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흥행비자’로 들어와 미군 기지촌에 넘겨져
밀착감시하며 ‘드링킹걸’로 술시중·성매매 강요
밀착감시하며 ‘드링킹걸’로 술시중·성매매 강요
경기 평택시 ‘필리핀 이주여성쉼터 두레방’에서 머물고 있는 여성 제니(28·가명)에게 지난달 8일 긴박한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친구 로렐라이(28·가명·필리핀)가 경남 거제시 옥포동의 ‘ㅂ’ 외국인 전용업소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제니는 전전긍긍하다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혼자 친구를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15일 새벽 경찰과 함께 업소를 찾았다.
업소 주인은 시치미를 뗐다. “그런 아이 없어요. 나가세요.” 날이 선 목소리였다. 제니도 경찰도 막막했다. 그때 로렐라이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그는 “지금 업소 인근 숙소에 갇혀 있다”며 위치를 알려왔다. 업소 주인은 숙소의 존재 자체를 숨겼다.
제니는 업소 부근에 있는 2층짜리 필리핀 여성 숙소 건물로 경찰과 함께 달려갔다. 문이 잠겨 있었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자 한 필리핀 여성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의 로렐라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았다.
로렐라이는 지난 3월 한국에서 공연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술흥행비자’(E6)를 받고 한국에 들어온 뒤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에 보내졌다. 애초 무대에 올라 가수로 일하려고 입국했지만 노래를 불러본 적은 없다. 성매매와 술시중만 강요받았다. 제니 역시 로렐라이처럼 거제도까지 팔려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
술 할당량 정해놓고 채우지 못하면 ‘바 파인’ 윽박
‘E6’ 비자를 받고 한국에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이 성매매를 강요받는 일이 계속 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명백한 인신매매”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필리핀 여성 대부분은 필리핀과 한국의 기획사로부터 가수로 일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선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미군기지 주변인 동두천, 평택의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에서 술시중을 들거나 성매매를 강요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박수미 두레방 쉼터 소장은 “E6 비자로 입국하는 대부분 필리핀 여성들은 미군기지촌 유흥업소에 보내져 성 산업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업주들은 여성들에게 한 달에 200잔에서 500잔까지 술(주스) 판매 할당량을 준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바 파인’(일종의 성매매)을 강요하고, 이마저도 거부하면 “필리핀으로 보내버리겠다”고 경고한다. 귀국 비용조차 없이 입국한 필리핀 여성들은 하는 수 없이 업주의 요구를 따른다. 미군들도 이들을 가수로 보지 않는다. 술시중을 들기 때문에 ‘주스걸’, ‘드링킹걸’이라고 부른다. 업주들은 어떤 방식으로 필리핀 여성의 발을 묶을까. 업소에선 ‘오빠’라고 불리는 관리인이 필리핀 여성들을 감시한다. 숙소와 업소 주변에 머물며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여성들을 위주로 감시한다. 10월 말 동두천의 한 업소를 탈출한 필리핀 여성 잭키(26·가명)는 “‘오빠’들이 어디를 가든 좇아 다니기 때문에 도망 나오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빠’들 어디든 좇아 다녀…“명백한 인신매매” <한겨레> 취재진은 지난달 20일과 21일 새벽 평택과 동두천의 미군기지 주변에 밀집된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를 찾아 탈출한 필리핀 여성들의 증언을 직접 확인해보았다. 업소에는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십여 명씩 필리핀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 업소 주인은 손님이 들어오면 일단 테이블에 앉힌 뒤 필리핀 여성을 붙인다. 그리고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 관리인(마마상)이 손님에게 다가와 필리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주스’를 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주스’는 양에 따라 만원에서 삼만 원까지 가격 차이가 있다. 비싼 주스를 사줄수록 필리핀 여성은 손님에게 더욱 친절해진다. 어느 곳을 들러도 노래 공연은 볼 수 없었다. 살갗이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은 필리핀 여성들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평택의 ‘ㅂ’ 업소에서 만난 멜리사(20·가명)는 “노래 부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마마상이 쿼터(술판매 할당량)를 채우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클럽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털어놨다. 멜리사는 대화를 끝낸 뒤 무대로 올라가 얇은 기둥을 붙잡고 춤을 추었다. 공연활동을 위해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E6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에게 술판매와 성 접대를 강요하는 것은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 출입국관리법 18조는 “외국인이 대한민국에서 취업하고자 할 때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취업활동을 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체류자격을 가지지 아니한 자의 고용을 알선 또는 권유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술판매와 성매매가 E6 비자의 체류자격 범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알선 또는 권유한 업주와 기획사를 출입국관리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주와 기획사는 콧방귀 뀌고 정부는 단속 손 놔
