주요사업은 전차를 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1900년 4월 전차의 야간 운행에 맞춰 종로에 세 개의 가로등을 점등하였는데 이것이 민간 최초의 전기점등이었습니다.

최초의 기차
선명 경인선
부설권 특허 1896. 3. 29 / 미국인 J.R.모-스
착공일 1897. 3. 22 / 인천 우각현에서 공사 착공
개통일 1899. 9. 1 8 / 노량진역에서 거행
운행구간 노량진 - 제물포간 33.2km
보유차량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
운행차량 모갈탱크형 증기기관차(1899년 미국제)
운행속도 20-22 km/h (최고속도 60km/h)
운임 1등객차 1원50전, 2등객차 80전, 3등객차 40전
운행횟수 1일 2왕복(4회)
소요시간 1시간 30분
신호현시 완목식 신호기 사용
소관부서 궁내부 철도과
1899년 7월 15일 전차의 개통식

동양최초의 전차가 미국의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 제작돼 개통되어 개통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걸렸습니다.전차는 일본의 동경보다 3년을 앞서서 개통된것 입니다. 전차는 세계적으로도 신기술일뿐만 아니라 전차 자체가 희귀했다고 합니다.그것을 조선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웠지만 미국인 콜브란이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성전기회사가 당시 한성(서울)에 전차사업을 추진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 서울에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황후의 능인 청량리 홍릉(현재는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에 행차할 때마다 10만원의 비용이 들었는데, 전차를 타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공식은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앞에서 열렸는데 1899년 4월 26일 콜브란이 사회 저명 인사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대중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마일(8㎞)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도 시속 15마일(24㎞)은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전차는 5월 4일 오후 3시 동대문 경희궁 흥화문 간 첫 운행에 성공했으며, 5월 20일부터 정상 운행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전차는 정거장이 없이 손을 흔들어 탈 수 있었고, 5세 이하는 무료였습니다. 요금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상등칸은 엽전 3전5푼, 하등칸은 1전5푼으로, 당시 쌀 1㎏ 가격이 4~5전인 점으로 미뤄 요금은 비싼 편이었습니다.

[이의제기] 약간 다릅니다. 일본은 1890년 일본 동경 우에노박람회에서 먼저 첫선을 보입니다. 이것은 영업용이 아니라 단지 전기의 효율성을 시험하기 인한 PR용으로 제작된것이고 영업용으로 일본최초의 전차는 1895년교토에서 만들어져 시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최초의 전차입니다. 동경은 인구가 많고 말등 다른 교통수단이 많아 당시 전차선로를 까는데 적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경은 1904년 영업용전차를 운행합니다. 한국이 동경보다는 빨랐지만 일본보다 앞서서 전차가 제작된것은 아닙니다.

[이의제기]그렇겠군요, 전차가 영업용으로 아니 산업용으로는 우리나라가 시험용으로는 일본이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통된 전차는 맞는말 아닐까요?

-대한제국 전차가 일본보다 3년이 앞서고 있다는 내용은 kbs 역사스페샬에서도 방송된 내용이지만, 좀 더 알아 보아야 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전차 [電車] [일반도로의 노면 위에 부설된 궤도를 운행하는 대중교통용 전동 차량]
공중에 설치된 전선을 통하거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제3의 레일을 통하여 전기를 공급받아 모터를 회전시켜 운행하는 대중교통용 차량이다. 넓은 의미로는 전철 등 전기로 움직이는 차량은 모두 포함되나, 여기서는 그 중 전차만을 위한 통로가 따로 독립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자동차 도로에 궤도가 설치되어 운행되는 좁은 의미의 전차인 노면전차를 가리킨다.





