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과 『독립정신』의 길
-본 발표문은 필자의 논문인, 金永林「日清・日露戦争期の韓国インテリの情勢認識と近代日本―李承晩の『独立精神』を 中心に」(『中央史学』第40号、2017年3月)을 번역 정리한 것임.
김 영 림 (신동아 일본통신원, 츄오대학 박사과정)
한국현대사에 있어 초대대통령 이승만(1875 -1965)은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이승만의 업적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그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보전에 바친 애국자이다. 또한 최근에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넘어 국제전쟁이기도 했던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업적과 공화주의 및 자유시장경제를 국시로 하여 지금의 대한민국 번영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의 측면이 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일반론이다.
반면 반공과 조국방위의 이름으로 반대파를 탄압한 독재자라는 평가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식민지시대의 친일관료까지 재기용하여 과거사 청산을 좌절시킨 부패정치가로 여기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1980년대에 한국의 학생 운동이 극단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확산되었으며, 그러한 사조를 대표하는 서적으로 식민지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혼란을 민중사관과 종속이론에 의거하여 서술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 ( 宋建鎬外『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년.)
을 들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이승만은‘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반일 주의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고, 최근의 연구에서도 한국의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권위주의 정치인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木村幹『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ミネルバ書房、二〇〇三年)
그러나 이상의 평가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내의 사상대립 및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행적·실적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의 인생의 70 % 이상을 차지하는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사이의 '계몽 사상가이자
활동가였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전자에 비해 그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일했다. <木村幹(키무라 칸)도 그의 저서에서 이승만이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의 독보적 위치를 가진 이유로서 장기간에 걸친 그의 사상가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력에 주목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선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을 再考하지않고서는 독립 이후 이승만의 사상적 근원과 행동 원리를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본고는 이승만이 1904년에 집필한 『독립정신』에 주목, 이 책의 묘사에서 그의 인생 전반기의 사상을 파악하여 식민지 이전의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의 청일·러일 전쟁에
대한 시국관과 근대 그 자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차후 그의 투쟁대상이 된 근대 일본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해 논하고 싶다.
1. 『독립정신』이란?
먼저 『독립정신』 집필 경위에 대해 알아보자.
이 책을 이승만이 집필한 것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옥중(獄中)에서였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이경선(李敬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스무 살이 된 1895년, 청일전쟁 후 일본에 의한 조선의 내정 개혁(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 – 1902)가 개교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미국식 토론회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자유사상과 독립의식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이승만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영어 연설을 발표, 초청된 국내외의 유력자에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23세가 되어서는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연사로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또한 1898년에는, 군주제 폐지와 공화제 도입을 호소했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회원 17명이 체포되었을 때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고등법원 앞에서 철야농성을 하여 회원들을 석방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그 결과 이승만은 고종이 개화파를 회유하기 위해 설립한 원시적인 의회인 ‘중추원’(中枢院)의 의관(의원, 従九品) 50명의 일원이 되었다. <류영익『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년,1-12페이지.>
그런데 사태는 다시 돌변, 독립협회는 강제 해산당하고 이듬해 1899년, 이승만은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생활 중에 이승만은 옥중에서 학교를 만들어 수감자의 한글 교육과 기독교 선교를 하면서 영한사전의 집필과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의 실록 『중동전기본말』<이 책을 편역해 이승만이 망명 후 하와이에서 출간한 것이『청일전기』(태평양잡지사, 1917년)이다.>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우려하고 있던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전쟁(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서문(f 1~2 )에서 토로한 대로 ‘남아로 가만히 앉을 수 없어, 격분과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어’ 2월 19일을 기해 『독립정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독립정신』은 옥중에서 참고자료의 원활한 입수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시급성을 감안해 가능한 한 일반 대중에게 세계정세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읽기 쉽게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 초기의 출판물임에도 불구하고 한자가 없는 순수한 한글만으로 집필되었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순수 한글로 집필한 이유는 한자를 읽을 수 없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즉 이승만은 ‘우리나라(조선)에서 중간층 이상의 사람이나 한문을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썩고 잘못된 관습에 물들어 기대의 여지가 없고’ 일반 백성, 다시 말해 ‘배운 게 없는 비천하고 약한 형제자매들’의 각성만이 희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각설하고, 『독립정신』이 출판되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독립정신』을 탈고 한 것은 1904년 6월 29일이었지만, 출판까지는 다시 몇 년이 소요되었고 발행된 곳도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 그동안 원고는 이승만의 동지들이 보관 후, 미국에서 유학 (1905 - 1910 년)중이던 이승만에 발송되어, 한일합방 직전의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의 대동신서관에서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출판에 협력한 것은 이승만에 앞서 미국에 이주한 옥중 동지
박용만(朴容萬)으로, 박용만은 다른 동지와 함께 신속히 『독립정신』의 출판을 시도했으나 한글 활자의 입수가 늦어졌다. 그래도 박용만은 이승만의 서문에 곁들인 출판 취지문에서 다음과 같이 출판의 의의를 말했다.
