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경기도 파주, 동두천, 평택 등에 형성됐던 미군 기지촌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서 정부가 직접 피해 여성들을 관리·통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이 나왔다.
이 소송은 지난 2014년 6월 미군 기지촌 ‘위안부’ 피해 여성 122명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직접 기지촌을 조성하고 ‘기지촌 정화대책’ 등을 통해 성매매 사업을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과 성매매 알선업자 등에 의한 강간, 구타, 약물 투여, 강제낙태, 감금 등의 범죄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어 신체·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위법하다’는 주장이다.
13일 오후 2시에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에서 열린 이 사건 8차 변론기일에서는 당시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을 직접 진료했던 임상병리사와 간호사 등의 증언을 담은 영상에 대한 검증과 영상 촬영자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이 영상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취재를 해온 파주현장사진연구소 소속 조모(43)씨가 다큐멘터리 제작 목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영상에서 강모씨는 “당시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하던 병원이 16개 정도 있었다”며 “정부가 그 여성들을 관리하라고 지정해준 곳이었다”고 증언했다. 강씨는 1960년대 경기도 파주에 소재한 한 개인병원의 임상병리사로 있다가 1972년부터 경기도 파주군에 소재한 성병관리소 검사원을 지냈다.
그는 또 “일주일에 한두 번 요일을 지정해놓고 검진을 받았다. 당시 보건증을 갖고 있던 여성의 수만 해도 4~5천명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파주 소재 산부인과 간호사와 1980년대 기지촌 ‘위안부’ 여성 성병 관리소 간호사 일을 했던 이모씨는 “성병 관리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하는 검진대장이 있었고, 검진 대장에서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을 지칭해 ‘위안부’라고 지칭했다”고 증언했다.
해당 영상을 촬영한 오씨는 증인신문에서 원고측 변호인이 “미군에 비해 위안부 여성의 수가 부족하니 전국적으로 여성들을 많이 모집해야 한다고 했던 증언도 있었다는데 그 말은 누가 했느냐”고 묻자 “당시 포주였던 사람이 했다. 전국적으로 네트워크를 연계해 모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날 검증한 영상과 오씨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은 당시 정부가 직접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관리했다는 내용의 원고 측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온 증언들이다.
이밖에 한국 정부가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성매매 및 그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조장했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1978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 ‘인권유린과 국민보건의 사이’라는 제목의 보도에 따르면 성병에 감염된 여성은 ‘낙검자’라고 불리며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져 완치될 때까지 감금됐다. 원고들은 이러한 수용소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기지촌 ‘위안부’를 대상으로 애국교육도 수시로 실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을 낸 원고들은 “국가가 미군과 함께 월 1회 위안부들을 기지촌 내 클럽 등에 모아놓고 우리를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민족주의자’라고 치켜세우고 노후보장 등을 약속하기도 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9차 변론은 오는 7월 8일 오후 2시에 진행된다.
강경훈 기자
편집국 법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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