최초의 전화기
전화기 최초의 실물은 1882년 3월 텐진 유학생 상운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인데 이것으로 시험통화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통화는 1896년 궁내부에 자석식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이루워졌습니다.
한국에서 전화가 사용된 것은 1898년 당시 내부(宮內部) 주관으로 궁중에서 각 아문(衙門)과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시설을 마련하여 각 아문은 물론 인천에 있는 감리소(監理所)에까지 전화를 개통하면서부터입니다. 궁중전용으로 전화기 9대가 도입되었습니다.
당시의 전화는 덕률풍(德律風) 또는 득률풍(得律風)·전어기(傳語機) 등으로 이때 교환기는 스웨덴 엘 엠. 에릭슨사의 자석식 단식교환기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행정관서 , 우정국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로서, 1884년(고종 21) 종래 역참제(驛站制)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통신제도를 도입, 그 운영을 위해 설치하였다. 병조참판 홍영식(洪英植)이 총판(總辦)에 임명, 박영효(朴泳孝) 등 15명이 사사(司事)가 되어 사무를 분담하였으며, 견평방(堅平坊:鍾路區 堅志洞)에 있던 전의감(典醫監)을 개수하여 청사로 사용하였다.
조선정부는 처음으로 일본 ·영국 ·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체결하고, 11월 17일 역사적인 근대적 우편제도의 사무를 개시하였다. 이때 서울의 총국과 인천의 분국(분국장 李商在)이 제1차로 개국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개업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12월 9일 폐쇄되었으며,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舊制)인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

원산학사

우선 원산학사(元山學舍)는 1883년 8월에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중심이 되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과 원산항 통상 담당의 통리기무아문 주사인 승지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관민이 합심하여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학교였다.
그리고 설립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정헌석·어윤중·정헌시·외국인 등이 참여해서 모금하였다.

반은 문예반과 무예반이 있었고, 수업과목은 문무반 공통으로 산수·물리(격치)·기기·농업·양잠·광채 등 실용적인 과목이 있었고, 특수과목으로 문예반은 경의를, 무예반은 병서를 가르쳤다. 이외에도 일본어 등 외국어와 법률·국제법(만국공법)·지리 등 근대 학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원산학사는 본디 지니고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의 기능이 나뉘어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가 되고, 원산 감리서에서 역학당(譯學堂)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하면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외국어와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처음에 원산보통학교로, 나중에는 원산제일국민학교가 되어 1945년까지 존속하였다.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69-wonsanhagsa.htm


배재학당

1885년 4월에 조선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7월에 서울에 들어와 8월에 바로 배재학당을 설립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옥 한 채를 구입해 두칸 벽을 헐고 교실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와서 새로운 교사를 신축할 필요성를 느낀 아펜젤러는 1887년 초 한옥교사를 대신할 양옥교사를 착공하여 그해 9월에 준공을 보게 됩니다.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 요시자와였습니다. 이 새로운 교사가 준공되기 전해인 1886년 6월 8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받게 되는데, 이날이 배재중.고등학교 개교기념일에 해당합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남자학교였습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도 중요한데 이승만은 아펜젤러가 가장 아끼는 학생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해방 후 미국이 남한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승만이 미군정에 의해 선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배재학당에서부터 시작하는 그의 오랜 미국과의 인연이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아래 글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아펜젤러가 그의 가족을 도운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편지입니다. 1899년 12월 28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서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주신 데 대해서 무슨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없는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제 부친께서 편지로 선생님의 크신 도움에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이만열,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시대에서 재인용)

서소문과 서대문 사이 도성 바로 안에 형성된 정동 땅, 개항 이후 외세들이 조선정부를 위압해 차례로 외국공관을 세운 땅, 그곳에서 처음 한국개신교의 양대 맥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많은 상징성을 함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외세의 힘아래 굴복해야 했던 약소민족의 눈물이 낙옆처럼 뒹구는 땅, 정동땅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손님에서 어떤 주인으로 오늘날 바뀌었는지, 이제는 좀 냉정한 물음을 물어보아야 되겠습니다. 현재 배재학당터에는 1916년에 지은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만 남아있습니다. 배재고등학교는 1994년 고덕동으로 이전했습니다.

이화학당(梨花學堂)

배재학당이 개설된 바로 옆 땅에 아펜젤러와 같은 미국 북감리회 소속이던 여자 선교사 스크렌턴(M.F.Scranton)은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7년 명성황후가 내려준 교명입니다.이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자학교가 됩니다. 초기 한옥교사는 ㄷ자 한옥교사였는데, 수용시설의 한계 때문에 1896년 헐리고, 1897년 새교사(Main Hall)가 착공되어 1899년 12월에 완공을 보게 됩니다. 이 새교사(Main Hall)는 6.25전쟁 때 파괴되어버리고, 지금은 Main Hall 다음으로 1915년에 준공을 본 교사(Simpson Memorial Hall)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앨런(한국명:安蓮)이 서울 재동(齋洞)에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고종 22년인 1885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 최초의 국립병원이기도 하다.]을 설립했다. 앨런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王室附)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원 설립을 건의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정부는 광혜원 규칙을 제정해 국립병원으로서 원장 격인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을 두었으며, 의료진으로는 미국인 의사인 알렌을 초빙해 환자 진료를 실시했다. 이외에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와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는 등 의사 앨런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인 3월 12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꿨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활동에 종사하였다.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婦人部)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앨런과 엘러스에게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참고]조선을 향한 최초의 결단 죤 헤론