"비록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독립의 정신이 남아 있다면 결코 아주 망한 것은 아닐지라. (중략) 아쉽게도 책의 출판이 늦어 그동안의 시세와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에 독자가 흥미를 잃을 수 있는 것이 걱정이지만, 이 책은 원래 정치사상의 요령과 본국과 외국의 고금 흥망을 비교하여 쓴 것인 고로, 어느 사람이든지 필자의 의도를 이해한 독자는 당연히 독립의 정신을 익히고 미래 조선의 인재가 될 것을 믿는다."(f 3~ 5)
그러나 『독립정신』은 해외 거주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통되지 못했다.
한일합방 후, 『독립정신』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곧바로 금서로 취급되었고, 그 연유는 뒤에도
보충하겠지만,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한 1912년 3월,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 山縣伊三郎<1858-1927. 일본의 정치가 관료. 을사조약 후 통감부 시대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바로 다음 서열인 부통감을 역임,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조카이며, 후사가 없던 아리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의 공작 작위를 계승.>가 외무차관 이시이 기쿠지로 石井菊次郎<1866-1945. 일본의 정치인 외교관.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의 외무대신(外務大臣)을 역임. 중국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에 대해 미국과 협약한‘이시이 ․ 렌싱 조약’(1917년)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태평양전쟁 중 미국의 공습으로 사망> 에게 보낸 서한에서 잘 드러난다.
「今回北米合衆国「ミネソタ」州「ミネアポリス」ニ開催ノ耶蘇北監理派総会ニ鮮人信徒代表者トシテ出席スベキ当地皇城基督青年会学監朝鮮人李承晩(当年三十八年)ハ嘗テ韓国官憲攻撃ノ演述ヲ為シ終身刑ニ處セラレタルコトアリ、在獄五年ノ後特赦方面サルルヤ。米国ニ渡航シ「ハーバード」大學ヲ卒業シ帰来政治運動ヲ試ミントセシモ時勢変遷シ到底此方面ニ活動余地ナキヲ見、基督教ニ入教シタル嫌アリ、而シテ同人ハ在米中「独立精神」ト題スル書ヲ著述シ危険思想鼓吹ニ勤メタル経歴モ有之候ニ付、今回渡米後、或ハ在米鮮人ト会合シ、或ハ米国官民ニ対シ不穏ノ言辞ヲ弄スルコトナシト限ラズ。就テハ其渡米後ニ於ケル言動注意方其向へ可然御通達相成様致度此段申進候也」(朝鮮総督府政務総監山縣伊三郎、外務次官男爵石井菊次郎宛「鮮人李承晩渡米ニ関スル件」、 明治四五年 三月廿二日、〈外務省外交史料館所蔵外務省記録、「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滿洲の部 一」:韓国国史編纂委員会DB所蔵〉)원문 및 번역은 부록을 참조할 것.
