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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속 신라 - 귀신사(歸信寺)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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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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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사에서는 귀신사를 ‘백제 속 신라’라 하기도 한다.

전주에서 금산사 가는 길목인 김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를 어떤 분들은 귀신이 사는 절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믿음으로 귀의하는 절’, ‘믿음이 돌아오는 절’이란 뜻으로 원래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하나로 아우르는게 국정의 첫 번째 과제였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보다는 종교적으로 풀려고 했다. 그래서 우주철학을 설파한 화엄경을 통해, 원래 하나였던 신라, 백제, 고구려가 잠시 나뉘어 있었지만 이제 다시 하나가 되었다는 화엄사상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 문무왕은 676년 당나라에서 화엄의 대가로 날리던 의상스님을 급히 귀국하게 해서, 부석사를 창건케하여 베이스캠프로 삼고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전국에 10개의 사찰을 중심으로 화엄을 펼치게 한다. 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은 주로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지대인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져 행여 있을지 모르는 백제나 고구려의 유민들을 감시하고 위무하려는 것이었다.

백제의 심장부인 김제 만경 평야에 있는 귀신사는 옛 백제 사람의 민심을 정치적 혹은 사상적으로 아우르고자 창건한 절이다. 그러므로 귀신사 창건을 맡은 총감독은 백제사람이 아닌 경주에서 온 스님이나 목수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귀신사의 건축조형은 신라 감독의 시각대로 철저하게 통일신라의 조형을 따랐던 것이다. 부석사나 불국사처럼 경사진 산자락에 여러 단의 석축을 쌓고 수직적인 건축조형으로 세워졌다.

귀신사는 마을 고샅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면 작은 석축계단이 나타나고, 느티나무 아래 돌계단을 올라가야 대적광전이 나온다. 대적광전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삼층석탑이 있는 터가 있는데, 이처럼 귀신사는 산자락에 바짝 붙어있고 여러 개의 단으로 나뉘어 있다. 또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작은 규모로, 기둥과 기둥 사이의 칸살이 좁고, 기둥이 길어서 위로 우뚝 솟은 듯한 수직적 조형이다.

그러나 금산사나 선운사 미륵사지를 보면 넓은 평지의 도량에 옆으로 기다란 모양의 수평적 조형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옛 백제지역의 절들은 더 넓은 평지를 확보하기 위해 연못을 메우기도 했다. 미륵사지나 선운사 등 백제지역 사찰들은 연못을 메워 부처님을 모셨다는 창건설화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이 있다. 시각 예술에서도 음악의 3요소 중 하나인 하모니 즉, 주변과의 조화이다. 그래서 평야가 많은 옛 백제지역은 평지에 어울리는 수평적 조형으로 대개 옆으로 기다란 건물형태이다. 반면 옛 신라지역은 산들이 많아 거기에 맞는 수직적 건축이 많이 조성되었다. 귀신사는 바로 곁에 있는 금산사나 미륵사지 그리고 선운사와 전혀 다른 건축조형이다.

귀신사의 창건으로 화엄사상이 활발하게 펼쳐질 줄 알았지만, 백제 유민의 메시아인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신앙을 펼치기 시작하자 귀신사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귀신사는 1000여년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중창을 할 때 원래의 신라식인 수직적 조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조선시대이고 천년이나 흘렀는데 왜 백제식 수평적이 아니고 신라식 수직적 조형으로 다시 지었을까? 아마 건물은 불타버렸어도 가람의 터와 입지에 맞추려고, 어쩔 수 없이 옛날처럼 따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1300여년 동안 이방인 같은 백제 속 신라 건축조형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는 귀신사이다.

그래서 귀신사를 ‘백제 속 신라’라 부르는 것이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교회 건축이 몇 백년 되었다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와~우~!” 감탄을 하면서, 우리나라 절터가 천년이 넘었다, 절 집이 몇 백년이 되었다 해도 별 감흥없이 무심코 넘기는 이유는 뭘까?

뭐든지 서양것은 우리보다 좋은 것이라는 선입관에 완전히 길든 때문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이흥재<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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