고종황제의 윤허에 의해 의사와 언어교사가 한국에 들어 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자 조선을 향한 선교사의 반응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선교사로 반응한 젊은이는 의사였던 죤 헤론 (John W. Heron) 이었습니다.
그는 1858년 6월 15일생 영국에서 출생해서 14 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조선에 의사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조선을 향한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민족에게 찾아오기까지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모교인 테네시 종합의과대학에서는,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죤 헤론을 교수로 내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조선 선교사로 오는데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가 교수와 의사로 본국에서 지낸다면 , 그의 앞길은 든든히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명예와 부가 보장된 그 길을 뒤로하고 ,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 병이 득실거리는 낯선 이국 땅에 찾아 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열방을 품은 주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우리 나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그는 즉시 선교부의 편지를 받고 일본에서 더욱 더 조선말을 배우며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중에 파송을 받고 왔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입국하게 되면서 그는 바로 뒷 배로 조선땅에 입국하게 됩니다. (1885년 6월 21일)

알렌은 외교관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고, 죤 헤론은 병원장으로 광혜원을 돌보게 되었으며 그 병원은 서울 을지로 2가로 이사를 하면서 제중원이 되었습니다. 광혜원이 왕족과 양반계급을 위한 병원이었다면 제중원은 모든 천민에게까지 혜택을 주기 위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병원에서 5년간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모두 피서를 떠난 후에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시다 , 이질로 몸져 드러눕게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일하던 조선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서 그 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가 죽자 , 그를 묻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에게 묻을 수 있는 땅을 요청했고, 고종은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그를 묻을 수 있는 땅을 주었는데, 그곳이 합정동 선교사 묘지가 되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는 그 이후, 약 120명의 선교사님이 묻힌 , 개신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조선시대 말기인 1886년(고종 23)에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서울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창설한 사립 여자교육기관이다. 이듬해에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리었고, 초등교육·중등교육·대학교육을 아울러 실시하였다.
스크랜턴은 한국여성으로 하여금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보다 완전한 한국여성이 되게 할 목적으로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서 그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887년 명성황후는 여기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렸다. ‘이화(梨花)는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며, 이를 계승한 이화여자고등학교는 1986년에 한국여성 신교육 100주년의 전통을 세웠다. 설립 당시에는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통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 때문에 학생 수용에 어려움을 겪어, 단 한 명의 여학생으로써 개교하여 영어를 가르쳤는데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었고 교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다.

1892년에는 반절(反切:국어)·한문·영어·성경·수학·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으며 1909년 에는 음악이 정식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1904년에 4년제 중등과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졸업생을 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립하였다. 1910년 4월에는 4년과정의 대학과를 신설함으로써 초등·중등·고등 교육을 모두 실시하게 되었다. 1914년에 김앨리스·신마실라·이화숙(李華淑) 등 3명의 졸업생을 내어 이들은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1914년에는 이화유치원을 설립하고, 이듬해에 유치원사범과를 신설하였으며, 1917년에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1918년에는 고등과와 보통과가 이화학당에서 분리되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개정하여 11월에 개교하였다. 1938년에는 이화고등여학교로 개칭되고 처음으로 한국인인 신봉조(辛鳳祚)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의 학제개편에 따라 6년제 이화여자중학교가 되었고, 1950년 6월에는 3년제 이화여자중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그 사이 예능교육에 힘을 많이 쓰는 결과 국내외에서 이름을 떨친 음악가·미술가가 적잖이 배출되어, 1953년에는 이화여교의 자매학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15년 이전의 교훈은 ‘모든 일을 단정히 하고 규칙있게 행하라’였으나 1939년 ‘순결·희망·발전’으로 바뀌었고, 8·15광복과 더불어 ‘자유·사랑·평화’로 다시 바뀌었으며, 그 기치 아래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갑군함 -양무호

