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5.18 03:00 | 수정 : 2016.05.18 10:08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7]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中 "黃帝가 주역, 중화문명 기원"… 신화를 토대로 설명하는 건 무리
요하문명은 중국 요하(遼河) 일대에서 성립·발전한 고대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학계에는 요하문명이 중원 지역보다 먼저 문명 단계에 진입하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가 적지 않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경부터 약 1500년에 걸쳐 내몽골 동부와 요령성 서부의 시라무렌하와 대·소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후기 신석기문화의 한 유형이다. 지(之)자형의 선문(線文)을 새긴 원통형 토기와 기하학 문양의 채도(彩陶), 그리고 주로 짐승을 모티프로 한 다양한 형태의 옥기(玉器)가 이 문화를 대표하는 표지유물이다. 홍산문화의 성취를 대표하는 것은 요령성 서부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이곳에는 '여신묘(女神廟)'라 불리는 신전을 중심으로 약 50만㎡에 걸쳐 적석총이 흩어져 있다. 여신묘는 반지하식 목조건물이고 내부에서 흙으로 빚은 인물 및 짐승 소상(塑像) 파편이 발견되었다. 인물은 여성이며 머리 부분 1점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홍산문화가 문명(文明)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은 그 주인공으로 황제족(黃帝族)을 지목한다. 지금부터 5000년 이전에 문명 단계에 진입했다면 중국 최초의 문명이다. 그것이 국조(國祖)로 추앙되는 황제의 것이라면 이야기는 더욱 정합적인 구조를 갖는다. 홍산문화를 통해 중국 문명의 발상지를 황하 유역에서 요하 유역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그렇지만 적석총이 아무리 인상적이라 해도 홍산문화에서 문명의 기준이 되는 국가나 안정적 계층 구조의 흔적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면에는 한족(漢族)은 물론 소수민족들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아울러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계산이 있다. 중화문명은 복수의 기원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복수의 문명이 서로 교류하여 하나로 융합되었다는 이른바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이 핵심이다. 홍산문화가 먼저 문명에 진입했지만 그것은 중원의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접촉함으로써 가능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앙소문화에서 발달한 채도가 홍산문화에도 보이는 것이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인접 문화 사이의 상호 영향이 반드시 융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홍산문화가 황제의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여신묘 출토 짐승 소상에 곰(熊)이 있다고 주장한다. 홍산문화의 대표적 옥기(玉器)인 수형결식(獸形玦飾)에 장식된 짐승이 곰이라고도 한다. 곰을 강조하는 이유는 황제의 나라가 '곰나라(有熊氏)'라는 전승이 사기(史記)에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여신묘의 짐승이 곰인지 아닌지 입증할 길이 없다. 옥기에 장식된 짐승도 처음에는 돼지라 했었다.
곰을 강조하는 것은 홍산문화가 고조선의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한국인들에게도 매력적이다. 단군신화의 웅녀가 연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실체가 확인되는 시점은 기원전 1000년쯤으로, 그 강역을 요서와 요동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여유 있게 잡아도 이 시공간의 범위에서 홍산문화와의 계승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홍산문화를 고조선과 연계하는 주장도 성립되기 어렵다.
- "홍산문화 주역은 예맥족… 고조선의 모태"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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