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장생포 고래문화광장에 있는 귀신고래 모형. 과거 이 귀신고래는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먹이활동을 하다 11~12월 동해를 지나 동중국해까지 가서 새끼를 낳고 이듬해 3~5월 다시 오호츠크해로 북상하는 과정에 울산 앞바다에서 모습을 보였다. 남획으로 1977년 이후 국내 바다에서 자취를 감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의 고고학자 겸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는 1912년 고래를 찾아 일제강점기의 울산 장생포까지 왔다. 그는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를 학계에 보고해 전세계에 알렸다. 귀신고래는 1977년 이후 국내에서 ‘귀신처럼’ 자취를 감췄고, 과거 나타났던 자리에 ‘울산귀신고래회유해면’(천연기념물 제126호)이란 이름만 남아 있다.
포경 중단 뒤 쇠락하던 포구
7년 전 고래특구 지정 활기 찾아
올해 고래축제 66만명 발길
다른 그물에 걸려 죽은 혼획
고래고기집 70여곳 성시
구청 ‘고래밥상 홍보관’ 차려
수요 늘어나니 불법 포획 조장
“먹기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자취 감춘 귀신고래 돌아봐야”
■ 장생포에 다시 늘어난 고래고기집
울산 남구 장생포항은 우리나라의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다. 국내 고래잡이는 1889년 대한제국이 러시아와 함께 포경기지를 세우며 시작됐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멸종 위기의 고래 보호를 위해 상업포경을 금지하기 전까지 장생포항에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로 부와 풍요가 넘쳐났다. 포경 중단 이후 마을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1만명을 넘던 주민은 90년대 들어 1000명을 밑돌았다. 그물에 걸려 죽은 이른바 ‘혼획된’ 고래를 경매받아 해체해 파는 고래고기집 서너곳만이 고래잡이 마을의 명맥을 겨우 이을 뿐이었다.
이랬던 마을이 2000년대 후반부터 고래로 인해 부흥하고 있다. 2008년 7월 지역특화발전특례법에 따라 정부가 장생포 일대 162만㎡를 국내 유일의 고래문화특구로 지정하고, 2005~2009년 특구 안에 고래박물관과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 고래생태체험관에다 고래바다여행선까지 들어오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올해 5월엔 장생포의 옛 고래잡이 마을을 재현한 고래문화마을도 문을 열었고, 앞으로 150m 높이의 호텔형 고래등대도 들어설 계획이다. 이재석 울산 남구 고래관광과장은 “고래박물관과 생태관 관람객이 한해 60만명이 넘고, 올해 고래축제 때 66만명이 장생포를 찾았다. 포경 중단 이후 줄어들던 주민 수도 1300여명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 고래축제가 문제?
관광객이 늘면서 고래고기집도 늘어났다. 장생포 주민 정아무개씨는 “고래고기만 파는 전문점이 20곳이 넘고, 다른 메뉴와 함께 고래고기 파는 식당까지 치면 70여곳이다”라고 했다. 고래를 잡지 못하는데 고래고기집은 어떻게 늘어난 것일까?
지난 5월 말 울산고래축제 때 울산 남구의 ‘고래밥상 홍보관’ 내부 모습. 고래수육과 고래조림, 고래육포 등의 갖가지 고래고기 음식을 모형으로 전시해, 환경단체들로부터 고래고기 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제포경규제협약에 따라 국내 수산업법 등은 인위적으로 고래를 잡는 행위는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고기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고래가 걸려 죽는 ‘혼획’에 대해선 해양경비안전서가 고래유통증명서를 발급해 고래고기를 팔고사는 것을 허용한다.
이 덕에 장생포를 포함한 울산에서는 포경 금지 이후에도 제한적이나마 고래고기를 팔고 사먹을 수 있었다. 장생포 고래문화특구 지정에다 1995년부터 해마다 장생포에서 열리는 울산고래축제에 관광객들이 모여들면서 이 일대 고래고기집들도 성시를 이루게 됐다.
울산환경운동연합은 지난 5월 말 장생포 고래축제 현장을 모니터링하며, 축제를 주최한 울산 남구가 고래밥상 홍보관을 열어 ‘고래고기의 12가지 맛’과 함께 수육·조림·육포 등의 고래고기 음식을 홍보하고, ‘고래문화’를 내건 단체가 고래고기를 파는 것을 확인했다. 모니터링에 참여한 장김미나 활동가는 “축제 행사장에서 고래고기가 팔리고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좋아해서든 호기심에서든 고래고기 소비가 늘 수밖에 없다. 그 수요를 맞추려면 혼획으론 모자라 불법을 무릅쓰고라도 고래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재석 남구 고래관광과장은 “고래밥상 홍보의 중점은 고래고기가 아니고, 멸치, 고등어 등 고래가 먹는 먹이를 주재료로 한 음식”이라고 해명했다.