우리나라 근대식 함선의 효시는 양무호(揚武號)입니다. 3천 4백톤급의 증기선으로 1902년 고종 황제의 구입 의뢰에 의해 1903년 미쓰이물산이 4.15일 납품을 하면서 인천항에 첫 선을 보입니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호(Pallas)라는 화물상선이었다. 배의 규모는 3천4백24t, 1천7백마력으로 원양 항로에 취항했던 것을 미쓰이물산이 25만원에 구입해 일본-홍콩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배를 움직이는데 하루 43t의 석탄이 쓰이면서 골칫거리로 남자, 이 배에 고물 대포를 걸어 놓고 우리 정부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후 양무호는 군함의 임무를 펴보지도 못한 채 러·일 전쟁 후 1907년 부산항에서 선원실습용으로 사용되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상점(原田商店)에 4만2천원에 매각,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양무호와 함께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광제호(光濟號)'는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군함으로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었다.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군함 도입이 추진되어 처음 도입된 군함이 양무호였으나 이 배는 화물선을 급조한 것이었다. 광제호는 새로운 군함 발주 계획에 의거하여 일본에서 건조되어 1904년에 건조되었다. 광제호는 전장 220척, 너비 30척, 선심 21척, 화물적재량 540톤, 총톤수 1056톤으로 해안경비 등대순시 및 세관 감시에 이용되었다. 1905년 강제 조약 체결 이후 해군 군함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연안세관 감시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용출처 : http://www.kidclub.pe.kr/inchon/i_4/in2002_2.htm


영국 석탄선을 일본회사(마쓰이 상사)가 개조해 대한제국에 55만엔에 팔았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방비의 4/1의 해당하는 자금이다

드디어 고종의 원대한 꿈은 이루어 졌고 이 정도의 크기면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크기였고 대포를 장착해 유사시 전투를 벌일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렇게 소원하던 군함을 보유했건만 2년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고
7년뒤엔 나라가 일본에 손에 넘어가고 만다
그러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일본에서 파견나와 있던 도오야마 해군소좌가
양무호를 일본으로 끌고가 개조를 해 일본연합함대에 수송선으로 활용하였다
55만엔을 들여서 산 최초의 군함 양무호는 구입가의 10/1도 안되는 4만엔에 다시 일본에 매각되었고
1916년 석탄을 싣고 싱가폴로 가던 중 동지나해에서 침몰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

1. 대동은전

대동전은 은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로서 상평통보와 같은 가운데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1882년(고종19년) 7월에 발행되어 3가지 액면으로 대동1전, 대동2전, 대동3전이 있으며, 뒷면에는 주전소인 戶曹에서 제조되었다하여 뒷면 가운데 원안에 戶字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앞면의 글자는 對讀형식을 하고 있으며 압인이 아닌 주물형식으로 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평통보를 제조하는 기술과 비교하여 진일보한 기술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뒷면 중앙에 칠보를 덮어서 새로운 화폐형식을 받아 들였다는데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칠보색상은 흑색, 청색, 녹색을 포함하여 5가지 색을 띠고 있다.

대동은전은 발행당시 주변국 일본의 일원은화,
멕시코의 무역화, 중국의 마제은 등 국가간 무역거래의 원활을 위해 은본위 화폐가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조선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대동은전을 발행하였다.

대동전은 발행되자마자 은화의 본질적인 가치가 높고 은과 칠보의 아름다움 그 자체 때문에 부유층의 손에 들어가 사장되어 유통이 활발하지 못하였으며, 대동전의 소재인 중국의 마제은의 가격상승으로 결국 발행된지 9개월만인 1883년(고종20년) 6월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비운을 맞게 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집선호도가 큰 화폐이다.




