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いうえお経済
FC2 Analyzer

태그

한국군 (1)김연아 (1)구한말 (3)베트남 (1)혐한전사 (1)중국 (9)재일한국인 (5)군사정권 (1)한류 (2)만화 (2)범죄율 (2)미군기지 (2)혐한공작 (5)북한 (1)동성애포르노 (1)노무현 (1)성진국 (12)뉴라이트 (2)류큐/오키나와 (5)엽기사건 (1)밀입국 (1)외국인차별 (3)조선일보 (1)베트남전쟁 (1)한일월드컵 (1)단일민족신화 (1)류큐독립운동 (3)위장공작 (2)애니메이션 (1)양심적일본인 (1)한국역사 (6)명예훼손 (1)2ch (3)일본언론 (1)아동학대 (3)일본학교 (2)제2차세계대전 (8)대만 (7)숙칭대학살 (1)관동대학살 (2)김대중 (1)유엔 (1)로리콘 (2)혐한 (16)서울올림픽 (1)미국 (3)재해 (1)치열 (1)고종 (2)일제만행 (23)성노예 (6)일제강점기 (4)호주 (1)필리핀 (1)아이누 (3)아베신조 (1)한국요리 (1)식민지근대화론 (3)말레이시아 (1)유럽 (1)러일전쟁 (2)한국기원론 (4)소년범죄 (2)성범죄신고 (5)유언비어 (6)황민화정책 (4)정조관념 (1)덧니 (1)단교 (1)아동포르노 (1)노예제도 (2)인신매매 (2)F.A.매켄지 (1)한일병합조약 (1)민족차별 (9)의병운동 (1)청일전쟁 (1)성형 (3)한국독립운동 (3)위안부결의 (3)해외TV프로그램 (2)리덩훼이 (1)진주만공습 (1)영토문제 (1)일본군위안부 (7)싱가포르 (1)역사교과서왜곡 (4)일본기원론 (2)성매매원정 (2)스포츠 (1)동영상 (7)성범죄 (9)반일데모 (2)일왕 (1)재특회 (1)인도네시아 (4)이토히로부미 (1)일본녀 (3)통계 (5)동남아시아 (4)소수민족 (7)러시아 (1)일본경찰 (3)네덜란드 (3)일본 (44)공식사과 (1)

아이누의 고향 ‘쿠릴 열도’ - 북방영토 분쟁은 ‘도둑놈의 장물 싸움’

- 출처




아이누의 고향, 쿠릴 열도

북방 영토의 분쟁은 ‘도둑놈의 장물 싸움'


아이누의 땅 – 아름다운 아칸 (현재 국립공원).


지금은 일본과 러시아라는 서로 경합하는 국민국가로 편입됐지만, 그 이전에 이 영역에 거주하던 아이누라는 선주민족들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러나 같은 종류의 영토확장의 지향을 가진 일본과 러시아라는 국민국가에 흡수됐을 때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이누족(アイヌ) – Ainu


1904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아이누 민족(Ainu, 일본어: アイヌ民族)은 오늘날의 일본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 사할린 및 쿠릴 열도, 혼슈의 도호쿠 지방에 정착해 살던 소수민족이다.(약 10만명 정도) ‘아이누’란 단어가 일본 내에서 차별적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우타리’(‘친척’, ‘동포’라는 뜻)라고 부르는 아이누 사람들도 있다.

몽골인 계통의 사람들과는 외형상 닮지 않았다. 이들은 한때 북아시아로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던 초기 코카소이드의 후예들로 추정된다. 여러 방언들을 갖고 있던 원래의 아이누어(語)는 이제 일본어에 의해 거의 사라져버렸다.



아이누 부족장과 아내.


아이누인들은 이전에는 일본 전역에 걸쳐 살았으나 일본인들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점차 북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본인들과의 통혼(通婚)과 문화적인 동화로 순수한 아이누인들은 실제로 거의 소멸되어버렸다. 현재 홋카이도의 약 2만 4,000명 정도가 아이누인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나 이들 중 순수혈통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며, 특히 언어나 종교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들 대부분은 이제 신체적으로 일본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 전통적인 아이누인들은 눈이 동그랗고 키가 작으며 살갗은 갈색이고 몽골인들에 비해서 몸과 얼굴에 털이 많다. 남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며 여자들은 콧수염과 유사한 문신을 입언저리에 새겼다.



아이누족은 섬에 자생하는 식물 줄기로 아름다운 직물의류를 만들어 입었다.


흔히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넣은 나무껍질로 만든 옷이나 가죽으로 만든 늘어지는 옷을 입고 다녔다. 그들은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거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는 생활을 하다가 일본인들이 홋카이도로 이주해오면서 한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현재 그들 중의 다수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날품팔이로 생활하고 있다. 아이누인들의 전통 종교는 영적인 존재가 그 고장의 자연에 깃들여 있다는 신념이었다. 아이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는 신에게 곰을 바치는 제사를 들 수 있다.



아이누족이 해마다 거행하는 ‘신에게 곰을 바치는 제사 의식’
아이누들은 스스로를 곰의 힘과 독수리의 영혼을 지녔다고 믿었다.


