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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아, 우리는 마을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한국인인가요”

등록 :2016-01-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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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해 9월1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첫 모임을 열고 재단 건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앉은 자리 왼쪽에서 셋째가 이날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노화욱 극동대 석좌교수, 여섯번째가 필자다. 현재 재단 추진위원은 각계 인사 64명에 이른다. 김성헌 작가 제공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해 9월1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첫 모임을 열고 재단 건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앉은 자리 왼쪽에서 셋째가 이날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노화욱 극동대 석좌교수, 여섯번째가 필자다. 현재 재단 추진위원은 각계 인사 64명에 이른다. 김성헌 작가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한-베평화재단’ 구수정의 편지
‘베트남 피에타’ 동상 건립의 추진 주체는 (가칭)한-베평화재단이다. 한-베평화재단의 중심에 선 인물 중 한 명은 199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한국 사회에 처음 알렸던 구수정 전 <한겨레21> 호찌민 통신원이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추진위원장인 노화욱 극동대 석좌교수 등과 함께 한-베평화재단을 설립하는 일에 참여해왔다. 재단의 씨앗은 어떻게 뿌려졌는지, 왜 재단을 세우려고 하는지에 관해 그가 편지로 전한다.

1994년 오월, 아주 뜨겁고 습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샤자이시마스”(謝罪します, 사죄합니다). 호찌민 대학의 교정에서 우연히 마주친 일본인 노부부가 제 앞에서 신발을 벗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몇 번이고 절을 했습니다. 그해의 첫 스콜(열대성 소나기)이 죽비처럼 등짝을 후려치는데도 가지런히 벗어 놓은 신발에 빗물이 찰랑이도록 그들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훗날 한국인인 우리가 베트남으로 슬픈 순례의 길을 떠나와 끊임없이 머리를 숙이고 “미안합니다”를 되뇌게 될 줄, 그땐 몰랐습니다.

베트남 중부에서 한국군의 족적을 좇아 이리저리 헤매던 1999년, 대부분의 마을에서 저는 학살 이후 30년 만에 처음 나타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대뜸 제 손을 잡아끌더니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와 일본인이 세운 학교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군 피해자들은 독일인이 지원한 의족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거쳐간 마을 마을마다 세워진 위령비, 난생처음 대면한 한국군 증오비, 갓 태어나 이름도 얻지 못한 무명아가의 무덤 앞에서도 단단히 버티던 맷집이 거기, 빈호아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준코학교를 찾은 건 그보다 한참 뒤의 일입니다. 메이지학원대학에 재학 중이던 다카하시 준코는 1993년에 피스보트(Peace Boat)를 타고 다낭항에 기착해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인 투이보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준코는 학교가 없어 고샅길을 떠도는 맨발의 아이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일본에 돌아가 거리에서 모금운동을 벌이던 준코는 안타깝게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준코의 방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한 부모는 생전에 못다 이룬 딸의 꿈을 대신해 준코학교를 세웁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준코 왔다!”라는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마을의 조무래기들은 “준코, 준코!” 외치며 제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거기, 투이보에서 저는 제 이름이 아닌 ‘준코’로 불려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1999년 나는 베트남 마을에서
30년만에 처음 나타난 한국인
그들이 내 손 잡고 끌고간 곳은
영국·일본인이 세운 위령비와 학교

2월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조촐하게 한국 참배단 꾸려
제대로 기억하고 함께하겠다는
그 약속을 재단 설립으로 실천

뒤늦긴 했지만 베트남을 향한 한국인들의 사죄의 발걸음도 이어졌습니다. 2003년에 <한겨레21> 독자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한-베평화공원에는 이제 제법 나무들이 무성합니다. 2000년부터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매년 무료 진료사업을 펼쳐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어느덧 17기 진료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청룡부대 주둔지인 꽝남 성에서 한-베청년평화캠프를 꾸려 온 시민단체 ‘나와 우리’는 과거 학살이 일어났던 마을들에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위령비를 세우고 유치원도 지었습니다. 지난해 4월에는 ‘평화박물관’의 초청으로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들이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빈호아 마을은 인민위원회 청사가 있는 마을 입구까지만 우리의 발길을 허락합니다. 마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계는 여전히 1966년 12월의 그날 그 시각에 멈추어 있습니다. “한국군에 당하느니 차라리 미군에게 당하는 게 낫지”라는 자조 섞인 원성도 터져 나옵니다. 바로 옆 마을인 밀라이에는 미국의 양심적인 시민들의 노력으로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병원과 학교와 박물관과 공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것을 빗댄 말이겠지요. 아아, 우리는 마을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한국인입니다.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인 2015년을 기점으로 올해부터 베트남 중부 곳곳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줄줄이 이어집니다. 오는 2월에 있을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에는 조촐하게 한국인 참배단을 꾸려 참석할 예정입니다. 비록 빈손이지만 이제부터라도 기억하고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갑니다. 그 약속이 바로 ‘한-베평화재단’입니다.

지난해 9월 노화욱 극동대학교 석좌교수를 추진위원장으로 강우일·명진 등 종교계, 이정우·한홍구·방현석·권인숙 등 학계, 유홍준·이철수·임옥상·정지영 등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가)한-베평화재단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재단은 한국과 베트남이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상생과 평화의 미래를 여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아시아 지역 내 시민단체들과 연대하고 차세대 평화 인권 활동가들을 양성해 한반도 및 아시아 평화운동의 기틀을 다지려고 합니다. 그 첫걸음으로 ‘소녀상’ 작가인 김서경·김운성의 ‘베트남 피에타’ 동상 건립 캠페인과 함께 한-베평화재단 기금 마련을 위한 ‘한-베평화미술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평화박물관이 주최한 베트남 평화기행 때 한국인 방문단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도안응이아. 1966년 빈호아 학살 때 엄마 품에 안겨 있다 살아났지만 화약물이 눈에 들어갔다. 영남일보 제공
2014년 7월 평화박물관이 주최한 베트남 평화기행 때 한국인 방문단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도안응이아. 1966년 빈호아 학살 때 엄마 품에 안겨 있다 살아났지만 화약물이 눈에 들어갔다. 영남일보 제공

우리가 베트남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피해자들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한 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는 우리 내면의 폭력성을 함께 걷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과거의 기억들과 반드시 화해를 해야만 미래의 평화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베의 영혼 없는 사과에 분노하다가 불현듯 일본인 노부부의 사죄를 떠올린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저마다의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빛을 빚어내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곱씹고 또 곱씹는 통절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지 않은 반성과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과는 결국 망각과 무책임을 위한 면죄부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평화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의제로 끌어안고 동일한 아픔을 견뎌내는 이 시대 ‘수많은 준코들’의 연대에서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가)한-베평화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발기인을 모집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따뜻한 후원을 기다립니다.

사이공에서 (가)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 구수정 드림

참여문의 (가칭)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amapvietnam@gmail.com
후원계좌 국민은행 324702-04-146079 전미화(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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