2. 당오전 시주화

개항을 전후한 1883년경 생산된 상평통보 당오전은 당시의 어려웠던 국내사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 채 태어났다.
외국과의 교섭 및 개화를 위한 관리들의 일본파견, 신식부대 설치 및 운영비 등을 지출하는 것 외에 구식군대의 군졸들은 양곡과 급료를 1년여 동안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정부는 김옥균이 당오전 주조를 절대 반대함을 무릅쓰고 뮐렌도르프에게 당오전 지시를 명하여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행된 당오전은 주물전과 압인전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국의 주전소에서 주조된 상평통보는 대부분이 주물전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압인형태의 다양한 종류의 당오전이 있었는데 소전(素錢)가운데 원형이나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것과 구멍이 뚫리지 않고 원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서 구멍이 뚫리지 않고 윤곽만 가지고 있는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평통보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뮐렌도르프에 의해 독일에서 압인기가 수입된 1884년 을유시주화가 제조되기 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3. 을유년 시주화

경성전환국이 설립될 당시의 화폐주조기술은 주물로 상평통보를 제조하는데서 크게 발전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였다. 초보적인 기술에 의존하여 제조하던 화폐 기술은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주전설계서”라는 보고서를 고종에게 제출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는다. 보고서는 제출 되었으나 당시 미국 공사나 중국의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개혁자로 알려진 윤치호도 이를 강력 반대하였으나 고종은 주전설계서에 의한 대로 주전기계를 수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고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883년 경성전환국이 설립되자마자 근대적 화폐제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 미흡으로 주화의 표면이 확연하지 못해서 조각담당, 각인담당 및 전환국관리자로서 총3명의 일본인이 초빙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4년 (고종21년)에 최초로 시주화 2종류가 선보였는데 을유년에 제조되었다하여 을유시주화라 불린다. 한 종류는 1냥 은화로 또 다른 한 종류는 5문 동화로 제조되었다. 근대식 주화를 시험 제조한 이후 2년 뒤인 1886년에 15 종류의 다양한 시주화가 태어난다.




4. 태극장도안 시주화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883년에 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전환국을 설치한 계기는
첫째, 개항과 더불어 무역을 위해 주변외국에서 사용하는 은본위제도의 화폐유통이 되고 있어 구 화폐체제인 상평통보보다 신식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둘째, 화폐를 제조하면서 수익을 창출하여 정부의 세수(稅收)확대를 시도하였다.
셋째, 경성전환국은 1884년(고종21년) 3월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전환국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근대식 조폐기기와 더불어 소전(素錢)과 각인(刻印)도 독일에서 수입되어 근대식 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6년 (고종23년)에 주석에 금과 은을 각각 도금한 금화 5종, 은화 5종 및 청동화 5종 총 15종류의 시주화가 탄생되게 되었다. 금도금화는 20환, 10환, 5환, 2환, 1환이 있으며, 은도금화는 1환, 5냥, 2냥, 1냥, 반냥이 있고 청동화는 20문, 10문, 5문, 2문, 1문이 있다.하지만 정부는 금보유량이 적고 제조비용 부족 등의 이유로 1888년(고종25년)주조를 중단하였다. 이후 이 기기는 인천전환국에서 계속 사용하게 된다.




5 최초의 근대식 태극장도안 통용화폐

1886년 최초의 근대식 시주화가 제조된 이후 2년뒤 정식법정화폐로서 모습을 갖춘 1냥, 10문, 5문의 3종류 주화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통용화폐는 제조년도가 1886년 (개국495년)이라는 연호로 도안되어 있으며 도안은 전면 중앙상단에 태극무늬장휘장을 하였으며, 좌우에는 오얏나무 가지 2개를 서로 교차시키고 뒷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도안되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부각시켰다. 당시 발행량은 1환주화가 1300여매 그리고 10문 및 5문도 많은 량을 주조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어 결국 대중 유통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6. 은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1891년 (고종28년) 전환국의 안경수의 건의를 받아들인 고종이 신식화폐조례에 대한 제정을 만들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화폐의 분량이나 성질이 정해진 것이 없어 이를 정한다.
② 화폐의 통용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
③ 화폐의 본위가 확립되지 않아 이를 정한다.
신식화폐장정에 따라 1892년 화폐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최저 1푼을 황동, 5푼을 적동, 2전5푼을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1냥 이하부터가 보조화폐로 1냥과 5냥은 본위화폐로 명문화하고 발행하였다.
(일본 나온다~)
1냥의 경우 국내에서 유통되도록 정한 반면 5냥은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1원 은화와 동일한 가치가 있도록 정한데서 화폐의 주조는 물론 화폐가치 역시 일본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은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청나라와 국내 보수파가 합세한 미국,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서 유통은 되었지만 신식화폐조례는 빛을 보지 못한 채 공포되지 못했다. (ㅡ,.ㅡ;)




7. 금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 5월 22일 광무5년에 화폐조례가 제정되어 세계적으로 금본위 화폐제도 정책에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891년 은본위 화폐정책을 받아 들인 후 10년만의 변화이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은본위 화폐제도에서 금본위 화폐제도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역할은 탁지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이프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금화는 20원, 10원, 5원의 3종류이며, 은화는 반원, 20전, 10전이 있고, 5전 백동전과 청동화에는 1전 및 반전이 있다.