하지만, 업주와 기획사는 겁내지 않는다. 업주와 기획사 단속에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 주인은 “업주들이 필리핀 여성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놓기 때문에 단속 나와도 피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평택에서 ‘ㄷ’ 기획사를 운영하는 한 사장도 “공연활동 외에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은 업소 소관이라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법무부에서 비자를 발급해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되레 업소와 정부에 책임을 떠넘겼다. 법무무 대변인실은 이에 대해 “한정된 인력으로 업소들을 모두 관리하기는 쉽지 않다”며 “사실상 E6 비자 발급 과정을 개선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노동부 근로개선지도 감독관도 “밤에 주로 영업을 하는 업소는 우리 근무 시간과 달라 감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6 비자로 한국에 들어오는 필리핀 여성 노동자는 1999년 876명에서 2008년 2,001명까지 크게 늘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 통계연보 참조) 그러나 E6 비자로 입국하는 러시아 여성의 성매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우리 정부는 2003년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대신 필리핀 여성들의 E6 비자 발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1년 7만여 명에 달했던 일본 입국 필리핀 연예 노동자는 2008년 2,500여 명까지 줄었다.(필리핀 해외고용국 ‘POEA’ 통계 참조) 한국과 비슷한 부작용이 커지자 일본은 2006년께부터 ‘예술흥행비자’ 발급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인신매매 기준을 확립하고 처벌 규정을 강화해 적극적으로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희진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은 “우리 정부도 서명한 유엔의정서는 인신매매를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모집, 운반, 인수하는 행위 등’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필리핀 여성들의 경우도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만큼 정부가 인신매매 방지법 제정 등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은 “개발도상국도 인신매매방지법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인신매매 처벌 규정조차 없다”며 “우리 정부가 조속히 유엔의정서를 비준하고 관련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의원은 지난달 13일 ‘유엔국제조직범죄방지협약’과 ‘성매매방지의정서’ 비준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거제·평택/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한 필리핀 여성이 갖고 있던 파견근로계약서. 계약서에는 가수로 일한다고 되어 있다.
‘E6’ 비자를 받고 한국에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이 성매매를 강요받는 일이 계속 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명백한 인신매매”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필리핀 여성 대부분은 필리핀과 한국의 기획사로부터 가수로 일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선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미군기지 주변인 동두천, 평택의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에서 술시중을 들거나 성매매를 강요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박수미 두레방 쉼터 소장은 “E6 비자로 입국하는 대부분 필리핀 여성들은 미군기지촌 유흥업소에 보내져 성 산업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거제시의 한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 한켠에서 필리핀 여성들이 쉬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업주들은 여성들에게 한 달에 200잔에서 500잔까지 술(주스) 판매 할당량을 준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바 파인’(일종의 성매매)을 강요하고, 이마저도 거부하면 “필리핀으로 보내버리겠다”고 경고한다. 귀국 비용조차 없이 입국한 필리핀 여성들은 하는 수 없이 업주의 요구를 따른다. 미군들도 이들을 가수로 보지 않는다. 술시중을 들기 때문에 ‘주스걸’, ‘드링킹걸’이라고 부른다. 업주들은 어떤 방식으로 필리핀 여성의 발을 묶을까. 업소에선 ‘오빠’라고 불리는 관리인이 필리핀 여성들을 감시한다. 숙소와 업소 주변에 머물며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여성들을 위주로 감시한다. 10월 말 동두천의 한 업소를 탈출한 필리핀 여성 잭키(26·가명)는 “‘오빠’들이 어디를 가든 좇아 다니기 때문에 도망 나오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빠’들 어디든 좇아 다녀…“명백한 인신매매” <한겨레> 취재진은 지난달 20일과 21일 새벽 평택과 동두천의 미군기지 주변에 밀집된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를 찾아 탈출한 필리핀 여성들의 증언을 직접 확인해보았다. 