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례가 시장경제 지위(MES: Market Economy Status)를 활용해 중국의 보복에 맞서는 것이다. MES는 말 그대로 시장경제를 하는 나라라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무역분쟁 때 터무니없이 높은 벌금을 얻어맞지 않는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는데, 최장 15년 비(非)시장경제 국가 취급을 감수하는 조건이었다. 이 말은 무역분쟁이 생겼을 때 세상에서 제일 싼 나라에서 생산한 가격으로 덤핑 판정을 해도 중국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얻어맞는 것도 정도 문제였다. 중국은 동네북이 됐다. WTO 출범 이후 무역분쟁의 32%가 중국 상대요, 지난해까지 21년 연속 무역분쟁 관련 조사 1위 국도 중국이었다. 2003년 국가주석이 된 후진타오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정상회담 의제에 꼭 시장경제 인정을 집어넣었다.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2004년에만 36개 나라에서 인정받았다. 2005년이 분기점이었다. 한국이 중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의 5대 교역국 중엔 처음이요, 한·미·일 삼각 경제 동맹에 균열을 부를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방한한 후진타오에게 통 큰 선물을 안긴 셈이다. 굳이 빗대자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미·일의 만류를 뿌리치고 천안문 광장 망루에 오른 것과 같다고 할까.
조건도 없었다. 후진타오의 선물이라곤 백두산 호랑이 한 마리와 김치 검역 완화 약속이 전부였다. 당시 산업자원부 고위 관계자는 “한·중 관계가 절정일 때였고, 남북이 직접 대화하던 시절이다. 굳이 북한 제재와 연결할 필요도 없었다”며 “후진타오 주석이 무척 고마워했다”고 돌아봤다. 이후 중국은 지난해까지 81개국으로부터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중국의 고난은 아직 진행형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MES를 중국을 다루는 지렛대로 쓰고 싶어 한다. 일본·유럽연합(EU)도 가세했다. 중국은 “WTO 가입 후 15년이 지났으니 시장경제를 인정하라”고 주장하지만 미국·EU·일본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맞받고 있다. “시장경제나 제대로 한 다음에 보자”는 식이다. 한술 더 떠 중국산 철강 등에 더 무지막지한 반덤핑 관세를 물리고 있다. 중국은 “부당하다”며 WTO에 제소한 상태다. 이럴 때 한국의 MES 인정 철회는 중국엔 아픈 한 수가 될 것이다. 국제사회에 ‘중국 왕따’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물론 국제 통상 규범에 맞지 않을 수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도 배치된다. 실익이 없을 수도 있다. 2000년 마늘 분쟁처럼 중국이 완력으로 나오면 우리가 더 당할 것이라는 걱정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호 경제팀은 지금껏 ‘전략적 인내’ 전략을 써왔다. “중국의 보복이 크지 않을 것”→“면밀히 주시하고 있다”→“증거가 없어 대응이 어렵다”며 계속 물러섰다. 중국이 제 풀에 지치거나, 때릴 만큼 적당히 때리다 말기를 바란 것이다. 가는 정부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도를 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지난달 중국 판매량이 반 토막 났다고 한다. 중국의 쩨쩨함이 관광·서비스업에 머물 것이란 유일호 팀의 예측은 또 빗나갔다. 더 이상 인내는 굴욕과 같다. 한국은 때리면 맞는 나라란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실리는커녕 명분도 잃게 된다.
전략적으로도 지금은 당당하게 맞설 때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는 “가는 정부가 세게 나가야 오는 정부에 (협상)여지가 커진다”고 말했다. 중국의 배은망덕과 부당함을 조목조목 꾸짖는 유일호 경제팀의 당당한 모습이 보고 싶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