조선총독부 서열 2위인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독립정신』을 ‘위험 사상을 고취’하는 책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독립정신』이 정식으로 한국에서 출판 된 것은 식민지에서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이 책은 그 존재 자체가 잊혀져, 1993년에, 국내 초판 이래 반세기를 거쳐 재판되었지만 처음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국 학계에서 『독립정신』이 본격적으로 재조명 된 것은 연세대학교 국제 대학원의 류영익(柳永益, 2013년에서 2015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장 역임) 교수의 역할이 크다. 그는 1970년대 하버드 대학 재학 시절, 옌칭연구소에서 『독립정신』 초판본을 손에 넣은 것이 이승만 연구의 시작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승만 연구는 이렇게 태동했다」미래한국weekly』2011.8.15)
또한 그는 이승만의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방대한 문서와 저작들을 분류 정리하는 작업을 주도했고, 연세대학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후 연구소는 이승만연구원으로 개편(2011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독립정신』과, 그것이 집필된 구한말 러일전쟁기의 이승만에 관한 연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에서는 앞서 소개한 류영익 교수의 『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년)이 있다. 그의 연구는 이승만의 독립협회 활동시기 및, 투옥 기간이었던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이승만의 편지와 저작들을 분석, 사실상 해당기간의 이승만 연구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주도한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도 이승만의 방대한 저작·서간 등의 일차 사료를 분류·탈초하여 東文편 (한글 한문,『雩南李承晩文書―東文編』전18권 ,중앙일보사・연세대학교현대한국학연구소, 1998년)과 영문서한집으로 나누어 출판했다. (『李承晩 英文 書翰集-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전 7권, 연세대학교현대한국학연구소, 2009년)
그리고 원서의 19세기의 한국어를 현대 한국어에 맞게 수정 한 책이 2000년대 들어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이승만 저, 김충남/김효선 편『풀어쓴 독립정신』청미디어, 2008년)
그러나 한국의 이승만 연구는 현대 정치와 연결되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과 논쟁과 같은 정치 이슈에 아직도 사로 잡혀있는 상태이며, 이승만의 근대 독립 국가 구상의 청사진이기도 한 『독립정신』의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이다.
또한 『독립정신』 집필시기의 주요 당사국이기도 한 일본에서의 연구 상황도 초기 단계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독립정신』의 원본은 순수한 한글, 게다가 19세기의 한글 활자와 문법으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 연구자에게 언어의 장벽이 높다. 따라서 20세기까지 일본 내 한국계 연구자의 연구에서 그 이름만이 예시되는 정도가 한계였다. 현재 일본에서의 연구성과로 들 수 있는 것이 하타에 노부오(波多江伸夫)의 연구이다. (波多江伸夫「冊封体制の崩壊とその思想的影響--兪吉濬の「国権」・『西遊見聞』と李承晩の『独立精神』の比較を通じて」『政治学研究論集』(18)、明治大学大学院、二〇〇三年、一九~三五頁)
하타에 본인도『독립정신』원본에 대해서는 언어의 장벽으로 접근하지 못해, 영역판(Syngman Rhee,[translated by Han-Kyo Kim]The Spirit of Independence: A Primer for Korean Modernization and Democratic Reform[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波多江伸夫,同前,角柱10番)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과 후쿠자와의 문하이기도 한 개화파 유길준이 집필한 『서유견문』(西遊見聞), 나아가 『서유견문』을 주요한 참고자료로 집필한 『독립정신』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이승만의『독립정신』을 기존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 체제가 붕괴 될 때, 그러한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정치 체제와 국권 개념의 재 정의를 요구한 현대 조선 지식인의 계몽사상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하타에의 연구는 『독립정신』의 『서양사정』, 『서유견문』과의 내용적인 차이점이기도 한 후반부의 서술, 다시 말해 청일·러일전쟁 전후의 국내외 사정의 설명과 이승만의 시국관까지는 접근하지 못했기에, 이 점은 본고에서 논하겠다.