당시의 조례에는 20환, 10환, 5환의 금화 3종류를 본위화폐로 정했으며, 보조화폐로서 반원 은화와 20전 은화, 5전 백동화 및 1전 적동화로 정했다. 하지만 조례에 의한 화폐는 러일전쟁 영향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협정서을 한국과 체결하고 화폐정책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카타는 두돈오푼 백동화의 남발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화폐정책을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로 전환국을 폐쇄시키고 1905년 1월 18일에는 1901년에 제정된 화폐조례를 재정비한 “화폐조례실시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화폐종류를 보완 및 추가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10전 은화와 반전 적동화가 새로 제조되었으며 기존의 주화는 크기가 작아 진 것이 특징이다.
1907년 칙령 제4호로 은과 구리 등으로 제조하는 보조화폐 몇 종류가 크기 및 함유량 등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소재가치가 명목가치 이상으로 상승하여 주변국으로 유출될 경우 용해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이를 방지하고 화폐유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1905년과 1907년에 발행된 주화는 메카타가 한국의 화폐제조권을 사실상 박탈하다시피 한 결과로 전량 일본의 오사카 조폐창에서 제조되어 한국에 유통되었다.




8. 독수리도안의 화폐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종전보다 더 강경하게 조선의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강압에 의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일본의 입장이 강해지면서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프랑스와 독일까지도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일본의 오만불손한 행동은 극에 달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전국 각 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는 등 전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1896년 러시아와 친밀한 인사들이 러시아와 사전에 약속하고 아관파천을 실행에 옮겼다. 즉, 혼란한 사회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왕을 보호한다고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을 이동시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애서 입김을 강화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던 인천전환국을 폐쇄하고 용산에 전환국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화폐주도권을 가진 일본의 역할을 무력화 시킨 후 1901년에 반환은화, 백동으로 만들어진 5전 및 동화 1전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를 소재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용산전환국을 폐쇄시킴과 동시에 독수리가 도안된 화폐를 대부분 회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용해시켰다.힘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일본 국왕의 상징인 용과 러시아의 휘장인 독수리 등으로 바뀌는 등 약소국가의 단면을 보여준 화폐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환, 20환, 10환, 5환 4종류의 화폐가 용산 및 인천 전환국에서 시주화가 발행되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coinnara.org/?t_search=naver


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인쇄광고는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1886년(고종 23) 1월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한 조선정부의 관보.)에 실린 '세창양행'의 광고입니다.

독일 무역상인 세창양행이 1886년 2월 22일자「한성주보」제 4호 17쪽에서 18쪽에 걸쳐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 世昌洋行 告白)'이라는 24줄 짜리 광고를 게재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근대적 광고의 효시입니다. 이 광고는 '광고'라는 말 대신에 '고백'이라는 말을 썼고, 글씨는 순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광고의 내용은 소가죽, 말가죽, 개가죽 등을 사들이고, 자명종 시계, 호박, 유리 등을 외국에서 들여다가 판다는 것입니다.


- 독일상사 세창양행 광고 내용 전문(全文) 번역문 -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 담비, 흰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소·말·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점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들은 그 수량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저희 세창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알립니다.



덤2,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셔우드 홀,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 출생으로 아버지는 W.J.홀, 어머니는 R.S.홀 입니다.
최초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문을 연 평양외국인학교에서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1906년 8월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원산에 있는 R.A.하디 선교사의 설교를 듣게 되고, 이에 귀국하여 사업가가 되려고 했던 그는 의료선교사가 되어, 그것도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일할 것과 결핵요양소를 세울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1928년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결핵환자의 위생학교’라고 이름 붙였던 셔우드 홀은 1930년 안식년 휴가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1932년 귀임하였으며, 결핵요양소의 운영비 마련과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위해 한국 최초로 남대문을 그린 크리스마스실을 1932년 12월 3일에 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 또는 5,000엔 벌금형을 언도받은 셔우드 홀은 벌금 5,000엔을 물고 인도로 자리를 옮겨 의료선교를 하였으며, 1963년 은퇴,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죽었다.
그 유해는 1992년 4월 10일 아버지가 묻힌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으며, 그가 출간한 조선 회상은 한국 근대사 자료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셔우드 홀이 떠나던 날... (1940년 11월)
아내와 함께 세 아이를 데리고 조선을 떠나며 셔우드 홀은 항구의 나뭇가지에 태극기를 걸고 가족들과 함께 만세 삼창을 하며 조선을 떠나야 함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우리나라 근대화에 있어서 일본이 뭐라도 관계있는거야?


