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반한감정의 원인이 단교라고?
- 출처
아직도 대만의 반한감정의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를 위한 대만과의 단교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대만인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본은 우리보다 무려 20년 전인 1972년에 일찌감치 단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반한 행각은 이미 1992년 이전부터 현저했습니다. 1988. 11. 5.자 동아일보 기사를 볼까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 대만 방송들은 난지도와 재개발구역, 뒷골목 등을 집중적으로 촬영하며 이런 쓰레기 같은 못사는 나라에서 무슨 올림픽이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못사는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점에 대한 질투심이 반한감정의 시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교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한 이해가 없으니 한 네티즌이 올려놓으신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제가 일일이 사실 확인을 하진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국은 당시 수교협상 중인 중국에 온갖 핑계를 대며 대만 대사관의 철수를 늦춰주어 외교관의 편의를 최대한 반영해주었고 귀국 비행기편도 별도로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만 대사관 주재원들은 계속 버티며 대사관에서 나가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몇가지의 보복조치도 대만측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합니다. 자동차쿼터 수입 중단, 과일수입 중단, 대만내 개발계획에 한국 참여 중단 등. 한국은 결국 2달 동안 대사관을 비울 것을 수차례 요구했고, 대만 대사관 주재원들이 버티자 10월에 외교부에서 철거조치 단행을 통보합니다. 이때 떼로 몰려온 대만 언론 등이 대사관에서 쫓겨나는 자국 외교관의 눈물, 대만기 하강식 등을 선정적으로 앞다퉈 대만에 송출합니다. 특히 대만 언론들은 한국이 단교 직전 수교 지속을 대가로 한국산 자동차 5만대를 강매했다는 등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한국을 맹비난하였습니다. 프랑스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사관에서 대만 외교부 직원들을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철수시키고, 일본에서는 철수 시한을 달랑 1주일 주고 그 후에는 물과 전기까지 끊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공손했던 한국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한국의 단교에 뒤집어 씌우는 대만인들의 얕은 변명으로는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정한 원인을 다음 순서대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맹목적인 친일주의
- 중화주의와 패배의식의 결합
- 한풍공작(韓風工作): 정치적인 악용
1. 맹목적인 친일주의
대만은 우리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극단적인 친일 성향을 보이는 나라입니다. 대만에서 설문조사를 하면 예외 없이 한국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일본이 가장 좋아하는 국가로 나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또한 대만입니다. 일본 또한 대만인들의 친일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방송을 하며 "일본과 대만은 일심동체"라며 좋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2006. 2. 4. 아소 다로 일본 외무장관은 "대만의 높은 교육수준은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이라는 망언을 했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에 즉각적으로 강력 비판하였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대만은? 뤼칭룽 대만 외교부 보도관(대변인)은 2006. 2. 5.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에 대만이 근대화된 것은 사실", "일본 외무장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라고 답했으며, 황쯔팡 외교부장(장관급)은 2006. 2. 6. "이 문제로 일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라고 답해서 중국 외교부를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대만 텔레비전인 TVBS도 "(아소 다로가) 반중국, 친대만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며 아소 다로를 두둔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6. 2. 7.자 기사: 클릭)
이러한 대만의 엽기적인 친일 행각은 마침내 2007. 6. 7. 리덩훼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세계 역사상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지도자가 (비록 임기 종료 후라 하더라도) 침략자의 묘소에 참배를 하는 것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동일자 경향신문 기사: 클릭)
리덩훼이는 위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만 침략의 원흉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고토 신페이상"을 수상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전직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상을 받고 오는 격으로서 과연 어디까지가 막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가늠키도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러한 극단을 넘어 엽기 수준에 이르고 있는 친일주의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준하는 사회병리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좀더 분석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이하는 오마이뉴스 2006. 2. 7.자 기사를 편집, 인용: 클릭)
(1)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은 1895년 이후 대만 저항세력을 철저히 '분쇄'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을 침탈한 일본은 대만이번(臺灣理蕃, 1896~1915년)이라는 '토벌'작전을 통해 저항세력을 철저히 '분쇄'했습니다. 이처럼, 저항세력이 식민통치 초기에 사실상 완전 '분쇄'되었다는 점이 대만인들의 대일 비판정신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2) 장제스 국민당정권이 대만 국민들의 친일 성향에 한몫을 하였습니다. 1949년 공산당 군대에 패해 대만으로 도피한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친일 노선을 지향함에 따라, 일제 패망 이후 대만인들은 친일을 제대로 청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국민당의 부패와 독재, 무자비한 원주민 학살(2·28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은 대만인들로 하여금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근거 없는 향수를 가지게 하는 계가가 되었습니다.
