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천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평미군기지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기지촌 출신 혼혈인들의 삶과 그들의 절규를 담아내고자 기획취재를 진행한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몇 차례 연재한다. - 기자 말한국전쟁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남겼다. 수백만 명이 죽었을 뿐 아니라, 가족과 생계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
▲ <경인일보>의 혼혈아(混血兒) 모집(募集)광고. |
ⓒ 경인일보 |
관련사진보기 |
전쟁 직후 32만 5천여 명에 달했던 주한미군은 철수를 거듭해 1960년에는 5만 6천여 명으로 감소했다. 주한미군의 규모는 줄었지만 장기주둔이 불가피해졌다. 이로 인해 미군기지 주변엔 미군 상대 상업·위락지구, 이른바 '기지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지촌에선 혼혈인이 많이 태어났다.
한국 정부는 1954년을 기점으로 해외입양을 희망하는 혼혈아 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혼혈아 10명이 미국으로 입양 가는 것을 시작으로 해외입양은 본격화됐다. 1956년부터는 지금의 홀트복지재단 기금으로 해외입양 대상 아동 수용기관도 설립됐다.
1958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홀트씨해외양자회(홀트아동복지회의 전신)에 의해 미국으로 입양된 혼혈아가 817명에 달했다. 1960년까지 홀트재단을 통해 입양된 아동은 1731명이었다. 1962년 9월부터는 미국의 '특별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해외입양이 곤란해졌다.
당시 한국 정부가 얼마나 혼혈아 입양에 열을 올렸는지를 알 수 있는 광고(위 사진 참조)가 인천지역 언론에 실렸다. 사진은 1955년 2월 <경인일보>에 실린 광고다. 경인지역을 대표하는 현재의 <경인일보>와는 다른 곳이다.
이후 한국 정부는 혼혈인들의 국내 정착을 위해 정책 전환을 추진했지만, 실질적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지는 않았다. 혼혈인들은 정부나 사회로부터 '보이지 않은 인간' 취급을 받았다. 1981년 한국 태생의 10대 혼혈인이 미국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것이 계기가 돼 미국 의회는 한국과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 아시아지역 혼혈아동에게 미국 이민 특혜를 줬다. 당시 우리나라 혼혈인의 95%가 미국 이민을 희망했고, 대부분은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한국 정부와 사회는 혼혈아들이 성장하면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골칫거리로 여겼다. 단일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서양인'의 외모를 한 혼혈인들을 끌어안지 않았다. 해외입양과 이민 정책으로 혼혈인들을 사회와 나라에서 분리한 셈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 취급 받고, 제대로된 서류도 없이 떠나""논문을 심사하는 미국 교수에게 한국 입양기관을 통해 입양된 이들의 서류가 얼마나 많이 위조·조작됐는지 설명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거짓말하는 거면 좋겠다. 그런데 왜 2.7%의 입양인만 한국 가족을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을까?"
|
▲ 어려서 덴마크로 입양된 박영랑씨가 가족을 찾기 위해 인천시 부평구 부평4동 일대에 10월 16일 유인물을 붙이고 있다. |
ⓒ 한만송 |
관련사진보기 |
미국의 한 유명 대학에서 입양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이아무개씨가 최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이씨의 말대로 한국전쟁 이후 외국으로 입양된 이들의 정보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1977년 4월 7일 인천시 북구(현 부평구) 부평동 38-96번지에서 발견돼 인천의 한 보육원에 보내졌다가 그해 덴마크로 입양된 박영랑씨. 그가 자신의 한국 가족을 찾기 위해 최근 <시사인천>에 연락했다. 박씨는 2003년부터 세 차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 경찰청 실종아동데이터베이스에 유전자(DNA)를 등록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이 버려진 곳을 찾아가 '가족을 찾는다'는 포스터를 부착했다. 지난 10월 16일에도 포스터 수십여 장을 가져와 부평 4동 일대에 부착했다. 박씨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입양기관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박씨가 처음 입양기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정보를 전혀 얻지 못했다. 몇 년 후 다시 방문했을 때에야 부평동 38-96번지에 버려졌고, 김아무개씨가 발견해 보육원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김씨에 대해 부평구청과 주민센터 등을 방문해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했지만, 거주 유무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박씨는 "내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필수"라며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가족을 아는 것은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근본적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거울삼아 바라볼 수 있는 가족이 없다는 것에 생경한 느낌을 자주 갖는다"며 "20년 동안 가족 찾기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들은 공히 "입양기관들은 자료 소실이 빈번한 데다 잘못 혹은 허위로 기재한 경우가 많아 해외입양인들의 가족 찾기가 쉽지 않다"고 전한다.
