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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앙금 안가신 씨름 - 스모

"초등학교 때 지금의 을지로 6가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스모 구경을 했었지."

광복 이후 한국에서 첫 스모공연이 열린 지난 15일 서울 장충체육관 2층에서 만난 홍남기(72) 할아버지가 떠올린 60년쯤 전 기억이다. 일제 때의 일이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우리 일선 학교에 스모를 강제 보급했다. 그 2년 전인 27년 12월 제1회 조선씨름대회를 앞두고는 검열을 통해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를 삭제하게 했다. '민족의식 탄압의 하나였다'고 왕년의 씨름왕 이만기 인제대 교수 등은 저서 '씨름'(2002년 대원사)에서 말한다.

세월을 훌쩍 넘어 2004년 2월 40명의 스모 선수가 이 땅을 찾았다. 일본스모협회가 주최하고 한.일의원연맹이 후원한 행사였다. 취지는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하고 문화교류를 촉진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행사장은 한국 씨름의 '안방'인 장충체육관이었다. 한국씨름연맹 본부가 있고, 서울에서의 씨름대회는 당연히 이곳에서 열린다. 그곳에 씨름판 대신 도효(土俵:스모 경기장)가 깔린 것이다. 그리고 '문화교류'라는 취지와는 다른 뭔가 어색한 분위기도 내내 흘렀다.

우선 문화교류의 우리 쪽 당사자인 민속씨름의 관계자가 아무도 초대되지 않았다. "행사 참석 여부를 묻는 팩스 한장만 달랑 왔더라"면서 씨름연맹 관계간부는 아직까지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다. 스모의 본류인 씨름을 대우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일제 때 스모로부터 당한 핍박도 잊지 않고 있는 듯하다. 반면 한 일본 언론인은 최근 한국의 한 신문 칼럼에서 씨름을 "까까머리에 팬티차림"이라고 썼다. 전통과 체계가 약하다는 저들만의 이유로 씨름을 스모와 동급에 올려놓기를 꺼리는 일본인들의 속내가 들어 있다.

그런 앙금과 시각차가 여전한 상태에서 이뤄진 문화교류의 첫 단추. 아무래도 무겁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최준호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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