(3) 중국 본토에 대한 반발심리가 대만인들의 친일 성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특히 '탈중국화' 노선을 걷고 있는 민진당은 중국과의 대결구도를 위해 의식적으로 친일 노선을 걸었습니다.
(4) 아직까지도 대만 고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대만인들은 스페인·네덜란드·중국·일본 등 외부의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친일주의를 가진 대만인들이 능숙한 일본어를 통해 일본 인터넷의 혐한들이 생산해 낸 각종 날조 자료들을 대만 인터넷에 유입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대만의 반한감정이 확산된 측면이 큽니다. 또한 대만인들은 한국의 반일주의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고 한일간의 민감한 쟁점에 대해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반한감정의 또다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여러분이 위에서 설명드린 바를 여실히 실감하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일본 혐한의 본거지인 2ch에서는 이번 태권도 사태를 보면서 대만을 지지하며 환호를 했는데, 한 대만인이 능숙한 일본어로 2ch에 올려놓은 글이 있습니다.
2. 중화주의와 패배의식의 결합
대만의 중화주의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륙의 중화주의는 소수민족의 동화를 위한 중화민족이라는 임시방편적 개념 위에 쌓아올린 변형 민족주의로 그 개념상의 모순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대만의 중화주의는 섬의 지배자로서의 한족을 정점으로 한 순혈민족주의의 양상을 띄기 때문에 대륙 이상으로 강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시간에는 한국이나 베트남을 중화의 속국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자신들이 중화의 적통이라 자부하기에 한국인에 대해서는 묘한 역사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전쟁의 상처에 허덕이며 뒤떨어져 있었던 시절, 대만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호황을 달리던 일본 기업의 부품 하청기지 역할을 하며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일본 다음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들이 돋보이기 위한 비교 상대로 늘 한국이 거론되었습니다. TV프로그램에서는 한국에 가서 대만인이라고 하면 대접받는다, 한국 여자들은 대만 남자라고 하면 까무러친다, 이런 유치한 이야기들을 방영하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마침내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자 대만인들은 낙후된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위 동아일보 신문기사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대만 아나운서는 개막식 중계방송에서 "아 대만보다 국민소득도 떨어지는 한국에서 올림픽이 웬 말이냐"라고 발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만의 한국 흠집내기가 시작된 것도 그 즈음입니다. 올림픽 후에 한국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미인대회에서도 많이 입상하고 그랬는데, 그 때부터 대만 언론에서 한국의 미인은 전부 성형미인이라는 기사를 뿌려대기 시작합니다. 현재 한국이 성형대국이라고 불리게 된 장본인이 바로 대만 언론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 페이지에서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울러 1992년 단교를 하게 되고, 이어 한국이 대기업과 중공업을 기반으로 일본 하청 의존적인 대만 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하자 아직은 대만이 위라는 식으로 자위하는 기사를 냅니다. 그리고 199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엄청나게 한국을 비웃습니다.
