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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1.04 03:20
위안부 협상이 결렬되자 MB의 투 트랙 외교는 이 한마디로 끝났다
'早期 타결' 약속은 기적을 기다리는 것… 결렬 후 무엇을 할 것인가
이명박 정부 말기 '정권 실세'로 알려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위안부 문제가 다시 한·일 관계의 쟁점으로 떠오른 시점이었다. 실세로서 막후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일본이 법적 배상을 받아들이겠는가?" "배상 아닌 보상을 위안부 피해자가 수용하겠는가?" 그는 "희망을 가진다"고 말했다. 희망과 달리 일본은 법적 배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피해자도 거부했다. 그런 방안에 만족할 요량이었으면 문제는 15년 전 일본의 민간 기금 보상안으로 해결됐을 것이다. '정권 실세'의 노력은 그게 끝이었다.
당시 일본 총리는 민주당 노다 요시히코였다. 작년 한국 언론계 선배들과 함께 그를 만났다. 2011년 말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교토 정상회담 대목에서 노다 전 총리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얼굴이 벌게지더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정상회담 당시 신문 제목을 보면 상황이 짐작된다. '57분 회담 중 45분…MB, 위안부 작심 발언'. 일방적인 설교를 들은 것이다.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매우 공세적으로 다뤘다. 진정성도 있었다. 그런 그가 결국 어떤 말을 들었을까.
이명박 정부는 '실용 외교'를 표방했다. 안보와 역사 문제를 분리해 대응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투 트랙(two-track)' 외교에 해당한다. 그는 위안부 문제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안보에선 미국을 배려해 일본을 파트너로 존중하려고 했다. 이런 투 트랙 외교가 와르르 무너지는 데 위안부 협상 결렬 후 넉 달이 걸리지 않았다. '한·일 군사 정보 보호협정 파동' 때였다. "이명박 정부는 뼛속까지 친일"이란 구호 한 방에 당했다. 그 한 방을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날렸다. 일본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를 강의하던 반년 전 이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을 줄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한국의 권력자는 과거를 배우지 않는 듯하다. 위안부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 때 더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이 충만한 대통령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런 우월감이 작용한 듯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피해자를 지원한다"고 호기 있게 선언했다. 대신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다.
당시 김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한 당국자는 "그는 호의를 베풀면 일본이 스스로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대범했지만 권력 만능의 사고였다. 일본은 법적 배상까지 가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배상을 받고 안 받고는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결정할 사안이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배상 요구가 다시 분출하는 데 몇 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고노 담화를 이끌어냈지만 지금껏 '말빚'으로 남아 한국을 괴롭힌다. "대통령이 금전 요구를 안 한다더니…"란 비아냥은 우리에겐 아픈 부분이다. 문민정부의 대일 외교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대통령의 허망한 일갈로 마감했다.
김영삼·이명박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뤘지만 모두 최악의 관계로 한·일 외교를 마무리했다. 책임은 배상을 수용하지 않는 일본에 있다. 하지만 일본의 변화만 기대하는 한국의 전략이 문제를 극단까지 몰고 간 측면이 있다. 지난 2일 한·일 정상의 '조기(早期) 타결' 약속도 결국 일본의 배상 수용을 기다리는 데 불과하다. 아베 신조 총리가 변할까. 우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또 불같이 화낼 것인가.
일본은 호흡이 긴 나라다. 화낸다고 움찔하지 않는다. 내 경험에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로 가장 아파한 것은 2007년 미 하원의 '성 노예(위안부) 결의안' 통과 때였다. 일본 정부와 언론 전체가 어느 사안에 대해 싸늘하게 침묵하는 것을 처음 봤다. 당시 총리가 아베 신조다. 그 아픔을 기억할 것이다. 1996·98년 유엔인권소위원회의 위안부 배상 요구, 2014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의 위안부 관련 전시도 마찬가지다.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견제하기 위해 유네스코에 압박을 가했다. 위안부 문제가 '여성 인권'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쉼 없이 불러일으켜야 일본은 그나마 움직인다.
