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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듯 이어진 길, 우리네 삶 같구나

등록 :2016-03-23 20:30수정 :2016-03-2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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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입정동의 한 골목길. 다방 여주인이 커피보자기를 들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서울 을지로 입정동의 한 골목길. 다방 여주인이 커피보자기를 들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매거진 esc] 을지로 골목 걷기
이병학 여행담당기자, 을지로 빛바랜 골목을 걸으며 도시 서민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다
서울 중구 을지로 뒷골목은 골목길 자체가 생활·경제·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을지로3가~4가 일대에 낡고 찌들었으나, 굳세게 버티며 옛 빛을 발하고 있는 골목들이 가득하다. 유산의 축적은 진행형이다. 낡아 무너져가는 지붕과 담벼락, 골목마다 쌓인 육중한 철재들, 자르고 갈고 뚫고 이어붙이는 작업 소음과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 속을 오가는, 손수레·트럭·오토바이·자전거며 밥집·다방 배달원들이 다 그렇다. 쇠락해가는 골목이지만 수십년 된 가게들이 건재하고, 한편에선 젊은 예술가·문화운동가들이 둥지를 틀고 내일을 꿈꾸는 곳이기도 하다. 한나절쯤 천천히 걸으며 기웃거리며,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을지로 뒷골목 풍경 속으로 들어가보자. 뚫린 듯하다 막혀 있고, 없는 듯하다 다시 길이 이어지는 빛바랜 골목들에 도시 서민의 과거와 오늘, 사람살이가 다 담겨 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해 세운상가 거쳐 4가역 주변까지, 을지로와 청계천 사이 골목들을 들여다봤다.

타일·도기 가게들과 식당·호프집들 즐비한 첫 구간은 옛 골목과 현대식 고층건물이 혼재된 모습이다. 군만두로 이름난 66년 된 중국집 오구반점과 80년 된 구둣방 송림제화를 지나 우회전해 걸으면 오른쪽에 을지로동 주민센터가 나온다. 4월 말부터 도보여행자를 위한 ‘을지유람’ 지도(현재 제작중)를 얻을 수 있다.

원조녹두(빈대떡)·동원집(순대국·감자국)·우화식당(코다리찜) 등 오래된 식당들이 골목골목 포진한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는 곳은 ‘노가리 골목’이다. 저녁마다 인파가 몰려들어 노가리·골뱅이를 안주로 생맥주잔을 치켜드는, 만선호프·초원호프·뮌헨호프·마부호프 등 ‘호프집’이 즐비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로 실내 손님이 주류지만, 따뜻해지면 골목 전체에 온통 호프집 야외탁자들이 깔리고 주당들로 북적일 터다.

낡아 무너져가는 지붕과 담벼락
바삐 오가는 손수레, 밥집 배달원
연탄불에 메추리 구워 소주잔 나누며
“와서들 한잔씩 해. 다 한 식구니까”

 을지로 골목길 한 공업사 앞에서 주민들이 메추리 구이에 소주잔을 나누며 휴식시간을 누리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을지로 골목길 한 공업사 앞에서 주민들이 메추리 구이에 소주잔을 나누며 휴식시간을 누리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공구가게 늘어선 청계천변으로 나서면, 왼쪽으로 수표교 터(나무다리로 재현)가 보인다. 수표교는 세종 때 청계천 수량을 재기 위해 돌기둥(수표)을 설치했던 돌다리다. 옛 돌다리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겼고, 수표석은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갔다. 지하철 3호선이 지나는 도로를 건너면 입정동. 을지면옥·양미옥 등 유명 식당들이 먼저 눈에 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망치 소리, 드릴 소리, 압축공기 내뿜는 소리, 용접기 불꽃 튀는 소리 요란한 공업사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공업사들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끝내 어둠침침한 막다른 곳에 찔러넣기 일쑤다. ‘○○빠우’ ‘○○시보리’ ‘○○정밀’ ‘○○금속’…, 낡고 찌그러진 옛 페인트 간판들이 빼곡하고, 그 아래 담벽으로는 ‘즉시 대출’ ‘못 받은 돈 해결’ ‘○○카바레’ 같은 낡은 홍보물들 덕지덕지한 골목들이다.

을지로 뒷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후미진 골목길과 페인트 붓글씨 간판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을지로 뒷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후미진 골목길과 페인트 붓글씨 간판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자르고 갈고 붙이는 쇳소리와 매캐한 냄새 진동하던 골목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는 때는 점심시간이다. 정오 가까워지자 신문지로 덮은 음식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배달에 나선 아주머니들이 줄을 잇는다. 점심 뒤엔 커피 보자기를 든 아주머니들이 바통을 넘겨받는다. 2층 작은 공간에 탁자 5개를 두고 23년째 영업 중인 50대 응접실다방 여주인도 그중 하나다. 그는 “10년 전엔 ‘아가씨’ 서너명을 둬도 다 배달하기 벅찼는데, 요즘은 혼자 배달해도 시간이 남는다”고 했다. 골목 안의 다방들 대부분은 주인이 혼자 직접 배달에 나서는 곳이다.