그 이후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입니다. 인터넷에 이와 관련된 분석이 아주 많으므로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한국은 금융위기를 딛고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있어 모두 대만을 앞지르게 되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대만은 한국이 대만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모두 파렴치한 부정행위와 반칙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현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한류 문화는 성형이라는 반칙, 2002년 월드컵 4강은 심판 매수, 경제성장 또한 더러운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기 나라 내에서만 소비하지 않고 중국 인터넷에 끊임없이 유포하며 반한감정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른 페이지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한풍공작(韓風工作) - 정치적인 악용
선거철마다 우리에게 북풍이 있다면 대만에는 늘 한풍이 있습니다. 적대국인 중국을 이용하지 않고 한국을 이용하는 이유는 중국은 두렵지만 한국은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력, 외교력, 국방력, 인지도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을 가진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이유는 우리가 늘 아무 대응도 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태권도 사건만큼이나 대만 정치권의 수준과 반한정서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건도 없습니다. 반한감정에 불을 지른 자들은 모두 11. 27.자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예컨대 반한감정 폭발의 도화선이 된 태극기 화형식 영상을 살펴보면
오른쪽 위에 보이시죠? "기호 8번 영원히 황씨린과 함께". 자막에 써있듯이 이 자는 신민당 시의원 후보자입니다. 군소정당 후보의 얄팍한 선거 유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집권 국민당은 좀 나을까요? 마잉주 총통부터 주최측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방방떴고 차관급인 체육위원회 천셴쭝 부주임위원은 실격패 사건 당일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19일 밤 사임해야 했습니다. 해프닝은 계속 이어져 11. 21.에는 집권 국민당 소속 타이베이 시의원들이 태권도복 차림으로 대중유세에 나서고
주요 일간지에는 11. 22. "민진당 후보들은 2005~2006년 여당 시절 행정원을 이끌면서 단 한번도 대만 선수들이 수난을 당할 때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정치광고를 냈습니다(중앙일보 기사).
조폭의 장례식에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정도로 낙후된 대만 정치, 이런 사례는 너무 많으니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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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인들도 실은 단교가 반한감정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인 스스로가 우리는 어버이 국가인 일본에 도전하는 너희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너희가 싫은 것이다, 이렇게 본심을 드러내기도 어려운 법, 결국 대만인들은 한국을 욕하고 싫어하기 위한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 블로그 중 "공자는 한국인이다? - 대만의 한국기원론 공정", "한류 축출을 위한 대만의 성형공정", "스포츠 중상모략의 고단한 역사"는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아직도 대만의 반한감정의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를 위한 대만과의 단교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대만인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본은 우리보다 무려 20년 전인 1972년에 일찌감치 단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반한 행각은 이미 1992년 이전부터 현저했습니다. 1988. 11. 5.자 동아일보 기사를 볼까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 대만 방송들은 난지도와 재개발구역, 뒷골목 등을 집중적으로 촬영하며 이런 쓰레기 같은 못사는 나라에서 무슨 올림픽이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못사는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점에 대한 질투심이 반한감정의 시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교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한 이해가 없으니 한 네티즌이 올려놓으신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제가 일일이 사실 확인을 하진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국은 당시 수교협상 중인 중국에 온갖 핑계를 대며 대만 대사관의 철수를 늦춰주어 외교관의 편의를 최대한 반영해주었고 귀국 비행기편도 별도로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만 대사관 주재원들은 계속 버티며 대사관에서 나가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몇가지의 보복조치도 대만측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합니다. 자동차쿼터 수입 중단, 과일수입 중단, 대만내 개발계획에 한국 참여 중단 등. 한국은 결국 2달 동안 대사관을 비울 것을 수차례 요구했고, 대만 대사관 주재원들이 버티자 10월에 외교부에서 철거조치 단행을 통보합니다. 이때 떼로 몰려온 대만 언론 등이 대사관에서 쫓겨나는 자국 외교관의 눈물, 대만기 하강식 등을 선정적으로 앞다퉈 대만에 송출합니다. 특히 대만 언론들은 한국이 단교 직전 수교 지속을 대가로 한국산 자동차 5만대를 강매했다는 등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한국을 맹비난하였습니다. 프랑스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사관에서 대만 외교부 직원들을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철수시키고, 일본에서는 철수 시한을 달랑 1주일 주고 그 후에는 물과 전기까지 끊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공손했던 한국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한국의 단교에 뒤집어 씌우는 대만인들의 얕은 변명으로는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정한 원인을 다음 순서대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맹목적인 친일주의