국정교과서 드라이브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올바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김영삼·이명박 대통령 역시 같은 믿음으로 일본의 변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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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일본이 법적 배상을 받아들이겠는가?" "배상 아닌 보상을 위안부 피해자가 수용하겠는가?" 그는 "희망을 가진다"고 말했다. 희망과 달리 일본은 법적 배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피해자도 거부했다. 그런 방안에 만족할 요량이었으면 문제는 15년 전 일본의 민간 기금 보상안으로 해결됐을 것이다. '정권 실세'의 노력은 그게 끝이었다.
당시 일본 총리는 민주당 노다 요시히코였다. 작년 한국 언론계 선배들과 함께 그를 만났다. 2011년 말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교토 정상회담 대목에서 노다 전 총리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얼굴이 벌게지더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정상회담 당시 신문 제목을 보면 상황이 짐작된다. '57분 회담 중 45분…MB, 위안부 작심 발언'. 일방적인 설교를 들은 것이다.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매우 공세적으로 다뤘다. 진정성도 있었다. 그런 그가 결국 어떤 말을 들었을까.
이명박 정부는 '실용 외교'를 표방했다. 안보와 역사 문제를 분리해 대응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투 트랙(two-track)' 외교에 해당한다. 그는 위안부 문제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안보에선 미국을 배려해 일본을 파트너로 존중하려고 했다. 이런 투 트랙 외교가 와르르 무너지는 데 위안부 협상 결렬 후 넉 달이 걸리지 않았다. '한·일 군사 정보 보호협정 파동' 때였다. "이명박 정부는 뼛속까지 친일"이란 구호 한 방에 당했다. 그 한 방을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날렸다. 일본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를 강의하던 반년 전 이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을 줄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한국의 권력자는 과거를 배우지 않는 듯하다. 위안부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 때 더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이 충만한 대통령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런 우월감이 작용한 듯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피해자를 지원한다"고 호기 있게 선언했다. 대신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다.
당시 김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한 당국자는 "그는 호의를 베풀면 일본이 스스로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대범했지만 권력 만능의 사고였다. 일본은 법적 배상까지 가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배상을 받고 안 받고는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결정할 사안이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배상 요구가 다시 분출하는 데 몇 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고노 담화를 이끌어냈지만 지금껏 '말빚'으로 남아 한국을 괴롭힌다. "대통령이 금전 요구를 안 한다더니…"란 비아냥은 우리에겐 아픈 부분이다. 문민정부의 대일 외교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대통령의 허망한 일갈로 마감했다.
김영삼·이명박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뤘지만 모두 최악의 관계로 한·일 외교를 마무리했다. 책임은 배상을 수용하지 않는 일본에 있다. 하지만 일본의 변화만 기대하는 한국의 전략이 문제를 극단까지 몰고 간 측면이 있다. 지난 2일 한·일 정상의 '조기(早期) 타결' 약속도 결국 일본의 배상 수용을 기다리는 데 불과하다. 아베 신조 총리가 변할까. 우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또 불같이 화낼 것인가.
일본은 호흡이 긴 나라다. 화낸다고 움찔하지 않는다. 내 경험에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로 가장 아파한 것은 2007년 미 하원의 '성 노예(위안부) 결의안' 통과 때였다. 일본 정부와 언론 전체가 어느 사안에 대해 싸늘하게 침묵하는 것을 처음 봤다. 당시 총리가 아베 신조다. 그 아픔을 기억할 것이다. 1996·98년 유엔인권소위원회의 위안부 배상 요구, 2014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의 위안부 관련 전시도 마찬가지다.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견제하기 위해 유네스코에 압박을 가했다. 위안부 문제가 '여성 인권'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쉼 없이 불러일으켜야 일본은 그나마 움직인다.
국정교과서 드라이브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올바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김영삼·이명박 대통령 역시 같은 믿음으로 일본의 변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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