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메켄지가 기록한 구한말 일제와의 사투


저자: 'F.A. Mckenzie'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으로 1869년 퀘벡에서 태어나 1931년 63세로 생을 마감한 언론인이며 저술가였다.
그는 1900년에서 1910년까지 런던의 '데일리 메일'의 기자였다.
39세의 나이로 런던 데일리지의 특파원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던 멕켄지는 일제에 항거하고 있는 의병들을 저자가 직접 만나 글로 옮꼇으며,  당시 의병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지,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의병 사진'도 그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F.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중에서 :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눈부신 햇빛이 시가가 내려다 뵈는 언덕위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쪼이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을 비추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시내와 재의 산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찌기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본 적이 없었다.
1개월 전까지는 번잡하고 유복하던 촌락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 조각과 회색의 잿더미, 타다 남은 찌거기더미가 줄지어 있었다.
온전한 벽도, 한개의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옹기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나는 산길을 따라 이천으로 가는 연도의 마을을 내려다 보았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일본의 폭력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마을이 차례차례로 잿더미화한것을 보았다. 파괴는 모두가 완전했다.
단 하나의 집이나 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울준비를 위한 단지와 화로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폐허로 돌아와 재건에 나섰다.
나는 며칠 동안 이러한 정경이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불감증이 되었다. 그러나 폐허에 던져진 집없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돌연 연민의 정이 끓어 올랐다.
많은 한국인 노인들이 그런것처럼 존경받아야 할 위엄에 찬 노인들, 젖 떨어지지 않은 아이들을 가진 부인들, 건강한 남자들은 내가 본바로 판단하면 딴 사람들보다 깨끗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해질 무렵 저녁을 짓던 사동이 그릇을 떨어뜨리며 달려와서 소리쳤다.

"선생님, 의병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군인들이 왔어요."

순간 5,6명의 의병들이 뜰로 들어섰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총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도 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 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무기가 없습니다. 총은 낡아 쓸모가 없고 화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당신은 원하면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십시오. 돈은 5천 달러건 1만 달러건 필요한 대로 드리겠습니다.

애석했지만 나는 이 요구를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종군 기자로서 어느 한 쪽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기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일본군으로부터 내가 본 의병들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요청 받았으나 그때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다음날 내가 가진 비상의약품으로 부상당한 의병들을 응급처치 해주고 마을을 떠났다. 한 아낙네가 다가와 "우리는 한 서양인이 우리의 참상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본 것을 세계에 전하여 우리 현실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It was their purpose to avoid as far as possible any publicity being given to the doings of the Righteous Army, and to represent them as mere bands of disorderly characters, preying on the population.

일본은 가능한 한 의병들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의병이 단순하게 양민을 약탈하는 난폭한 성격의 匪徒로 묘사하는게 목적이였다 

In June, 1908, nearly two years afterwards, a high Japanese official, giving evidence at the trial of Mr. Bethell before a specially convened British court at Seoul, said that about 20,000 troops were then engaged in putting down the disturbances, and that about one-half of the country was in a condition of armed resistance.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08년 6월, 서울에서 특별히 열린 영국의 영사 재판에서 Bethell에 대한 재판에서 증언하던 한 일본인 고위 관리는 그 당시 약 2만 명이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고 전국의 약 절반이 무장 봉기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03173276IN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472520&page=2&bbs=


덧글

  • 11 2011/01/26 10:18 # 삭제 답글

    쓴사람이 일빠들이랑 아갈벌이고 있을떄 좀 도와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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