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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좋은 거)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1993년 당시 이용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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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성동에서 태어난 이용수 할머니는 16살 때 다른 4명의 동네 언니들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 

1943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이할머니는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군인이 우리를 데려갔다, 당시 장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할머니는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다"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조셴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2015년 오마이뉴스 이용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