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유일여고지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본군 ‘위안부’. 그 실상을 처음으로 낱낱이 알린 분이 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다. 최초 증언일인 1991년 8월 14일은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되었다. 할머니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으며, 각종 시위와 항의 집회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 제작을 진행하는 김판수 선생을 만나 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소개 부탁드려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인 ‘한국 정신대 대책 협의회’에서 12년째 자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는 어떤 건가요.
“위안부를 제대로 표현하자면 ‘일본 제국 침략 전쟁 범죄 일본군 강제 연행 종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라고 해야 합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1932년부터도 위안소가 운영됐고, 피해자가 있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태평양 전쟁 때 끌려가셨습니다. 말하기 힘든 치욕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김학순 할머니께서 ‘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라고 공개 증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인류 보편적인 인권이 파괴된 전쟁 범죄입니다. 일본이란 국가가 저지른 범죄죠. 일본이 불의한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고 얘기하려면 김학순 할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를 세우기로 했고, 맨 처음 유일여고 도서관에 세워진 것입니다.”
–기림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많은 여성들이 인격을 짓밟히고 인권이 완전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된 것을 우리가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비참하고 불의한 역사를 모두가 기억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모임의 연대가 이어지려면 상징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림비 제작 중 힘들었던 일이 있는지.
“제안은 제가 했더라도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저 혼자 힘들었다고 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힘들었다는 말씀이신가요.
“힘들었다기 보다는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웃으로서 이 문제는 꼭 같이 해결해야겠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위안부’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만든 말입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하면서 힘이 드니까 우리가 가서 위로해 주자,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죠. 하지만 누가 그 험악한 전쟁터에 자진해서 나갔겠습니까. 그들의 강요와 억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것이 일본군 ‘위안부’의 본질입니다. 일본이 전쟁 도중 저지른 죄, 전쟁 범죄입니다. 불의한 역사는 정의롭게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그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평화로운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이것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고,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는 총 3기를 제작했다. 전주 유일여고에 이어 서울에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세웠다. 남은 한 기는 유일희망나비에서 올해 8월 14일에 전주시에 세우고자 추진 중이다.
기림비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얼굴이 새겨있고, 할머니가 생전에 남긴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016년 3월 16일 기준, 44분이 생존해 계신다.
글=김선정·박지현·안혜란·임소희(유일여고 2), 사진=임소희(유일여고 2)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유일여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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