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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다행이다”는 누구의 언어였을까? / 길윤형

등록 :2016-10-27 18:21수정 :2016-10-2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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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애초 이번 칼럼에선 책 한권을 소개할 예정이었다.

얼마 전 일본 신문 서평을 통해 가토 요코 도쿄대학 교수의 <전쟁까지>(아사히출판사)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왜 일본은 자국보다 수십배나 강한 미국과 일견 무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선택한 것일까. 책은 고등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것 같은 친절한 필체로 일본이 전쟁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인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그에 대한 국제연맹의 ‘리튼 보고서’ △1940년 9월 체결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 동맹 △1941년 12월 개전 직전 이뤄진 미-일 교섭 등 3가지 결정적인 순간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결정적인 순간’에 저지른 연속된 실패가 결국 일본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세상엔 좋은 판단이 있고, 나쁜 판단도 있으며, 때론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나쁜 결과를 내놓게 되는 판단도 있다. 일본이 당시 내린 판단들은 단기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국익에 충실한 것이었고, 국내의 지지도 높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을까. 이를 정책의 합리성에 대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불렸던 최순실의 ‘국정 농단’ 의혹이 상당 부분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공개됐고, 이를 배겨내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박 정권이 내놓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정책 판단에 대해 그 진의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거듭해왔다. 저급하기 짝이 없는 ‘통일 대박’이라는 구호,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개성공단 전면 폐쇄, 국정교과서 강행,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까지. 우리 모두는 “박 대통령이 무슨 생각일까”를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정권이 나름 어떤 합리성에 기초해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 판단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라 결론이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근혜라는 저 ‘괴물’을 대통령으로 받들어 올린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불행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책의 정통성에 대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2014년 3월이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그 무렵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를 “수정할 뜻이 없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내놓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국장급 회의가 시작된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다행이다”라는 대통령의 육성이었다. 외교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이 분야의 참모들과 숙의를 거쳐 나와야 하는 우리 정상의 반응은 정제된 외교적 언어인 아베 총리의 이번 판단을 “평가한다”였기 때문이다. “길형, 사실 ‘다행이다’가 우리 쪽 선수들이 쓰는 표현은 아니잖아?” 당시 대사관 고위 관계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다행이다’는 누구의 언어였을까. ‘통일 대박’은 누구의 언어였으며, 모든 이를 당혹스럽게 한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 ‘암 덩어리’ 따위의 표현들은 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단어일까. 이젠 박 정권이 그동안 내려온 ‘모든’ 판단의 정통성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정부의 정책 합리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옳다고 믿었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려 쟁취해낸 그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래선 국정 운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조속히 하야해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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