- 중화주의와 패배의식의 결합
- 한풍공작(韓風工作): 정치적인 악용
1. 맹목적인 친일주의
대만은 우리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극단적인 친일 성향을 보이는 나라입니다. 대만에서 설문조사를 하면 예외 없이 한국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일본이 가장 좋아하는 국가로 나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또한 대만입니다. 일본 또한 대만인들의 친일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방송을 하며 "일본과 대만은 일심동체"라며 좋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2006. 2. 4. 아소 다로 일본 외무장관은 "대만의 높은 교육수준은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이라는 망언을 했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에 즉각적으로 강력 비판하였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대만은? 뤼칭룽 대만 외교부 보도관(대변인)은 2006. 2. 5.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에 대만이 근대화된 것은 사실", "일본 외무장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라고 답했으며, 황쯔팡 외교부장(장관급)은 2006. 2. 6. "이 문제로 일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라고 답해서 중국 외교부를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대만 텔레비전인 TVBS도 "(아소 다로가) 반중국, 친대만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며 아소 다로를 두둔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6. 2. 7.자 기사: 클릭)
이러한 대만의 엽기적인 친일 행각은 마침내 2007. 6. 7. 리덩훼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세계 역사상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지도자가 (비록 임기 종료 후라 하더라도) 침략자의 묘소에 참배를 하는 것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동일자 경향신문 기사: 클릭)
리덩훼이는 위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만 침략의 원흉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고토 신페이상"을 수상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전직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상을 받고 오는 격으로서 과연 어디까지가 막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가늠키도 어려운 대목입니다.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을 지냈으며, 초기 대만 식민 통치시절 수많은 대만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선 고토 신페이
이러한 극단을 넘어 엽기 수준에 이르고 있는 친일주의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준하는 사회병리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좀더 분석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이하는 오마이뉴스 2006. 2. 7.자 기사를 편집, 인용: 클릭)
(1)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은 1895년 이후 대만 저항세력을 철저히 '분쇄'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을 침탈한 일본은 대만이번(臺灣理蕃, 1896~1915년)이라는 '토벌'작전을 통해 저항세력을 철저히 '분쇄'했습니다. 이처럼, 저항세력이 식민통치 초기에 사실상 완전 '분쇄'되었다는 점이 대만인들의 대일 비판정신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2) 장제스 국민당정권이 대만 국민들의 친일 성향에 한몫을 하였습니다. 1949년 공산당 군대에 패해 대만으로 도피한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친일 노선을 지향함에 따라, 일제 패망 이후 대만인들은 친일을 제대로 청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국민당의 부패와 독재, 무자비한 원주민 학살(2·28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은 대만인들로 하여금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근거 없는 향수를 가지게 하는 계가가 되었습니다.
(3) 중국 본토에 대한 반발심리가 대만인들의 친일 성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특히 '탈중국화' 노선을 걷고 있는 민진당은 중국과의 대결구도를 위해 의식적으로 친일 노선을 걸었습니다.
(4) 아직까지도 대만 고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대만인들은 스페인·네덜란드·중국·일본 등 외부의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친일주의를 가진 대만인들이 능숙한 일본어를 통해 일본 인터넷의 혐한들이 생산해 낸 각종 날조 자료들을 대만 인터넷에 유입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대만의 반한감정이 확산된 측면이 큽니다. 또한 대만인들은 한국의 반일주의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고 한일간의 민감한 쟁점에 대해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반한감정의 또다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여러분이 위에서 설명드린 바를 여실히 실감하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일본 혐한의 본거지인 2ch에서는 이번 태권도 사태를 보면서 대만을 지지하며 환호를 했는데, 한 대만인이 능숙한 일본어로 2ch에 올려놓은 글이 있습니다.