‘선반 밀링 가공’ 간판을 단 한 가게 앞이 소란하다. 드럼통을 쪼갠 화덕에 연탄불을 피워 석쇠를 얹고 구운 메추리를 안주로 소주잔이 오간다. ‘빠우’ 전문 사장님도, ‘시보리’ 전문 아저씨도, 용접하던 직원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모여들어 잔을 권하고 안주를 집어든다. “자, 와서들 한잔씩 해요. 휴시익~. 일도 쉬엄쉬엄 해야지. 우린 이 짓 자주 해요, 다 골목 한 식구니까.”

전기·조명가게가 이어지는 골목을 나서면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와 만난다.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해 지은 국내 첫 주상복합 건물이다. 70~80년대 서울 도심의 대표적 상가였던 이곳도 이제 주변 골목들처럼 낡고 빛바래 쇠락해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낌새도 보인다. 일부 젊은 예술가·문화운동가들이 잇따라 작업·전시·공연 공간을 마련해 입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싼 임대료 때문에 둥지를 튼 이도 있고, 중구청 지원을 받아 입주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청계상가 3층에 문 연, 자그마한 서점 ‘200에 20’은 지원 없이 싼 임대료 때문에 들어온 경우다. 임대료가 곧 가게 이름이다. 주변엔 ‘300에 20’도 있고, ‘800에 40’도 있다.

을지로 산림동 골목의 철강재 가게에 진열된 파이프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을지로 산림동 골목의 철강재 가게에 진열된 파이프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철판·파이프 등 철재 가게들과 조각제품 가게 이어지는 산림동 골목도 쇳조각 다루는 소리가 요란한 곳이다. 어둡고 긴 골목들의 일부 가게는 문이 잠긴 채 폐가처럼 변해가고 있다. 이런 음산한 분위기는 영화 촬영지로도 이용된다. 사채업자와 채무자 사이의 잔혹담을 다룬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이 일대에서 촬영됐다. 세운상가 주차장 부근 공업사 골목은 김 감독이 실제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라고 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틀고 지나가는 한방차 손수레에서 “기운을 확 돋워주는” 쌍화차 한잔을 사 마시며 칼칼해진 목을 달랬다. 30년째 세운상가 일대에서 칡차·보약차·쌍화차·녹각차 등 한방차 손수레를 몰고 다녀, 골목마다 단골을 거느렸다는 유우형(75)씨다.

진작부터 이름난 ‘전통아바이순대’집엔 밥때가 아닌데도 손님들이 줄을 서 있다. 옆골목의 매일 직접 만든 만두·칼국수를 내는 ‘꾸왁칼국수’집도 붐빈다. 이때의 손님은 대부분 주민이 아니란다. 녹슨 수중펌프를 수리하던 공업사 직원이 말했다. “쇳가루 먹고 사는 이곳 사람들은 밥때를 놓치는 법이 없으니까.”

도자공예 작업실 ‘퍼블릭쇼’와 실험적 퍼포먼스가 벌어지곤 하는 개방형 스튜디오 ‘슬로슬로퀵퀵’을 거쳐 골목을 나서면 지하철 5호선 을지로4가역을 만난다. 길 건너면 에폭시 제품 등 광고·판촉물 제작업소와 포장·디자인·인쇄업소들이 대세를 보이는 주교동 방산시장 들머리다. 70년 전통의 냉면집 우래옥과 64년 전통의 설렁탕집 문화옥이 이곳 골목길에 있다.

인쇄업소·제지업소들이 줄을 잇는 을지로 남쪽 구간의 탐방거리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진자료들을 전시한 고당기념관, 100년간(1916년 개업) 대를 이어 영업 중인 종로양복점, 충무공 이순신 탄생지(표석)와 조선 초기 대제학을 지낸 양성지 집터(표석), 그리고 80년간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한 옛 국도극장 터(표석) 등이 있다. 고당기념관 들머리엔 길 북쪽의 ‘노가리 골목’과 쌍벽을 이루는 ‘골뱅이 골목’이 있다.

서울 중구청에선 오는 4월23일부터 매달 둘째·넷째 토요일 오후 3시, 해설사의 안내로 을지로 골목길을 2시간에 걸쳐 걸어서 탐방하는 ‘을지유람’을 시작한다. 중구청 누리집(www.junggu.seoul.kr) 참조.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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