2. 근대 국가로서의 생존 방침과 정치 제도의 모색
총 50장으로 이루어진 『독립정신』의 전반부, 즉 1장에서 24장까지는, 근대 국가로서의 생존 방침과 이에 걸맞은 제도에 대한 모색이 엿보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민 전반의 문호개방과 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 이승만은 우선, 자주의식에 근거한 문호 개방과 해외 문물의 수용, 그리고 그 필요성에 대한 위정자와 국민 전반의 각성이야말로 모든 출발점이라고 논한다.
총론(1~2페이지)에서 러일전쟁을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대위기로 간주해 조국의 운명을 "폭풍우를 만난 배와 같다"라고 표현했다. 이 위기는 신분의 상하 귀천을 불문하고 다가오기 때문에 제1,2장에서 ‘국민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 제8장에서 "국민이 깨지 않으면 국가를 보전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것이 제6장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에서 강조된 외국 문호 개방과 해외 문물의 수용이며 그것은 동시에 제5장 "마음속의 독립정신을 굳건히 해야 한다", 제9장 "자주와 독립의 중요성"이 전제였다.
6장에서 이승만은 만국에 통용되는 ‘공법’(국제법)에서는 그 주권의 한계에 따라 국가가 독립국가, 연방국가, 속국, 그리고 속지(식민지)로 구별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특히 속지는 주권을 잃고, 점령국의 총독에 의해서 지배되는 가장 비참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점령국에 의해서 개화가 이뤄졌다고 해도 속지의 주민은 학문·교육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심지어는 자국어를 포함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빼앗길 수조차 있다면서,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살 수 없다’(26페이지)고 경고하고 있다.
또 속국을 "공법"상의 속국은 과거 중국과 조선의 조공 관계, 즉 ‘형식상에 불과한 실질적인 독립 상태’와 전혀 다르기에 주의를 요한다고 덧붙였다.(28페이지) 이승만에게 있어서 속국은 제7장 "독립국과 중립국의 차이"에 예시한 보호국과 함께 식민지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었다.
물론 독립의 중요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외부 세력의 단순 배격을 의미하지 않았다,
제4장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다”에서는 무차별적인 외세배격은 국가에 대한 진정한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임을 논하고 있다.
(2) 근대 국가에 걸맞은 정치 체제 모색 ‐ 여기에 더해 이승만이 『독립정신』의 전반부에서 설명한 것은 ‘독립’과 ‘문명 부강한 국가’에 부합하는 정치 체제였다.
이승만은 제14장 “세 가지 정치 제도의 구별”에서 당시 세계의 정치 체제를 전제군주정, 입헌군주정 및 민주정으로 분류하고 제15장에서 20장까지 미국·프랑스·영국 등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세 가지 정치 제도” 가운데 국가의 구성원이 가장 강한 주인의식을 갖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제도는 미국식의 민주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동시에 이승만은 그것이 동양에서는 오히려 위험한 사상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 역사적 사례로 제19장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에서 전제군주제가 혁명에 의해서 쓰러진 뒤에 벌어진 내전·학살을 예로 들며, 보다 안정적 개혁을 이룬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아시아에서 성공 사례로서는 일본을 예시하며, ‘40년 전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섬나라’ 일본이 ‘정치를 변화시키고 서양제도를 본받아 나날이 발전하여 현재 강대국과 경쟁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은 ‘입헌정치를 도입하고 민관이 국사를 함께 논의한 때문이다.’(95페이지)라고 높이 평가했다.
(3) 전제군주제의 위험성에 대한 지적 ‐ 한편 이승만에게 전제군주제는 독립국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탈피해야 하는 제도였다. 제21장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 제도에 달렸다”를 통해서 이승만은 전제군주제의 세 가지 해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전제정치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자유를 박탈하므로 백성의 불평불만이 쌓여 서로 증오하고 분열되어 싸우다 나라가 스스로 패망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제정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발달하지 못하게 하여 각자가 남들처럼 잘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게 되어 외국 사람들이 들어와 자기들 것을 빼앗을 지라도 저항할 정신이 없게 된다.
