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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절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가 최초 발굴공개한자료 |
2월 26일, 91주년 31절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함경도지역 31운동 참여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검사의 기소 관련 기록 원본을 일본에서 입수하여 공개했다.
이 기록을 작성하고 소장했던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 1871~?)는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으로 1908년 12월 통감부 검사로 내한하여 의주구 재판소, 전주구 재판소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10년 강제병합 후에도 조선총독부 검사로 유임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과 군산지청 등에서 근무했다.
주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호남에서 재직하여 의병 탄압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함흥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함경도 일대의 항일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고 기소하는 책임을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용 미농지에 세필 붓과 펜과 연필 등으로 빼곡하게 적은 이 기록은 기소를 위한 준비 자료로 보인다.
▲ 이시카와 검사가소장했던 대정8년보안법사건 문서의 표지 |
서두에는 ▲(사건)번호▲죄명▲피고(이름과 수)▲(수록)페이지 등이 기록된 목록이 있다.
목록에는 ▲193(호) ▲ 보안법 출판법 위반 ▲ 이근재(李根栽) 외 40명 ▲1(쪽)"부터 "709(호) ▲보안법 출판법 위반 ▲ 이구준(李求準) 외 3명 ▲ 224(쪽)까지 총 115개 사건 항목이 13쪽에 걸쳐 적혀 있다. 함흥지방법원 관할 지역인 함경도 일대에서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목록 바로 뒤부터는 순서대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분량은 무려 448쪽에 달한다. 이들의 죄명은 보안법 위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 보안법 위반이 대부분이고 훼기(毁棄)와 상해도 1건씩 포함되어 있다. 출판법 위반은 <3.1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한 경우에 해당된다.
자료는 치열했던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압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이시카와 검사 명의로 함흥지방법원에 제출한 이근재 외 40명에 대한 1919년 3월 24일자 공판청구서와 공소사실 등이다. 죄명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이다.
함흥 영생학교 교사이자 중하리 교회 교인이었던 이근재는 그 지역을 찾아온 평양 숭실학교 교사 강봉우로부터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발표 계획에 대해서 듣고, 같은 교회 교인인 재목상 한영호, 함흥 기독교청년회 서기 이순기, 전도사 조영신 등과 함께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조영신이 3월 1일 원산에 가서 독립선언문을 구해와 선언문을 등사하고,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3일 새벽부터 대규모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이근재, 조영신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한명환, 이봉선 등 학생 지도자들이 구속되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예정대로 만세시위는 계속되어 학생과 시민 1천여 명이 연일 거리를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총칼과 소방용 갈고리까지 휘둘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맥래(Duncan M. MacRae)가 이 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함흥 경찰서장을 찾아가 폭거에 항의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 사건번호와 사건명, 주동자 이름 등이 적힌 목록 |
당시 함흥지방재판소 검사로 있던 이시카와가 1919년 3월 24일 이 사건의 주동자로 이근재, 조영신 등 40명을 기소하였으며, 4월 21일 1심에서 이근재는 2년, 조영신은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7월 3일 2심에서도 이근재 징역 2년, 한영호, 조영신 등 4명 징역 1년 6개월, 조동훈, 이영화 등 4명 징역 1년, 김중석, 최영학 등 11명 징역 8개월, 한명환, 이봉선 등 15명은 태 90을 선고 받고, 김광표, 이진영 등 3명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같은 해 9월 기각되었다.
그 가운데 조영신은 함흥경찰서에서 받은 고문과 구타로 늑막염에 걸려 복역 10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지 1주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자료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구준(李求準) 등의 사건은 함경남도 북청 지역에서 있었던 반일 격문 인쇄 배포와 면사무소 방화 사건이다.
1919년 3월 말경 이구준과 고명철(高明哲)은 주병해(朱秉海)와 한탁렬(韓鐸烈) 등 동지를 포섭하여 고명철이 근무하고 있던 사립 평산보통학교 숙직실에 모여 납세거부 일본식 연호 사용 거부 한인 관공리 퇴직 권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격문 전단을 등사하여 조선독립단 이름으로 배포했다.