업소에는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십여 명씩 필리핀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 업소 주인은 손님이 들어오면 일단 테이블에 앉힌 뒤 필리핀 여성을 붙인다. 그리고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 관리인(마마상)이 손님에게 다가와 필리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주스’를 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주스’는 양에 따라 만원에서 삼만 원까지 가격 차이가 있다. 비싼 주스를 사줄수록 필리핀 여성은 손님에게 더욱 친절해진다. 어느 곳을 들러도 노래 공연은 볼 수 없었다. 살갗이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은 필리핀 여성들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평택의 ‘ㅂ’ 업소에서 만난 멜리사(20·가명)는 “노래 부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마마상이 쿼터(술판매 할당량)를 채우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클럽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털어놨다. 멜리사는 대화를 끝낸 뒤 무대로 올라가 얇은 기둥을 붙잡고 춤을 추었다. 공연활동을 위해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E6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에게 술판매와 성 접대를 강요하는 것은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 출입국관리법 18조는 “외국인이 대한민국에서 취업하고자 할 때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취업활동을 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체류자격을 가지지 아니한 자의 고용을 알선 또는 권유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술판매와 성매매가 E6 비자의 체류자격 범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알선 또는 권유한 업주와 기획사를 출입국관리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주와 기획사는 콧방귀 뀌고 정부는 단속 손 놔
미군 기지촌 일대의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 밀집구역. 이곳에서 인신매매되어 온 필리핀 여성들이 일한다.
하지만, 업주와 기획사는 겁내지 않는다. 업주와 기획사 단속에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 주인은 “업주들이 필리핀 여성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놓기 때문에 단속 나와도 피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평택에서 ‘ㄷ’ 기획사를 운영하는 한 사장도 “공연활동 외에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은 업소 소관이라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법무부에서 비자를 발급해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되레 업소와 정부에 책임을 떠넘겼다. 법무무 대변인실은 이에 대해 “한정된 인력으로 업소들을 모두 관리하기는 쉽지 않다”며 “사실상 E6 비자 발급 과정을 개선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노동부 근로개선지도 감독관도 “밤에 주로 영업을 하는 업소는 우리 근무 시간과 달라 감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6 비자로 한국에 들어오는 필리핀 여성 노동자는 1999년 876명에서 2008년 2,001명까지 크게 늘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 통계연보 참조) 그러나 E6 비자로 입국하는 러시아 여성의 성매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우리 정부는 2003년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대신 필리핀 여성들의 E6 비자 발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1년 7만여 명에 달했던 일본 입국 필리핀 연예 노동자는 2008년 2,500여 명까지 줄었다.(필리핀 해외고용국 ‘POEA’ 통계 참조) 한국과 비슷한 부작용이 커지자 일본은 2006년께부터 ‘예술흥행비자’ 발급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인신매매 기준을 확립하고 처벌 규정을 강화해 적극적으로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희진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은 “우리 정부도 서명한 유엔의정서는 인신매매를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모집, 운반, 인수하는 행위 등’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필리핀 여성들의 경우도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만큼 정부가 인신매매 방지법 제정 등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은 “개발도상국도 인신매매방지법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인신매매 처벌 규정조차 없다”며 “우리 정부가 조속히 유엔의정서를 비준하고 관련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의원은 지난달 13일 ‘유엔국제조직범죄방지협약’과 ‘성매매방지의정서’ 비준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거제·평택/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