셋째, 전제정치에서는 백성이 나라와 자신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또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이 와서 고위 관리 몇 사람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장악하면 총 한방 쏘지 않고, 백성까지도 스스로 딸려들어가 팔린다. 이것이 전제정치에서 비롯되는 위험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98페이지)
때문에, 이승만은 전제군주제에 대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안 될 경우에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제22장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 수준에 달려있다”, 제23장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를 통해 일반 대중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3. 한국 개화파 지식인의 관점에서 본, 청일·러일 전쟁과 근대 일본
『독립정신』의 후반부는 개항 이후 주변국과의 관계와 청일·러일전쟁에 대한 정세 분석이 주요 내용이다. 우선 제26장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청나라”, 제27장 “일본이 흥성하게 된 이유”,
제28장 “러시아의 음험한 마수(魔手)”에서는 청나라·일본·러시아에 대해서 차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각 장 제목대로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에는 경멸의 시선을, 남하정책 때문에 극동을 침범하는 전제군주제 국가 러시아는 작금의 최대 위협으로 경계하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근대화와 입헌 정치에 성공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기술은 시세의 변동에 의해서 점차 의혹과 경계로 넘어간다. 동시에 이런 국면이 빚어진 것은 조선 위정자와 아직 깨어나지 않는 국민에게도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고 그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메이지 유신 ‐ 제27장 “일본이 흥성하게 된 이유”(131~134페이지)에서 이승만은 근대화에 주력하는 일본의 모습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국민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시한 ‘할복’ 등의 기술에는 세부적으로 잘못된 기술도 있지만 할복을 싸움에 패한 자들의 집단 자결로 묘사하고 있다.
이승만은 그것을 예시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의 정신이 이렇게 독하면서도 강하여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으니, 이 같은 국민성은 자국의 독립을 지키는데 적합하다.(132페이지)
이승만은 일본의 개화가 이러한 국민성의 바탕에서 국가의 인텔리 계급이 시대와 세계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일본의 군주(메이지 천황)가 호응해 입헌정치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에 성공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라의 신민 된 자(한국인)는 일본의 개화에 대해서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134페이지) 라는 소감을 토로했다.
(2)강화도 조약과 임오군란 ‐ 제31장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통상하다”(148~151페이지)에서는 근대 일본과 조선의 외교 재구축의 계기가 된 강화도조약에 대해서 ‘이 날이 조선이 실질적인 독립국임을 처음으로 확인했던 날이다’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에 있어서 최초의 근대적인 통상조약인 이 조약은 ‘만일 백성들이 독립이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면 지금까지 전국이 이 날을 경사로운 날로 기념했을’ 사건이었다. 나아가, 근대 통상조약을 체결한 최초의 국가가 이웃 나라 일본이란 것은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이 조약이 맺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서양 각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위험한 나라가 기회를 보아 조선과 먼저 통상조약을 맺었다면
우리나라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과 먼저 조약을 맺고, 조선이 명실상부한 독립국임을 선언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닌가?(149~150페이지)
그러나 당시 조선의 실정은 이승만의 지적에 따르면 ‘백성은 독립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고,
혹자는 대국(청나라)을 배반하면 큰일이 날 것이며 또한 도리에도 어긋난다’고 하던 상태였다.
이처럼 조약의 의미를 백성에게 알리려는 노력도, 백성이 알려고 하는 노력도 없는 상태에 대해서 ‘어찌 나라가 튼튼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이승만은 제32장 “임오군란이 일어난 배경”(151~154페이지)을 통해서 이런 국가 전반의 근대조약에 대한 인식부족과 일반민중의 무차별적인 외국 배격이 임오군란과 그 후 외국 군대의 수도 주둔을 초래하고 이후의 일련의 국권 침해의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3)갑신정변 ‐ 상술한 바와 같이 조선 관민의 자발적인 개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외부 세력(일본)을 끌어들이고 일으킨 사건이 갑신정변이다.