인천시 중구 덕적도에 가면,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전쟁고아 입양사업에 한평생을 몸바쳐온 서재송(86)옹이 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스물한 살에 국립부산수산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하면서 여러 참상을 목격했다. 군 제대 후 고향에서 교사, 이장과 면 서기 등을 하다가 '메리놀외방선교회' 최분도(Benedict Zweber·미국 출신) 신부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바뀌었다.
최분도 신부는 1959년부터 30여 년 동안 인천교구 사제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낙후한 서해 도서지역에서 가난한 이와 버려진 아이들, 병든 노인, 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을 거두어 보살폈다. 서해 낙도에 배를 병원으로 개조한 '병원선'과 병원을 개원했으며 유신과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투쟁을 후원하기도 했다.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똥물 테러를 당하고 공장에서 쫓겨나 갈 때가 없자 최 신부는 송현동 성당 2층 건물을 내어 주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와 조화순 산업선교회 목사가 함께 했다. 이런 최 신부와 함께하면서 서재송 옹의 삶도 바뀐 것이다.
정부가 품지 않은 혼혈인, 대신 끌어 안은 사람들최 신부가 바다 일을 하다가 태풍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한두 명씩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집은 고아원이 됐다. 입소문이 번져 다른 지역에서까지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소아마비를 앓은 아이, 엄마 잃은 아이, 여기에 혼혈아까지, 그의 손을 거쳐 입양된 아동이 1600여 명이나 된다. 나이가 좀 들었거나 장애를 가진 경우는 미국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입양을 권하는 편지를 1000통씩 보내 입양을 보냈다.
서재송옹은 "학교에서 소풍이나 운동회가 열릴 때면 일일이 도시락을 싸줄 수가 없어서 지게꾼을 사서 밥을 실어 날랐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
▲ 서재송(우) 옹과 그의 큰 딸 서옥선씨가 미국으로 입양한 이들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재송씨는 미국으로 입양된 이들의 자료를 꼼꼼히 챙겨 놓고 있다. |
ⓒ 한만송 |
관련사진보기 |
그는 입양기관들이 입양서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과 다르게, 입양아 사후관리와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1982년부터 최 신부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을 2년에 한 번 꼴로 만났다. 1994년 '성 원선시오의 집'(옛 산곡3동 소재) 원장을 그만 두고도 몇 년에 한 번씩 미국을 방문해 한국에서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입양인에게 나눠주고 있다.
지난 9월 26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열린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콘퍼런스'에 참석한 그를 만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입양인 20여 명이 모였다.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간 사람이다.
그는 콘퍼런스를 마치고 86세의 고령에도 입양인을 만나러 미국 동부까지 갔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의 운영하던 '성 원선시오의 집'으로 입양아가 오게 된 사연과 입양 보낸 과정, 입양 후 사연 등을 쉬지 않고 설명해줬다.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5)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 신부님과 함께 혼혈아 해외 입양을 위한 일시 보호소인 성 원선시오의 집을 열었다."성 원선시오의 집엔 인천뿐 아니라 송탄, 동두천, 군산, 왜관 등 기지촌에서 호적도 없이 버려진 아이를 보호했다. 그렇다 보니, 미국에서 결혼식 초청 비행기 표를 보내오거나 친부모를 찾아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입양인들의 발길이 덕적도에 있는 그의 집까지 이어지고 있다.
|
▲ 입양(혼혈)인들의 아버지 서재송 옹 |
ⓒ 한만송 |
관련사진보기 |
지난 9월 26일 콘퍼런스에 참석한 서재송옹이 현지에서 머문 방에선 입양인 10여 명이 끊임없이 '아버지'라고 소리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온 지 하루 만에 콘퍼런스에 참석해 지칠 법도 하지만, 그는 그들과 눈 맞추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갈라진 목소리로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입양 보낸 명희씨가 수준급 실력으로 트로트 세 곡을 불렀다.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구슬프게 노랫가락을 뽑자, 이내 입양인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잠시 후 한국에서 서재송옹의 부인한테서 전화가 오자, 사방에서 '엄마, 저 누구예요'라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서로 핸드폰을 뺏어 전화하기 바빴다. 아주 어린 나이에 입양돼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니콜라스(40)는 통화는 못하더라도 매우 기쁜 표정이었다.
그는 서재송옹의 손을 거쳐 미국의 한 중산층에 입양돼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서재송옹을 만나기 위해 콜로라도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관련기사]"기지촌 여성 정보, 한국에선 왜 찾을 수 없나""미군 성접대가 애국" 정부가 '위안부' 부추겼다 혼혈 입양아의 기억 "엄마가 미군과 잠자리를..."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