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전 논란보고 빡돌아서 글쓴다.

 

사실 외교부 관계자부터 이준석까지 위안부 문제가 잘 해결된 진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차마 말못하는 부분이 있는것같아 썰풀어본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알겠지만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 이 있었는지 여부다.

 

 

우리측은 일본군이 직접 개입해서 위안부 할머니를 납치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것이고

 

일본측은 위안부 모집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설령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문제가 있었다고하더라도

 

일본군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일본이 이런식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실제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징집했다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이 얘기하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부들부들하며 친일 매국노 쪽바리라고 외칠 뿐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우선 위안부에 대해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된 문서를 보자.

 

2차대전 직후 미군이 버마지역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조사한 일본군포로심문보고서 제 49호다.

 

 

RECRUITING 모집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년 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를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
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원의 보상을 받았다.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여자들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무학이었는데, 개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
그녀들이 서명한 계약은 미리 선금으로 지급된 가족 연대채무의 액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녀들을 위안소 업자와 군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였다.

 

 

 

위심문보고서에서 주목해야하 것은 징집이라는 의미의 drafting이 쓰인게 아니라 recruiting.. 즉 모집이라는 표현이 쓰였다는것이며

 

모집의 주체가 일본인 업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들을 심문한 결과 일부는 원래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즉 청녀 일을 했었으며 대가를 받고 위안부 일을 했다고 나온다.

 

 

 

 

또한 90년대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최초 증언내용을 보더라도 일본군 개입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대표적으로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집을 보자

 

"19살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가기만 하면 일자리도 좋고 돈도 잘 번다』는 말에 속아 42년 7월부터 해방후인 46년4월까지 약 3년6개월여 동안「후미하라 요시코(文原吉子)」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따라 버마·태국 아유타야 등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1991-12-07자 참조)"

 

 

이 할머니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변경된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참고로 문옥주 할머니는 90년대에 버마은행에 위안부 생활 당시 저금했던 월급을 반환해달라고 소송을 걸었는데 당시 문옥주 할머니가 제시한 통장에는
무려 26,000엔이 입금돼있었다고한다.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최초 증언에서는 대부분 이름 모를 남자에 의해 속았다고 증언하고있으나 정대협의 손을 타고 난뒤 일본군 또는 일본순ㄴ사에 의해 끌려갔다고 나온다.
 
 
 
다음은 일본정부에서 지방경찰서로 보낸 "군위안소 모집의 건"에 대한 공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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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사변 지역에 있어서, 위안소 설치를 위해 내지에 있는 종업부(從業婦) 등 모집하는 것에 대하여 군부의 양해 등이 있는 것처럼 명의를 이용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민의 오해를 사도록 하는 우려가 있고, 혹은 종군기자, 위문자를 개입시켜 통제가 안되는 모집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 또는 모집자의 인선이 잘못 선정되어 모집의 방법에 있어 유괴와 같은 방법으로 경찰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자 등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래 이런 모집 등에 있어서 파견군으로 하여금 통제토록 하고 모집과 관련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의 선정을 적절하게 하고, 그 실시에 있어 관계지방의 헌병 또는 경찰 당국과의 연대를 긴밀히 하여 앞으로는 군의 위신을 유지하고, 또는 사회문제상 유루(遺漏)않도록 배려하기를 통첩함
 
 
 
일본정부는 강제동원을 시키기는 커녕 위안부 모집자가 일본군 이름을 팔아서 모집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모집자가 유괴 전과가 있는 놈이 아닌지 주의해라고 공문을 하달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는 커녕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증거는 쏟아지도록 많다. 다 쓰자면 책한권이라 여기까지한다.
 
 
 
 
위의 증거를 종합해 보면 위안부는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납치나 사기같은 것들이 존재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원래부터 몸파는 일을 한 사람으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가담했다고도 나온다.
 
실제 우리나라는 70~80년대만하더라도 유괴 납치해서 외딴 섬에다가 창녀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흔했다.
부모가 빚때문에 자식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흔했다. 1930년~1940년대에는 아마 더 심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증거 없이 그동안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납치해갔다"며 일본의 사죄를 요구해왔고
일본은 증거가 없으니 "위안부 모집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계속해서 반복해왔던것이다.
 
 
물론 일본군이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불법행위를 알고서도 묵인했을수도 있다. 그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주장하는것과 같이 모집 과정에서 일본군 직접적 개입에 대한 증거는 전무하기에
별다른 단서를 두지 않고 일본군의 책임을 포괄적인 인정한것은 정말 대단한 외교적 성과이며
 
일본 우익들이 미쳐 날뛰는 이유도 이에 근거한 것이다. 걔들 입장에서는 증거도 없는데 군의 개입을 인정하며 사과를 한 아베가 매국노 같겠지.
 
 
아마 외교 관계자들부터 오늘 썰전에서의 이준석도 다들 이 말을 하고싶었을것이다. 사실은 일본군 개입의 증거가 없어요 ㅠㅠ 라고.
 
하지만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매국노!!친일파정부 소리 듣겠지.
 
 그니까 목구멍에까지 기어올라와도 아닥하고 있는 것일뿐. 
 
 
 
2줄요약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일본군 직접적 개입 증거는 발견된게 없다.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본군 개입을 인정받은 것은 대단한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