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동대지진피해 이후, 한국 내에서는 다케시마(독도)문제에 대해 다양한 억측이 이뤄지고 있다. 올 봄의 교과서검정에서 일본 중학교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문제가 어떻게 기재될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에게 인도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일본은 다케시마(독도) 기술을 피할 것인갯. 「지진피해에 의한 인도적인 지원과 다케시마(독도)문제는 별개다」와 같은 서로 다른 의견이 인터넷상에서 혼재하고 있다. 한국 측은 다케시마(독도)는 한국령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이를 기준으로 일한관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는 다케시마(독도)문제에 관한 저서가 간행됐다. 2월 22일자 한국 연합뉴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한국의 정부기관인 「동북아시아역사재단」(독도연구소)이 『독도, 울릉도에서는 보인다』를 간행하고,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하는 일본 측의 논거를 전면적으로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이중에 연합뉴스는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연구자인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가 그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삼은 것이 독도는 울릉도에서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면서, 동북아시아역사재단이 울릉도에서의 현지관측을 1년 반 실시하여「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현지관측은 독도(이하 다케시마)가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와카미 씨는 「독도는 울릉도에서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케시마(독도)문제가 일어난 1950년대, 일한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성립)의 「보인다」는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했으며, 외무성 조사관인 가와카미 겐조 씨는 계산을 통해 울릉도에서 「다케시마(독도) 꼭대기의 한 점이 보이는 건 130미터(竹島の最頂部の一点が見えるは一三〇メートル)」, 「이를 섬으로 인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200미터 이상일 필요가 있다(これを島として認め得るためには二〇〇メートル以上のぼる必要)」(『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竹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281페이지)고 했다.
이는 1952년 1월 18일, 한국정부가 「이승만라인」을 선언하고, 일본령인 다케시마(독도)를 이 안에 포함시킨 것에 기인한다. (이에)항의한 일본정부에 대해 한국정부는 『세종실록지리지』의「보인다」를 근거로 다케시마(독도)는 한국령이라 했던 것이다. 그때 한국정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우산∙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해중에 있다. 두 섬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않다. 바람이 있고 맑으면 곧 멀리 바라다보인다(于山・武陵二島。在県正東海中。二島相去不遠。風日清明則可望見)」의「바라다보인다(보인다)」를 울릉도에서 본 우산도의 기술로 해석했다. 울릉도에서 다케시마(독도)갭보이기」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우산도는 다케시마(독도)임에 틀림없다며,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불법점거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삼은 것이다. 1950년대, 일한이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다퉜을 때의 쟁점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우산도가 다케시마(독도)인지의 여부에 있었다.
이를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는 가와카미 겐조 씨 자신의 울릉도「200미터 이상」에서는 섬으로서의 다케시마(독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고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는 울릉도에서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독단하고, 울릉도에서 실제로 현지 관측하여「보였」으니까 다케시마(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보인다」가 쟁점이 된 건『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우산도가 계쟁 중인 다케시마(독도)였는지의 유무였다. 이를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는 쟁점을 울릉도에서는 다케시마(독도)가 「보이는」지의 여부로 바꿔치기해 「보이기」 때문에 다케시마(독도)는 한국령이라고, 자국민까지도 속이는 망설(妄説)을 날조한 것이다.
이 『세종실록지리지』의 「보인다」에 유래하는 논쟁의 문제점은 이미 2004년에 필자의 저서인『다케시마는 일한 어느 쪽의 것인가(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문춘신서)에서 밝혔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보인다」는 한반도에서 본 울릉도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우산도는 1696년의 안용복에 의한 밀항사건 이후, 박석창의 『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1711년)에 의해 울릉도 동쪽 2킬로미터쯤에 있는 죽서(竹嶼/소위 우산도=于山島라 표기)로 여겨지며, 우산도라는 이름도 이후 학술적 평가가 높은 지지(地誌)에서는 사라졌다.
그 하나가, 영조40년대(1760년대)에 편찬된 『흥지도서(輿地図書)』(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간행)의 해당기사에는 우산도가 기재되지 않았고, 「欝陵島。一羽陵。島在府東南海中。三峯岌●(ヤマヘンに業)●(テヘンに掌)空、南峯稍卑。風日清明則峯頭樹木山根沙渚歴々可見(欝陵島。一つに羽陵と言い。欝陵島は府の東南の海中に在る。三つの峯は岌●(ヤマヘンに業)として空を●(テヘンに掌)(ささ)え、南峯がやや低い。よく晴れていれば峯頭の樹木や山根の沙渚が歴々と見える)」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의 기술에서 유래하는「보인다」는『흥지도서(輿地図書)』에서도「날씨가 맑으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인다(よく晴れていれば峯頭の樹木や山根の沙渚が歴々と見える)」고 답습되어 울릉도를 설명하는 기술로 「보인다」가 사용되고 있다. 「보인다」는 한반도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한반도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하고 있는 건, 김정호의 『대동지도』(1864년 성립)이다. 『대동지도』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맑은 날에는 보인다」고 기술되었던 부분이「본현에서 맑은 날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마치 구름이 움직이는 것 같다(自本県天晴而登高望見則如雲気)」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현(本県)이라는 건 울릉도를 관할하는 울진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울진현의 높은 곳에서 바라보이는 건 울릉도이다.
한국의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는 문헌비판을 게을리 한 채 문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울릉도에서 현지 관측을 하는 것과 같은 전대미문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보인다」는 육지에서 울릉도갭보인다」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필자의 저서에서도 밝힌 것처럼『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됐을 때는 규식(規式=조사기준)에 의거하여 편찬되고 있고, 도서(島嶼)의 경우는 관할관청으로부터의 거리와 방향을 나타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울진현의 정동해중(在県正東海中)」구절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닷속에 울릉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풍일청명 측가망견(風日清明則可望見)」은 소관하는 울진현에서「보이는」거리에 있다, 고 해석하는 것이 규식(規式)에 따른 해석방법이다. 실제로 우산도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세의 지지(地誌)에서도「보인다」는 표현은 답습되어 울릉도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증좌이다.
이를 한국 측에서는『세종실록지리지』의「보인다」를 울릉도에서 본 우산도의 기술로 왜곡하여 울릉도에서 「보이는」건 다케시마(독도)뿐이기 때문에 우산도는 다케시마(독도)임에 틀림없다고 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이 「보인다」를 과학적으로 실증하기 위해 1년 반이나 되는 현지 관측까지 실시했지만, 이는 문헌비판을 소홀히 한 비과학적인 방법이었다. 동북아시아역사재단은 『독도, 울릉도에서는 보인다』를 간행한 것으로 우산도가 현재의 다케시마(독도)와는 관계없다고 했던 사실까지도 입증해버렸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사실이 역력하게 「보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정부산하의 동북아시아역사재단은 허위역사를 날조하여 자국민을 속이고, 국제사회까지도 기만하려고 하고 있다.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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