이승만은 제34장 “갑신정변이 일어난 사정”에서 개화파의 동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갑신정변이 빚은 결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아직 개화의 의의를 모르는 일반 백성은 개화파에 대하여 외적(일본)과 함께 왕실을 위협한 역적으로 간주했고, 개화파를 진압한 청나라를 원군으로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일반 백성의 대 청나라 의존을 심화시켰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이승만은 34장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를 통해서 국가의 주권을 튼튼히 하고자 하면서 일본군의 힘을 빌린 것은
자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한편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면 그 반대편 또한 타국의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독립을 의논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161페이지)
(4) 청일전쟁 ‐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청나라의 갈등은 갑신정변에서 10년 후, 청일전쟁의 형태로 폭발했다. 이승만은 제36장 “청일 전쟁의 원인”에서 조선을 여전히 속국 취급한 청나라의 태도를 맹렬히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국군을 아군이라고 믿었던 조선 관민의 무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조정과 백성이 이렇게 무지몽매하니 어찌 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때 청나라가 전쟁에 이겼다면 우리나라의 주권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며
백성들은 또한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 대한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169~170페이지)
그리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승만은 제37장 “청일전쟁 이후의 조선의 대외 관계”과 제41장 “청일전쟁 후 개혁에 나선 조선”을 통해서, 그 변화에 대해, ‘허다한 악습이 나날이 떨쳐지고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어, 문명개화하고자 하는 기운이 왕성해졌다’(188페이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37장에서 그 결과가 자력이 아니었음을 또한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의 권리를 회복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자주독립이라는 이름만이 그로인한 혜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자주독립이라는 말을 하기도 수치스럽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마땅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172~173페이지)
그러나 그 개혁마저, 이듬해 을미사변에 의한 전국적인 저항과,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이승만은 4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부터 일본은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고 러시아가 대한의 내정을 좌우했다.
대한의 독립과 주권이 또 다시 훼손되었으며 개혁의 기반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우리 국민의 불행이었을 뿐 아니라 대한에 대한 일본의 노력도 큰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된 일본 공사의 범죄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192페이지)
(5)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 1896년을 기점으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나날이 강화됐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정치제도는 러시아와 유사한 전제군주제를 채택했다. 「대한국 국제」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高宗実録』高宗三十六年八月十七日、一八九九年)
이승만은 독립협회 주최의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러시아의 국권 침해를 비판했지만
1899년 정치범으로 투옥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청일전쟁 후, 삼국 간섭을 시작으로
1900년 의화단의 난을 거치면서 점차 극동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일본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세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던 상황을, 옥중의 이승만은
제43장 “조선을 놓고 각축을 벌인 러시아와 일본”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 개전에 대해서는 제44장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나다”에서 다음과 같이 비평하면서 일본의 개전 명분에 의혹을 던지기 시작하고 있다.
갑오년(1894년) 이래 10년 동안 일본이 두 번이나 전쟁을 하면서, 이번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개전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한 일이 될는지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1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결과가 이렇게 드러난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눈을 뜨고 정신 차려 보아야 하겠다(216페이지)
한편 『독립정신』을 집필하기 시작한 1904년 2월 19일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발표됐다. 이승만은 그 내용에 대하여 제45장 “러일전쟁 당시의 대한제국”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 협정의 문제점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일본이 우리의 영토, 주권, 황실을 보전한다 하며
우리의 국정을 돕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독립에 적지 않은 침해가 되는 것이다.
이 조약을 하나만 가지고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겉으로는 대한제국을 위한다고 생색을 내면서 속으로는 우리나라의 모든 권리를 장악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본의 계책인가?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았다면 그같이 된 데는 우리관리들은 물론
백성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22~223페이지)
4. 국난의 원인에 대한 반성과 각오
『독립정신』의 후반부의 내용을 요약하면 조선이 자초한 국난에 관한 반성,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높은 평가, 거기에 더해 극동의 주도권을 쥔 일본에 대한 새로운 경계심이 엿보인다.