2. 중화주의와 패배의식의 결합
대만의 중화주의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륙의 중화주의는 소수민족의 동화를 위한 중화민족이라는 임시방편적 개념 위에 쌓아올린 변형 민족주의로 그 개념상의 모순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대만의 중화주의는 섬의 지배자로서의 한족을 정점으로 한 순혈민족주의의 양상을 띄기 때문에 대륙 이상으로 강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시간에는 한국이나 베트남을 중화의 속국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자신들이 중화의 적통이라 자부하기에 한국인에 대해서는 묘한 역사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전쟁의 상처에 허덕이며 뒤떨어져 있었던 시절, 대만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호황을 달리던 일본 기업의 부품 하청기지 역할을 하며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일본 다음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들이 돋보이기 위한 비교 상대로 늘 한국이 거론되었습니다. TV프로그램에서는 한국에 가서 대만인이라고 하면 대접받는다, 한국 여자들은 대만 남자라고 하면 까무러친다, 이런 유치한 이야기들을 방영하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마침내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자 대만인들은 낙후된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위 동아일보 신문기사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대만 아나운서는 개막식 중계방송에서 "아 대만보다 국민소득도 떨어지는 한국에서 올림픽이 웬 말이냐"라고 발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만의 한국 흠집내기가 시작된 것도 그 즈음입니다. 올림픽 후에 한국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미인대회에서도 많이 입상하고 그랬는데, 그 때부터 대만 언론에서 한국의 미인은 전부 성형미인이라는 기사를 뿌려대기 시작합니다. 현재 한국이 성형대국이라고 불리게 된 장본인이 바로 대만 언론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 페이지에서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울러 1992년 단교를 하게 되고, 이어 한국이 대기업과 중공업을 기반으로 일본 하청 의존적인 대만 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하자 아직은 대만이 위라는 식으로 자위하는 기사를 냅니다. 그리고 199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엄청나게 한국을 비웃습니다.
그 이후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입니다. 인터넷에 이와 관련된 분석이 아주 많으므로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한국은 금융위기를 딛고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있어 모두 대만을 앞지르게 되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대만은 한국이 대만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모두 파렴치한 부정행위와 반칙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현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한류 문화는 성형이라는 반칙, 2002년 월드컵 4강은 심판 매수, 경제성장 또한 더러운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기 나라 내에서만 소비하지 않고 중국 인터넷에 끊임없이 유포하며 반한감정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른 페이지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한풍공작(韓風工作) - 정치적인 악용
선거철마다 우리에게 북풍이 있다면 대만에는 늘 한풍이 있습니다. 적대국인 중국을 이용하지 않고 한국을 이용하는 이유는 중국은 두렵지만 한국은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력, 외교력, 국방력, 인지도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을 가진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이유는 우리가 늘 아무 대응도 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태권도 사건만큼이나 대만 정치권의 수준과 반한정서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건도 없습니다. 반한감정에 불을 지른 자들은 모두 11. 27.자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예컨대 반한감정 폭발의 도화선이 된 태극기 화형식 영상을 살펴보면
오른쪽 위에 보이시죠? "기호 8번 영원히 황씨린과 함께". 자막에 써있듯이 이 자는 신민당 시의원 후보자입니다. 군소정당 후보의 얄팍한 선거 유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집권 국민당은 좀 나을까요? 마잉주 총통부터 주최측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방방떴고 차관급인 체육위원회 천셴쭝 부주임위원은 실격패 사건 당일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19일 밤 사임해야 했습니다. 해프닝은 계속 이어져 11. 21.에는 집권 국민당 소속 타이베이 시의원들이 태권도복 차림으로 대중유세에 나서고
주요 일간지에는 11. 22. "민진당 후보들은 2005~2006년 여당 시절 행정원을 이끌면서 단 한번도 대만 선수들이 수난을 당할 때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정치광고를 냈습니다(중앙일보 기사).
조폭의 장례식에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정도로 낙후된 대만 정치, 이런 사례는 너무 많으니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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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인들도 실은 단교가 반한감정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인 스스로가 우리는 어버이 국가인 일본에 도전하는 너희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너희가 싫은 것이다, 이렇게 본심을 드러내기도 어려운 법, 결국 대만인들은 한국을 욕하고 싫어하기 위한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 블로그 중 "공자는 한국인이다? - 대만의 한국기원론 공정", "한류 축출을 위한 대만의 성형공정", "스포츠 중상모략의 고단한 역사"는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