이들 아이누 부족은 오키나와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 이후 대동아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강제 편입되었다. 현재는 일본화되어 그들도 대부분 일본어를 쓰지만, 러시아쪽은 아이누문화가 보존되어 아이누어가 쓰이고 일부 러시아화된 아이누족은 러시아어를 쓴다. 종교로는 샤머니즘이 대다수이고, 러시아쪽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약간의 아이누족이 있다.

http://blog.empas.com/inter999/9603012




러-일 분쟁의 결과물 - ‘시모다 조약'

아이누족의 거주지 – 양분하여 갖기로



도호쿠 아이누의 고향, 도호쿠 정경.



國勢에 따라 임자 바뀐 비운의 섬

쿠릴열도의 일부인 4개 섬은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이다. 홋카이도에서 구나시리가 가장 가깝고 에토로후가 제일 멀다. 총 면적은 5036km²로 오키나와의 약 4배. 러시아 사할린주가 관할하며 인구는 1만9000여명이다.

이 곳의 분쟁은 제정 러시아가 19세기 초 사할린과 쿠릴 열도까지 남하했을 때 촉발됐다. 결국 제정 러시아와 일본은 1855년 시모다 조약을 맺고 4개 섬은 일본령으로, 나머지 쿠릴열도는 러시아령으로, 사할린은 양국이 공유하기로 했다.



러일전쟁 당시 해전장면을 그린 일본의 기록화.


이 약속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제정 러시아는 1875년 군사력을 동원해 사할린을 모두 차지하는 대신 쿠릴열도를 일본에 내줬다.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다시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할린을 빼앗았다.


냉전시대에 키운 불신과 반발의 덫

소련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인정하겠다는 미국과 영국의 제의를 받고 종전 직전 사할린과 쿠릴열도 전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이 지역을 소련 영토라고 추인하지 않았다. 거기엔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 일본 외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은 평화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 섬을 양도할 의사를 내비친 적이 있다. 이번에도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일본이 소련의 제의를 수용하면 오키나와를 병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1960년 미-일 신안보조약과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은 소련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 소련은 1978년 “4개 섬은 소련영토이므로 일본에 인도할 수 없다”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경제협력을 위한 미끼로 활용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은 일본의 경제지원을 얻기 위해 “영토문제는 해결돼야 한다”는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일본도 대화에 나서 1991년 고르바초프의 일본 방문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 Mikhail Gorbachov.


이후 옐친은 일본의 대규모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4개 섬의 단계적 반환이라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푸틴도 2001년 러-일 정상회담에서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 섬의 우선 인도를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파고는 쉬 잠잠해질 것 같지 않다. 세계 3대 어장의 하나인 4개 섬 주변엔 막대한 해저광물과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들 섬과 사할린주 주민들은 “분리독립 불사”까지 외치며 반환을 극력 반대하고 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f=jis&n=200409160456




북방 영토의 분쟁은 ‘도둑놈의 장물 싸움’



아이누족이 빼앗긴 땅, ‘홋카이도’ 설경.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라 할까? 일본에 대해서는 별다른 전문적 정보를 갖지 못했던 다수의 옛 소련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대단히 친절한 ‘예의의 민족’으로 상상해왔다. 나도 그러한 환상을 공유해왔는데, 1991년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어 일본인을 평생 처음으로 대면하게 됐을 때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와 한국어를 같이 공부하게 된 한 일본 남학생이, 인사를 나눈 직후에 소련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나에게 양손을 내밀어 “북방 영토를 돌려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연발했다.

일개 개인인 나와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물었지만 그는 별로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같은 말을 했다. 그 당시 소련 일반인들의 대다수는 그 분쟁의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일본 ‘국민’의 집단 무의식에 ‘국민적 의무로서 실지 회복’이 얼마나 강하게 각인돼 있었는지를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일본공산당 강령도 ‘국민화'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구성원들을 획일적인 ‘국민’으로 통합하는 데 ‘영토 문제’ 이상의 묘책이 없다. 특히 분쟁 대상이 된 영토의 영유권이 충분히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있는데다 역사적인 피해 기억들과 겹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국 입장에서 본 독도 문제처럼 일본 입장에서 본 ‘북방 영토’ 문제도 그렇다. 1855년 최초의 러-일 통상 조약(이른바 시모다 조약)에 따라서 쿠릴 열도 남쪽 네 개의 섬이 일본의 영토로 확정된 이래 1945년까지 이 섬들에 대해서 러시아가 어떤 영유권 주장도 한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고, 1945년 패전 때에 홋카이도의 북부까지 점령하려다 미국의 반대에 부딪친 소련이 이 네 개의 섬을 군사력으로 무단 점령해 1만7천 명 정도의 일본 주민들을 꽤나 가혹하게 쫓아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소련측 영토, 사할린 (Sakhalin) 섬.


