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몇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나라사람들은 상당수가 우리나라가 거의 선진국 수준이 되었거나 이미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선진국의 기준자체가 소득수준, 의료, 문화, 사회보장, 교육 등 여러 가지로다르고 다소 모호한 면도 있지만, 선진국이란 말 그대로 ‘앞서가는 나라’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내가 생각하는 선진국은 ‘남보다 앞서서 뭔가전혀 새로운 장르를 이 세상에 내놓는 나라’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어떤 장르를비교적 빨리 수용하여 잘 따라할수 있는 나라는 선진국근처에는 갈수 있지만 진정한 선진국은 아니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르 자체를 열어가는 ‘창조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런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중하나가 ‘자기 나라말로 학문하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고유의 말이 있고, 세계 어느 글보다도 훌륭한 글인 ‘한글’이 있고 그 말과 글로 가르치고배우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세히 안을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말로 학문을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럴생각도 없는 듯하다.
해방 후 우리말로 교육을 시작한이후에도 새로운 용어나 개념이 생길 때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고심해서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나가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미국을비롯한 서구에서 공부한 교수들은대부분 영어를 그대로 쓰고 토씨만우리말로 하는 식으로 학문을 한다.
순수한 우리말로만 얘기하면 뭔가의미전달이 명확하게 되지 않는 듯하여 꼭 괄호 속에 영어를 써넣어야개운하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확인’이라고 하지 않고 ‘팩트파인딩’이라고 한다.
이렇게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요즘은 영화제목도 모두 영어를영어 알파벳 대신 한글로 표기하는식으로 쓰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고,온 국민이 우리말도 채 익히기 전에 영어배우기에 바쁘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제대로 된 ‘영한사전’이 없다. 민중서관의 ‘엣센스 영한사전’을 비롯해 무슨 무슨 출판사에서 나온 영한사전들이수두룩한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 사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전부가 ‘영일(英日)사전’의 한글본일 뿐 처음부터 영어를 우리말로 바로 옮긴 사전은 영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콧이 1891년에 펴낸 영한사전(English Corean Dictionary)과 같이19세기말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조선인과 함께 만든 것이 전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재의 영한사전을 자세히 보면 우리말 번역을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국적불명의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일본사전의 일본어 한자표기를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지 않고 무성의하게 그냥우리식 발음으로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학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전편찬에서조차 이런 식이니 개별 학문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용어와 개념어들의 창조가 거의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학교에서, 산업현장에서,일상생활에서 우리말 어휘는 점점사라져가고, 외국어가 그 자리를 메워 가다 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차츰 우리말로 생각을 할수 없게 되고 중요어휘가 외국어이니 개념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게 되는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결코 선진국의 정신적인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앞서 가는 나라를 바짝 쫒아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추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수천년동안 중국문물을 받아들이고 따라 하기 바빴고근세에 들어서는 일본을 따라하고미국을 비롯한 서양 따라가기에 정신없이 매진하여 이제 제법 많이 따라 붙었지만, 거기서 끝이다. 진정한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각 분야의 모든 용어를 우리말로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우리말로 고차원의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거기서 남보다앞 선 새로운 분야를 창조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창조경제’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답이나온다.
<나운택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