5월 5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대한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각지 유지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5월 8일 새벽에 석유통을 가지고 평산면사무소에 들어가 방화하고, 가회면사무소에도 불을 질렀으나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로 함흥지방법원에서 1919년 8월 12일 4명 모두 징역 4년의 유죄판결을 받았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1월 7일 역시 유죄판결을 받아,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12월 4일 기각되었다. 이들은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 수형자 중 가장 가혹한 형량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 이 기소 준비 자료는 일선 일본인 검사가 작성한 상세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대응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특히 재판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북한 지역에 관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희소성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면, 함흥지방법원에서만 재판을 받고 복심법원에 항소하지 않은 함경도 일대의 31운동 주동자들과 투쟁 양상을 밝힐 수 있음은 물론, 지역사의 관점에서 지방의 31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지방의 3.1운동이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평화적 시위 외에도 지하조직 결성 지하신문 발간 관공서 방화 납세거부 연호 사용 거부 관공리 퇴직권고 등 타협 비타협적 투쟁방식이 배합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연구소측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자료에는 주동자 외에도 적극 관여자, 그리고 검사가 기소하지 않았던 다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수록된 115건의 주동자 가운데서도 24명만이 국가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강남섭(姜南燮)'의 경우, 함경남도 홍원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홍원군의 삼일운동을 이끌었으나, 관계자 강인택(姜仁澤)이 2009년 애족장을 받은 반면, 강남섭은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이번에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통해 추가 서훈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또 이 자료 속에서 3.1독립선언서 원본도 나왔는데, 보성사에서 인쇄한 2만 1천장 가운데 한 장이다. 선언서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 선언서는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에 전달되었는데 함경도 지역 3.1운동 현장에서 일제 순사가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보성사가 인쇄한 원본 선언서는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되어 있는데 유일하게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함경도 일대 삼일운동 현장에서 일제 순사가 습득한 삼일독립선언서 원본.. |
이번 자료 발굴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배포되었음을 입증하게 된 것도 이번 자료 발굴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 자료와 함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재직시 그가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통감부재판소 사법사건 취급령>,<한국형법대전 개정초안>,<태형령(제령안), 태형령시행규칙(부령안)>등도 공개했다.
태형령과 태형령 시행규칙은 1912년 3월에 발포되었으므로, 이들 자료들은 그 이전에 작성된 문서이며, 일제가 이러한 악법들을 제정발포하면서 일선 검사들에게까지 극비리에 검토케 하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적인 악법인 태형령은 일제의 무자비한 31운동 탄압에 대한 선교사들의 비난과 국제적인 여론 악화로 1920년 3월에 폐지되었다
덧글
어느 가난한 홀아비 무사(武士)가 떡장수네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떡집에 가서 놀던 무사의 어린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떡장수는 무사에게 떡값을 내라고 다그쳤다. 무사는 떡장수에게,
"내 아들은 굶어죽을지언정 떡을 훔쳐먹을 짓은 절대로 할 아이가 아니오."
하고 말했다. 그래도 떡장수는,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먹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라고 하며 빨리 돈을 지불하라고 계속 따지자 무사는 순간적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자 다짜고짜로 아들을 쓰러뜨리고는 아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지 않았음을 백일하에 입증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떡장수를
핏발 선 증오의 눈초리로 잔뜩 노려보던 무사는
살려달라고 빌고있는 그에게 달겨들어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다.
떡장수의 목이 땅바닥에 수박덩이모양 구르는 것을 지켜본 순간
무사는 정좌하고 앉은 채 두 사람을 죽인 그 칼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에 한일자를 북 그어버렸다.
2. 조선시대 성리학자 윤상(尹詳)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중에서
길가던 나그네가 어느 집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나그네는 숭늉을 마시고 무심코 밖을 내다 보았다.
주인 집 사내 아이가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렸다.
마침 이것을 지켜보던 거위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그 구슬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에 그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가보(家寶)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구슬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온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 뒤져도 구슬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은 식객으로 묵고 있는 나그네에게 도둑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나그네는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는 결박을 당하여 사랑채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을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난 나그네는 다음날 관가로 끌려가지 직전에 주인에게 거위의 똥을 잘 살펴보라고 일렀다.
잃었던 구슬은 거위의 똥 속에서 나왔다. 주인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거위가 구슬을 삼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얘기를 않고 밤새 고생을 했소?"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그 사실을 밝혔더라면 당신은 급한 김에 그 자리에서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게 아니오.
내가 하룻밤 고생한 덕으로 거위는 목숨을 건졌고 당신은 구슬을 찾게되지 않았소?"
한국과 일본의 생명에 대한 인식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