그러나,

드디어 이 대목에서 일본이 등장한다 ~~~` ^0^)/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약

1. 운요호 사건
(1) 조선을 무력 위협에 의해 개항시키겠다는 생각을 굳힌 일본은 조선의 동남·서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뱃길을 연구한다는 구실로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부근에 이르렀다. 운
요호가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부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포격을 가
하였고, 운요호에서도 초지진 포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을
지르는 등 못된 짓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2) 운요호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먹을 물을 구하기 위해 초지진에 접근했던 일본 배가 조선
군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항의하며 여러 척의 군함으로 부산 앞 바다에서 무
력 시위를 하였다.
(3) 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불법적인 무력 행위였다. 엄연히 주권이 있는 남의 나라 영토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집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의 교
섭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무력 행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2. 강화도 조약의 체결
(1) 1876년에는 6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는 한편, 우리 정
부에 담판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조선에는 여전히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컸으나, 한
편으로는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싹트고 있었다. 결국 조선이 발전하려면 세
계 여러 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들과 회담을 벌였다.
(2) 여러 차례의 담판 끝에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의 전권 대사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조의
조약문이 강화도에서 조인되었다(1876년 2월).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다.

(3) 강화도 조약은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세 항구를 연다는 것을 포함하여 일본인의 경제
침략을 가능하게 하는 조약들이 중심 내용으로써 우리 나라의 권익이 지켜지지 못한
평등 조약 이었다.



3. 윤요오호사건과 강화도 조약의 연계성

a운요호사건으로 인해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 <관련>

b모두 불법적<운요호>, 불평등<강화도 조약>이다 .

c강화도 조약과 운요호 사건은 일본에 관계된 일이다 .


===================================

기타 합병전 대한제국의 모습은 이쪽으로 ,

대한제국은 착살하게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1.http://bbs.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talk&page=13&nid=369715&st=writer_id&sw=patriot_kor

2.http://bbs.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talk&nid=449769&st=writer_id&sw=patriot_kor

3.http://bbs.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talk&page=11&nid=370784&st=writer_id&sw=patriot_kor

4.http://bbs.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talk&page=13&nid=369717&st=writer_id&sw=patriot_kor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대한 필사적인 자구노력-

수도인 한성의 근대 도시로 개조(워싱턴 DC를 보고 참조)하기 위해
도로의 확장
공원(탑골공원)건설
> 당시 조선에게는 공원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한성전기회사 설립
시영 궤도전차 도입(아시아 최초,일본의 동경보다 3년을 앞섬,1899) ←(확인이 필요한 부분)
> 전차는 세계적으로도 신기술일뿐만 아니라 전차 자체가 희귀했다고 합니다.
발전소건설, 도심의 가로등 설치
1894년 한성의 기업수 4개 >> 1904년 한성의 기업수 222개
실업학교창설
> 사립철도학교(1900), 사립광성상업학교(1900) 사립낙영학교 철도과설치(1900)
신분보단 능력위주의 등용
> 보부상이었던 이용익의 궁내부 최고 자리에 오름

수입증대
> 17만냥(1897) --> 3천만냥 (1904) ...180배 증대

군사력 강화
> 육해군 통합 원수부창설(1899) 시위대(황제호위) 진위대(지방) 증강
> 군사통치권자로서 육해군 친총법안마련
>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설립 (1893)
> 군함(양무호) 구입(일본에서 화물선을 구입, 군함으로 개조)
> 비밀정보조직을 조직합니다.

이후 을사늑약이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만국회의에 헤이그 밀사 파견했지만
네델란드 초청장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하게됩니다.
그후 헤이그 밀사 관련으로 고종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본에 무엇을 감사하면 좋아? ㅡ,.ㅡ;

2012-12-30 : 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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