이승만은 제47장 “청, 일본, 러시아가 우리에게 끼친 해악”에서 근대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고자 30년 가까이 청나라와 협상하며, 우리나라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를 해칠 의도가 없는 것은 분명했던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끌어들여 결국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했다. 청일전쟁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한 전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자립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항상 남을 의지하려고 하다 마침내 러시아를 개입시키고 말았다. 이는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다가 당한 피해이다(231페이지)
그리고 조선이 자초한 국난에 관한 후회가, 제48장 “우리는 여러 번 좋은 기회를 놓쳤다”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청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서양을 두려워해야 했다.
서양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서 우리도 강한 나라,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백성들은 자유를 누렸을 것이며,
나라는 자주독립을 향유했을 것이고, 나라 안에서도 위태로울 것이 없고,
나라 밖으로부터 침략당할 위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각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이며, 위험한 적에 대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청일전쟁은 한청전쟁이 되었을 것이며, 러일전쟁 또한 한러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다른 나라가 우리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다른 나라들 간의 조약에 우리나라에 고문관을 보내고, 우리 왕실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인가?(233~234페이지)
그러나 이승만은 최종 페이지까지 희망을 잃지 말 것을 역설했다.
결론에서 일본의 성공은 우수한 지도층의 위로부터의 혁명의 결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리가(백성을) 이끌어 주기를 기대할 수 없고, 그것을 기다릴 여유도 없다’면서 ‘우리 각자가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몇 배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용기를 갖고 변화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264페이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후에 이승만의 신념이 된 공화주의의 단서라 할 만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 이후의 정세는 저 48장의 제목 그대로 되고 말았다.
이듬해 1905년, 대한 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발표는 8월29일)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독립정신』의 제21장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제도에 달렸다”에서 우려한 바 있는
전제군주제 국가의 최악의 말로였다. 한일합병은 조약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의 의사가 무시된 비도덕적인 주권의 강탈이었다.
앞선 21장의 경고, 즉 ‘외국 사람들이 와서 고위 관리 몇 사람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장악하면
총 한방 쏘지 않고, 백성까지도 스스로 딸려들어가 팔린’ 형태로 진행된 것이며, 이 구절은 어떤 면에서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이런 점으로 조선총독부는 이승만과 『독립정신』에 대해, ‘동(同) 인물(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당시 『독립정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해 위험사상의 고취에 힘쓴 경력이 있는지라’ 고 평가하고 위험시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총독부의 저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한국병합의 비도덕성의 방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그의 독립운동에 있어, 정치적 근거 및 원동력이 되었기에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사료다. 그리고 이 책은 근대 초기의 국민 계몽 사상서로서의 성격에 그치지 않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 꿈꾸었던 "독립국가"에 대한 설계도이기도 하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근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관한 기술이다.
『독립정신』은 러일전쟁기의 서술에서부터 일본의 영토적 야심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근대 초기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이승만에 대해 ‘북한과 일본을 타협 불가능한 적(敵)으로 보았다’ (木村幹『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二二七頁)고 표현하던 기존의 일본 측의 관점에선 보지 못했던 일면(一面)이기도 하다.
또, 러일전쟁기에 집필된 『독립정신』은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내의 개화파 지식인의 대일 인식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다. 나아가, 근대 초기 개화파 지식인이 본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인식은 일본사 연구자에게도 귀중한 정보를 제공할 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저자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독립정신』은 현대의 한일 관계를 원점에서 연구하는 작업에서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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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외무 차관 이시이 키쿠치로에게
전달한 편지(일본외무성 자료) 원문 및 번역/해설.