상당한 국제법적인 근거에다 이와 같은 상처의 기억까지 가미되기에 일본에서 북방 영토 문제는 한국 내에서 독도 문제가 갖는 ‘국민화(化)’의 효과를 가진다. 역사적으로 소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공산당의 강령에서까지도 북방 네 개의 섬은 물론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북방 영토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소련의 괴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돼 있었던 공산당으로서는 ‘국민적 의무’에 대한 과잉 충성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산당 계열이 아닌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북방 영토 문제에서는 ‘국민’의 논리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

러시아 안의 일부 일본 관련 전문가들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북방 4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주장에 이 정도의 근거가 갖추어 있다면 과연 이 주장을 둘러싼 ‘총국민적 단결’에 무엇이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와 주요 보수 매체에 의해서 정형화돼 표현되는 이 영유권 주장의 초점은, 상당수가 기층 민중인 쿠릴 열도 남부의 일본 실향민의 비극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가해자 러시아’와 ‘피해자 일본’ 간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1945년에 북방 영토를 무단 점령한 악당 일색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일본은 ‘선의의 피해자’로 묘사돼 있다.



러시아 해군이 주둔하는 쿠릴열도 북방섬.


그런데 1980년대 말까지 거의 1만 명 가까운 소련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그 네 개의 섬에 있는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가지도 못했던 실향민들은 피해자일는지 몰라도, 보수 집단이 통치해온 전후의 일본 국가를 ‘피해자’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뒤에 대일 관계를 우호적으로 전환해보려 했던 소련은, 1955~56년의 협상에서 네 개의 섬 중에서 두 개, 즉 일본 본토에 가장 가까운 하보마이(齒舞) 제도와 그 바로 위의 시코탄(色丹島)을 반환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스즈키의 부패 스캔들은 우연일까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일단 평화조약을 맺은 뒤 나머지 두 섬을 나중에 우호관계를 전개해가면서 어떻게든 돌려받을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에 미국이 갑자기 개입해 일본이 섬 두 개만 반환받아 쿠릴 영토 전체에 대한 소련의 원칙적인 영토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을 경우 오키나와를 영구히 돌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냉전에서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소-일 관계에서 영토 문제라는 ‘불씨’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을 지배해온 보수적인 관료 엘리트는, 미국에 대한 맹종을 선택해 ‘대소 우호관계 전개 속에서의 영토 문제 해결’ 방안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사할린 자원개발 프로젝트’


냉전 시절은 그렇다 치고, 러시아 쪽의 ‘하보마이-시코탄 우선 반환’ 제안을 암묵적으로 지지해 러시아 지일파 외교관·전문가 그룹과 매우 가까웠던 국회의원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가 2002년 갑자기 부패 스캔들의 희생자가 되고, 그의 책사 노릇을 맡아온 외무성의 러시아통 사토 마사루(佐藤優)가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 뿐인가?

미국과 일본의 친미극우파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의 화해보다 미해결의 ‘영토 문제’ 강조를 통한 민족주의적 긴장 유지가 훨씬 유리한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이 정치적 게임에서 상징물로 이용됐을 뿐이다. 일본 통치자들은 쿠릴 열도 실향민들의 피해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이용해 아시아 침략 시절 일본에 의한 가해의 기억을 일본인의 머릿속에서 계획적으로 희석시키는 측면도 충분히 감지된다.


아이누, 차별받는 소수 집단

이 분쟁에서 러-일 양쪽에서 무시돼온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쿠릴 열도를 러-일 양국의 상인·군인들이 침탈하기 이전에 이 땅은 아이누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1903년에 촬영한 아이누 가족의 사진.


‘쿠릴’이라는 지명 자체가 아이누어 ‘쿨’(사람)에서 나왔다. 아이누를 불평등 무역·징세를 통해 착취하는 데서는, 러시아인과 일본인 사이에 별 차별성이 없었다. 일본인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지만 에도시대 홋카이도 지방 정권인 마즈마에한(松前藩)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아이누 항쟁은 1789년 북방 4도 중 하나인 구나시리(國後)에서 터졌다.

만약 쿠릴 열도 역사 속에서 진정한 피해자를 찾자면 그것이 바로 러-일 양국의 식민주의적 침탈 속에서 쿠릴에서의 삶의 기반을 잃고 홋카이도에서는 차별받는 소수 집단으로만 남아 있는 아이누들이다.



고기잡이와 사냥은 아이누들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러-일 양국의 북방 영토 분쟁은 결국 힘이 센 도둑 사이의 장물 분배에 대한 실랑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북방 영토에 아이누족의 자치지구를 만들어 유엔이나 러-일 양국의 공동 감독·보호하에 두어달라는 1992년부터의 홋카이도 아이누 단체들의 탄원서들은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니누 권익 침해의 사실을 인정한다면 양쪽에서 ‘고유 영토’ 주장을 할 여지가 더 이상 남지 않기 때문이다.

북방 4도의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땅에서, 아이누·일본·러시아 민중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서 영토 문제를 ‘국민적 단결’의 도구로 삼아 피착취 계급을 ‘애국적으로’ 우민화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남아 있는 한 화해·평화·공존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6/11/021109000200611100634077.html
2012-11-11 : 일제피해자 아이누 :
« next   prev »

검색 메뉴

블로그친구 신청 메뉴

블로그친구신청.

카운터

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

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FC2無料カウンター

QR코드

Q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