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관동대지진때 한인 6천명 학살”
경향신문 | 입력 2005.09.25 17:42
일본 시가현립대 강덕상 명예교수(73)는 강재언, 이진희, 박경식, 박종근 등과 함께 재일사학자의 1세대에 속한다. 강교수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 수집·편찬자로 더 유명하다. 그가 펴낸 '현대사 자료'(전7권·미스즈서방)는 '강덕상 자료집'으로 불리며 독립운동 연구에 기초사료가 되고 있다.
한국민족운동이 전공인 강교수는 연구자로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1923년 관동대학살을 분석한 '관동대진재', 안중근·홍범도등 주요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조선독립운동의 군상', 친일파를 연구한 '조선인 학도 출진', 그리고 최근작 '여운형평전' 등이 그것이다. 이중 '관동대진재'는 그의 대표작이다. 1975년 초판이 발간되고 2003년 개정판이 나온 이 책이 비로소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김동수·박수철 공역, 역사비평사)이라는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지난 20일 방한한 강교수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만났다.
-어떻게 관동대지진 사건을 연구하게 됐나.
"일제시대 자료 연구·분석에 한창이던 1962년께 일본 국회도서관으로부터 미국에서 '반환문서'가 도착했다면 조사를 요청받았다. 이 가운데에는 관동대지진 관련 자료가 적지 않았는데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 '관동대진재와 조선인'(1963)이라는 자료집을 냈다. 이후 이들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1975년에 출간된 단행본 '관동대진재'(중앙공론사)는 이러한 연구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책이다. "
-'관동대진재'가 관동대지진에 대한 첫 단행본이라 하는데, 선행 연구는 없었나.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연구는 해방 이후에야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연구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피살 등 자국민들의 피해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1959년에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소요'라는 조선인 학살을 다룬 논문이 나왔으나 학살 원인을 조선인의 폭동·소요에 돌렸다. 또 조선인 학살을 일본 사회주의자 살해사건과 비슷한 무게로 다루고 있다. 일본인 10여명이 죽은 사건과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해된 사건이 어떻게 함께 다뤄질 수 있는가."
-단행본 발간 이후 일본내의 반응은.
"75년 처음 책이 나왔을때 일본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사히, 마이니치 등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서평을 다루며 "이제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났다. 일본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때부터 관동대지진에 관한 증언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학계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학살'(야마다 쇼지), '관동대진재와 계엄령'(마쓰오 쇼이치) 등이 일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관동대지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관동대지진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청산리전투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염려했다. 관동대학살은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식민지주의가 빚어낸 대참사다. 이는 3·1운동, 간도사변 당시 활동한 일본 군인·경찰들이 관동대지진 때 학살을 지휘한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들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자 조선인이 무엇을 하지 않을까 예단해 선제공격으로 대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시가전을 벌이며 6,000여명을 살해한 일은 전례가 없다."
-한국어 번역 출간이 30년 만에 이뤄진 까닭은.
"60~70년대 군사정권 때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학자들도 드러내놓고 일본 연구성과를 인용하지 못했다. 내 책을 인용하고도 '강덕상'이란 이름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간 관동대학살에 대한 무관심도 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 정부는 지금껏 일본 정부에 관동대학살에 대해 조사를 요구하거나 자료제출을 요구한 적이 없다. 최근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들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일본은 진실규명과 함께 사죄·배상해야 한다. 관동대학살은 한·일 양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한국민족운동이 전공인 강교수는 연구자로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1923년 관동대학살을 분석한 '관동대진재', 안중근·홍범도등 주요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조선독립운동의 군상', 친일파를 연구한 '조선인 학도 출진', 그리고 최근작 '여운형평전' 등이 그것이다. 이중 '관동대진재'는 그의 대표작이다. 1975년 초판이 발간되고 2003년 개정판이 나온 이 책이 비로소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김동수·박수철 공역, 역사비평사)이라는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지난 20일 방한한 강교수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만났다.
-어떻게 관동대지진 사건을 연구하게 됐나.
"일제시대 자료 연구·분석에 한창이던 1962년께 일본 국회도서관으로부터 미국에서 '반환문서'가 도착했다면 조사를 요청받았다. 이 가운데에는 관동대지진 관련 자료가 적지 않았는데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 '관동대진재와 조선인'(1963)이라는 자료집을 냈다. 이후 이들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1975년에 출간된 단행본 '관동대진재'(중앙공론사)는 이러한 연구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책이다. "
-'관동대진재'가 관동대지진에 대한 첫 단행본이라 하는데, 선행 연구는 없었나.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연구는 해방 이후에야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연구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피살 등 자국민들의 피해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1959년에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소요'라는 조선인 학살을 다룬 논문이 나왔으나 학살 원인을 조선인의 폭동·소요에 돌렸다. 또 조선인 학살을 일본 사회주의자 살해사건과 비슷한 무게로 다루고 있다. 일본인 10여명이 죽은 사건과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해된 사건이 어떻게 함께 다뤄질 수 있는가."
