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시각각] 문재인보다 홍준표와 싸우는 친박
[중앙일보] 입력 2017.05.05 02:01
요즘 자유한국당 친박 의원들의 최대 걱정거리는 문재인이 아니라 홍준표다. “홍준표가 대선 끝나면 자유한국당을 ‘준표당’으로 만들겠단다”는 소문이 돌면서다. 친박들 입장에선 대선보다는 그 뒤 치러질 전당대회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당내 측근이라고 해봤자 3, 4명 선으로 알려진 ‘독고다이’ 홍준표가 대선후보 프리미엄을 업고 당 대표를 넘본다니 친박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더 걱정되는 것은 바른정당 탈당파 11명을 서둘러 복당시키려는 홍준표의 움직임이다. 홍준표는 탈당파들을 만난 자리에서 “돌아오면 복당은 물론 여러분이 당을 떠날 때 상실한 당협위원장직도 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렇게 되면 홍준표는 순식간에 ‘홍준표계’ 의원 10여 명을 얻게 된다. 이를 발판 삼아 당권을 접수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친박들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좌장 서청원이 “벼룩도 낯짝이 있지”라며 탈당파를 공격하면서 “국민과 당원의 납득이 있어야 복당도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다른 친박들은 한술 더 떠 “탈당파 대신 최경환·윤상현·서청원·이정현 등 진박들부터 복권시켜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배신자들은 받아주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당에서 쫓겨난 식구들은 나 몰라라냐”는 논리다. 난처해진 홍준표는 4일 “국정 농단 문제가 있던 친박들도, 바른정당 탈당파도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자”며 양다리 걸치기에 나섰다.
하지만 친박들은 꿈쩍도 않고 있다. 이들은 홍준표가 과거 한나라·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늘 받아 온 40% 이상 득표율을 얻지 못하는 한 “보수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로 ‘팽’시키겠다는 생각이다. 홍준표도 싸움꾼이지만 친박이 당의 다수 세력인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집권당으로 나라를 쥐락펴락한 자유한국당의 현주소다. 대권보다 당권, 대선보다 내년 지방선거가 더 중요한 생계형 정당으로 전락해 있다. 의원 개개인의 정치적 생존이 집권보다 중요해지다 보니 자연 대권의 향배도 정체성이 알쏭달쏭한 안철수나 배신자 유승민보다는 싸움의 답이 분명한 문재인에게 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게 자유한국당의 속내다.
한 친박 중진 인사의 고백이다. “안철수가 되면 ‘새 정치’니 뭐니 해서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가 버린다. 반면 문재인이 집권하면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를 쫓아내고 대권을 먹으려는 민주당의 사기극’이라는 우리 주장이 먹혀들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 좌파 정부의 죄상을 밝히는 청문회를 열고 투쟁을 이어 나가면 민심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다. 선명한 ‘제1야당’으로 내년 지방선거도 휩쓸 수 있다. 문재인 세력은 어차피 능력 없고 부패 유혹에 취약한 집단이다. 만약 집권하면, 취임 당일부터 내리막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 ”
극좌 극우의 대결 정치에 넌더리를 치는 국민의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다. 하지만 아직도 ‘박근혜’를 외치는 영남 보수층의 존재, 그리고 대선 레이스에서 안철수 턱밑까지 치고 오른 홍준표의 지지율은 친박들에게 “우리는 부활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을 걸기에 충분하다. 국민들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극우 보수는 몰락하고, 개혁 보수와 중도가 새로운 주체로 떠오를 것을 기대했다. 자유한국당은 대통령이 탄핵된 만큼 대선판에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 것으로 본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아직도 그 세력은 만만치 않음이 드러났다. 안철수와 유승민이 보수 개혁과 중도 통합을 내세웠지만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한 패권 세력의 적대적 공생 카르텔을 뚫고 나가기엔 아직 힘에 부치는 듯하다.
결국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이다. 개혁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을 견디면서 전진할지, 아니면 후세에게 큰 짐을 전가하고 당장의 아픔을 피할지는 국민이 선택할 몫이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