1)번역
메이지45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
외무차관 남작 이시이 키쿠지로 님에게
이번에 미합중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개최되는 예수교 북감리교 총회에 조선인 신도대표로서 출석하게 된 조선 황성기독청년회 학감, 조선인 이승만(38세)은 일찍이 한국관헌을 공격하는 연설로 종신형에 처해진 경력이 있으며, 복역 5년 뒤에 특사방면 된 바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 도항해 ‘하버드’대학을 졸업해 돌아와서 정치활동을 시도했으나 시세가 변해 도저히 그 쪽으로 활동할 여지가 없음을 보고 기독교에 입문한 것으로 의심됩니다. 그런데 동(同) 인물은 미국에 있을 당시 『독립정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해 위험사상의 고취에 힘쓴 경력이 있는지라, 이번에 미국에 건너간 다음에, 어쩌면 재미조선인들과 회합하며, 혹은 미국 관민들을 향해, 불온한 언사를 늘어놓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도미 후의 언동에 대해 주의해야함을 관계부서에 마땅히 통고하고자 하여 이번에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2) 해설
위 편지는 1912년, 105인 사건이 진행되던 도중 작성된 것이다.
당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무단통치’의 대표적 인물로서 부임과 동시에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와 함께 윤치호 등 기독교인과 지식인들이 조선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사건을 날조, 대규모의 검거작전을 펼쳤고, 이는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싹을 미리 잘라내려는 시도였다. 600여명이 체포되어 그중 105명이 기소, 윤치호 등이 최종심에서 중형을 선고받는 와중에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국외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이승만의 출국(3월 26일) 전에 미리 외무차관 이시이 키쿠지로에게 그의 인적사항을 설명하며 감시 및 주의를 당부해, 이승만 또한 체포 대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서열 2위가 직접 일본외무성의 실무를 담당하는 외무차관에게 감시를 주문했다는 사실, 그의 경력을 상세히 수집했다는 사실에서 일제가 일찍이 그를 중요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승만은 도미 이후 미국에서 사건 당사자의 구명을 위해 총독부의 부당함을 미국 기독교계와 정관계를 향해 호소했고, 이듬해 하와이에 정착한 뒤에는,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핍박』(新韓国報社,1913년)을 출간했다.
여기서 이승만은 수감 중인 윤치호에 대해 ‘윤(치호) 씨는 장차 옥중에서 죽을 각오로 천국의 의와 동포의 장래 행복을 위해 저러한 화를 당함이니 윤 씨의 영광이요, 우리의 감사할 바’(106 페이지)라면서 윤치호가 절개를 지킬 것을 확신했었다. 또한 『한국교회핍박』을 쓰던 시점까지는 옥중의 동지들에 대한 구명활동에 있어, 일본에 유리하던 당시 국제정세 상 일제와의 본격적인 저항노선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가혹한 수감생활과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복해 결국 1915년에 전향해 석방되었고, 후일(중일전쟁 이후) 사실상의 총독부의 부역자가 되고 만다.
한편 이승만은 미국에서 더욱더 투쟁의지를 다졌다. 1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참전으로 절정에 치닫던 1917년,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제2판을, 그가 하와이에 설립한 태평양잡지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 『독립정신』의 제2판 서문에서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기에 쓴 이 책이 ‘민주공화국, 입헌정치, 전제정치 등의 정치제도의 구별을 논하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대역죄에 처해 질수 있던 집필 당시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정식 출판된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곧장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독립정신』이 금서가 되어 버린 것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 책은 개명한 나라에서는 보통 전파되고 있는 사상과 제도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개명한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로워서 전파되지 못할 내용이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같은 내용이 과거도 용납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한데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있겠다.
과거 대한제국 정부도 자유와 독립사상은 백성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고
지금 일본 식민정부 또한 한국 인민에게 자유니, 독립이니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은 일본을 과거에 그를 정치범으로 탄압한 대한제국에 이은 새로운 압제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 『독립정신』 제2판과, 같은 해 한국인에게 청일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편역 출간한 『청일전기』는 사실상 이승만의 항일독립운동의 출사표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후, 105인 사건과 미국 망명 이래 한동안 멈춰 있던 이승만의 시계는 3.1독립운동 전야의 외교 독립운동노선의 실천을 위해 다시 급박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