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하루 앞둔 9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이 맞을 운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와 보통 사람들의 삶도 중대한 기로에 서는 날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의 손끝이 곧 이정표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92일, 촛불 없이 저절로 지나온 순간은 없었다. 9일 <한겨레>가 만난 사람들은 사법적 판단이나 정치공학적 판단보다 민의를 따르는 헌재의 판단을 낙관했다.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지난해 12월9일 안은정(48·주부)씨는 온종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있었다. “가결을 믿었지만,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시민의 힘으로 황교안 총리와 여당에 경고를 보내고, 헌재에도 시민의 열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그때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광화문광장에 서면 역사의 큰 흐름이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중고생 촛불집회를 8차례 열었던 최준호(19) 전국청소년혁명 전 대표는 “특검 수사도 연장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탄핵 반대 집회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걸 보면서 ‘썩은 권력을 끝장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고 느꼈다”며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촛불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는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10대들도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선거법이 꼭 개정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극우 정치인들이나 대통령 대리인들의 막말, 친박 집회 등이 불안감을 키운 게 사실이다. 박한철 소장의 퇴임 등 헌재 내부의 상황 변화도 새삼 커다란 변수로 다가왔다. 강세웅(47) 비정규직지원센터 대외협력국장은 “탄핵 선고까지 시간이 참 안 가는 느낌이었다. 조바심도 생겼다”며 “헌재가 탄핵 선고일을 밝히는 순간 ‘적어도 헌재가 결정을 미루지 않고, 결론을 내렸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92일은 ‘탄핵 열차’의 주행 시간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적폐가 선명하게 들춰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직장인 한재영(36)씨는 “친박 집회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 반공주의나 박정희에 대한 맹목적인 향수가 얼마나 뿌리 깊고 만연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며 “폭력까지 선동하는 일부 정치인이나 법조인의 민낯이 드러난 것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탄핵 인용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과제에 집중해야 할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92일은 성숙의 시간이기도 했다. 최원진(33)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등 시민들의 요구가 현실이 됐다. ‘모여서 요구하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집단 경험을 한 셈”이라며 “애초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로 주로 쓰였던 ‘저잣거리 아녀자’, ‘미친×’ 같은 표현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성혐오나 성차별 문제에 대한 담론으로 나타난 것도 민주주의 안에서 소외집단이 사라지는 새로운 계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헌법학자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한국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해도 ‘내려오라’고 하지 못하는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였다”며 “헌재가 인용 결정을 내리면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의 말보다 100배나 힘이 있을 것이다”라고 헌재의 역할을 강조했다.
9일 종교계는 헌재의 바른 판결과 이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는 ‘대국민 호소문’에서 “혼란 중에 정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들이 감행되고, 민심으로 위장해 사법 근간을 흔드는 부끄러운 폭력의 민낯도 목격했다”며 “천주교회는 헌재가 공정한 판결로 법치주의 실현과 민주주의 도약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한불교조계종도 ‘국민화합을 위한 호소문’을 발표해 “수백만의 국민이 함께 이룬 장엄한 촛불의 바닷속에서 우리는 국민 다수의 마음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를 이미 확인했다”며 “헌재는 국회의 탄핵 소추와 민심을 살피고 헌법정신에 따라 엄정한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가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 주시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안영춘 김지훈 김규남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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