-단행본 발간 이후 일본내의 반응은.
"75년 처음 책이 나왔을때 일본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사히, 마이니치 등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서평을 다루며 "이제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났다. 일본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때부터 관동대지진에 관한 증언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학계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학살'(야마다 쇼지), '관동대진재와 계엄령'(마쓰오 쇼이치) 등이 일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관동대지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관동대지진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청산리전투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염려했다. 관동대학살은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식민지주의가 빚어낸 대참사다. 이는 3·1운동, 간도사변 당시 활동한 일본 군인·경찰들이 관동대지진 때 학살을 지휘한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들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자 조선인이 무엇을 하지 않을까 예단해 선제공격으로 대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시가전을 벌이며 6,000여명을 살해한 일은 전례가 없다."
-한국어 번역 출간이 30년 만에 이뤄진 까닭은.
"60~70년대 군사정권 때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학자들도 드러내놓고 일본 연구성과를 인용하지 못했다. 내 책을 인용하고도 '강덕상'이란 이름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간 관동대학살에 대한 무관심도 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 정부는 지금껏 일본 정부에 관동대학살에 대해 조사를 요구하거나 자료제출을 요구한 적이 없다. 최근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들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일본은 진실규명과 함께 사죄·배상해야 한다. 관동대학살은 한·일 양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사람의 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하여
주간경향 | 입력 2008.09.25 11:39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시즈오카, 야마나시, 이바라키의 1부 6현에 강도 7.9의 대진재가 일어났다. 화재도 일어나 사망자 9만9331명, 행방불명 4만3476명, 가옥 전괴 12만8266호, 반괴 12만6233호, 소실 44만7128호에 달했다. 극도로 혼란해진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 정부는 9월 2일 제국헌법 8조가 정하는 긴급칙령에 의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지진과 화재가 일어나는 와중에 약탈과 방화, 우물에 독극물을 넣는 등의 불령스러운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어 재난을 당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이것은 일본 정부의 매우 치밀한 계획 속에 펼쳐지게 될 대학살의 지침이었다. -2007년 9월 1일, 대한민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기홍 의원 기자회견 중에서 1923년 일본 정부는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 당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재일조선인 6661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 정부는 두 가지 사실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과 그후 조선을 넘어 중국·일본으로 번져가는 조선인의 해방운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가 일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 정부는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여 계엄령을 포고한 결과,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민족적 편견을 가진 일본 민중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학살에 합세했다.
그러나 조선인 폭동은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들에게 학살의 원인 제공자로 누명을 씌웠다. 한편, 한국 정부는 해방 후 63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를 향해 재일동포의 인권유린과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진상조사 요구도 하지 않았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카나가와, 치바, 사이타마,
그러나 조선인 폭동은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들에게 학살의 원인 제공자로 누명을 씌웠다. 한편, 한국 정부는 해방 후 63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를 향해 재일동포의 인권유린과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진상조사 요구도 하지 않았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카나가와, 치바, 사이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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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대학살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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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난한 홀아비 무사(武士)가 떡장수네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떡집에 가서 놀던 무사의 어린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떡장수는 무사에게 떡값을 내라고 다그쳤다. 무사는 떡장수에게,
"내 아들은 굶어죽을지언정 떡을 훔쳐먹을 짓은 절대로 할 아이가 아니오."
하고 말했다. 그래도 떡장수는,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먹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라고 하며 빨리 돈을 지불하라고 계속 따지자 무사는 순간적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자 다짜고짜로 아들을 쓰러뜨리고는 아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지 않았음을 백일하에 입증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떡장수를
핏발 선 증오의 눈초리로 잔뜩 노려보던 무사는
살려달라고 빌고있는 그에게 달겨들어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다.
떡장수의 목이 땅바닥에 수박덩이모양 구르는 것을 지켜본 순간
무사는 정좌하고 앉은 채 두 사람을 죽인 그 칼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에 한일자를 북 그어버렸다.
2. 조선시대 성리학자 윤상(尹詳)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중에서
길가던 나그네가 어느 집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나그네는 숭늉을 마시고 무심코 밖을 내다 보았다.
주인 집 사내 아이가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렸다.
마침 이것을 지켜보던 거위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그 구슬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에 그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가보(家寶)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구슬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온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 뒤져도 구슬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은 식객으로 묵고 있는 나그네에게 도둑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나그네는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는 결박을 당하여 사랑채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을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난 나그네는 다음날 관가로 끌려가지 직전에 주인에게 거위의 똥을 잘 살펴보라고 일렀다.
잃었던 구슬은 거위의 똥 속에서 나왔다. 주인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거위가 구슬을 삼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얘기를 않고 밤새 고생을 했소?"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그 사실을 밝혔더라면 당신은 급한 김에 그 자리에서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게 아니오.
내가 하룻밤 고생한 덕으로 거위는 목숨을 건졌고 당신은 구슬을 찾게되지 않았소?"
한국과 일본의 생명에 대한 인식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