울산해양경비안전서는 올해 고래축제를 전후해 고래를 불법포획한 혐의로 어선 2척의 선원 14명을 붙잡아 5명을 구속했다. 이들이 잡은 고래는 적발된 것만도 지난해 11월부터 올 4월까지 밍크고래 10마리와 돌고래 20여마리다. 윤성기 울산해경 해상수사정보과장은 “고래축제를 앞두고 불법포획이 성행하는 편이다. 작살을 던지기 편하게 배를 개조해 전문적으로 고래를 잡는 어선만도 울산에 10척 정도 된다”고 밝혔다. 그는 “고래를 잡으면 현장에서 해체하고, 고래는 물론 포획장비까지 부표를 띄워 바닷속에 숨겨두고 들어와 적발이 쉽지 않다. 구속돼도 초범은 두세달 뒤 집행유예로 나오고, 재범 이상이라도 1년 남짓 지나면 풀려나와 또다시 고래잡이에 나선다”고 말했다. 밍크고래 한 마리가 몇천만원에서 1억원에까지 거래되며 수요가 끊이지 않는데, 처벌은 약하니 불법포획 근절이 어렵다는 것이다.
■ 혼획 허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영애 울산환경교육연구소 대표는 최근 “혼획된 고래의 유통을 허용하는 정책이 (혼획을 빙자한) 불법포획을 부추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울산대 고래연구소와 한국고래문화학회가 연 고래학술대회에서 “올해 국제포경위에 보고된 자료에 고래 혼획의 87%가 한국과 일본에서 집중 발생한 것으로 나왔다. 혼획 여부 판정이 육안과 금속탐지기에만 의존해 허술한데다 혼획된 고래의 유통을 허용하는 것이 문제다. 혼획을 엄격히 감별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감시체계와 어구 개발이 필요하며, 고래고기 유통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두해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장은 “혼획이나 좌초·표류된 고래에 대한 구조나 회생 조처를 의무화한 법규정도 있다. 하지만 어민이 혼획된 고래를 구조하려면 그물이나 어구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그물에 걸린 고래가 죽도록 내버려뒀다가 신고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현실에선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처럼 포경에 반대하는 나라에선 혼획이 발생한 어장은 고래 보호를 위해 아예 폐쇄해 버린다”고 말했다. 안 소장은 “우리나라 해역에서 이미 참고래와 귀신고래 같은 대형 고래는 대부분 사라졌는데, 머잖아 밍크고래마저 보기 힘들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와 달리 이재석 남구 고래관광과장은 “일본,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선 자국 이익을 위해 고래를 잡기까지 하는데, 혼획된 고래의 유통마저 막을 일은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정의필 울산대 고래연구소장도 “고래는 해양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과학적 조사에 기반한 적절한 개체 조절은 필요하다”고 하고, 주봉현 한국고래문화학회장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사냥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듯 고래고기는 오래된 전통 식문화의 하나”라며 이 과장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정 소장과 주 회장은 장생포의 고래축제나 고래문화특구 운영과 관련해 고래 식문화보다는 고래 친화적인 다양한 양식의 문화·관광 콘텐츠 개발을 더 강조했다. 정 소장은 “장생포 고래문화특구에 하드웨어 인프라는 잘 갖춰졌는데, 고래를 테마로 한 컴퓨터 게임이나 스토리텔링, 디자인, 음악 등 문화예술 방면의 다양한 소프트웨어 개발도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 회장은 “경제적 관점에서도 고래 식문화나 일시적인 축제보다는 고래와 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상시적인 볼거리와 관광사업 쪽에 실익이 있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 울산생명의 숲 사무국장의 지적은 시사점을 준다. “고래도 새끼를 낳으면 사람처럼 미역을 뜯어먹는다. 장생포 고래축제와 고래문화특구가 전통성과 문화성을 갖추려면 그동안 고래 덕분에 어떤 풍요를 누렸고 어떤 문화를 가꿔왔는지 돌아보며, 희생된 고래들에게 감사하고 추모할 줄 알아야 한다. 귀신고래가 자취를 감춘 것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할 일도 찾아봐야 한다.”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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