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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술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학의 뿌리부터 캐내야 한다”

등록 :2015-10-15 20:04수정 :2015-10-1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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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한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이주한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짬] 한가람역사문화연 연구위원 이주한씨
‘단군신화는 사실이 아닌 단순한 신화일 뿐이다. 중국에서 넘어온 유민인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은 한반도에서 세워진 최초의 국가다.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중국에서 유입됐다. …’ 그는 기존의 국정·검정 교과서에서 기술해놓은 한반도 고대사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뿌리부터 왜곡됐다며 “역사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한반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했고, 그런 조작된 역사를 주류 한국사학자들이 비판 없이 후학들에게 가르쳐왔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으로 한국사 왜곡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재야사학자 이주한(52)씨가 <위험한 역사 시간>(인문서원 펴냄)을 통해 국사학계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학과 입학했으나 ‘죽은 역사’에 실망
스스로 낙제한 뒤 민주화운동 ‘옥살이’
신채호기념사업회 참여 ‘재야사학’ 개척

‘위험한 역사시간’ 펴내 국사학계 질타
‘조선사편수회’ 이병로 ‘친일사관’ 비판
“사라진 고조선 2000년사부터 찾아야”

그는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신화는 결코 신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고조선’의 존재를 처음 쓴 이는 일연 대사(1206~89)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 70대에 <삼국유사>를 썼고, 여기에 단군왕검이 서기전 24세기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서기전 24~30세기 이전의 청동기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지도 수십년이 지났다. 하지만 기존의 학계에서는 한반도 청동기 사용이 10세기 전후이기 때문에 서기전 24세기 무렵의 고조선 건국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야 국가라는 틀을 만들 수 있다는 기존 이론은 틀렸다”며 “뛰어난 문명을 구축한 잉카와 마야 문명도 석기시대였다”고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해서 그의 실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군이 실재했기에 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것이다. ‘곰과 사람이 결혼했다’는 신화 역시, 그곳의 원주민인 ‘곰 토템족’이 조상을 받드는 민족과 통혼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연세대생을 ‘신촌 독수리’, 고려대생을 ‘안암골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고대 한국 문화가 중국의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으로부터 유입됐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강조한다. 고조선의 철기 생산은 서기전 13세기로, 중국의 서기전 8세기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고조선 시대에 진한과 변한 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돼 예·마한·왜인들이 와서 가져갔고, 모든 화폐는 철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지>, <후한서>, <동이 열전> 등에도 기록돼 있다.

“당시 야금술의 중심지가 고조선 영토인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었어요. 한자의 철(鐵) 자를 파자하면, 금속을 의미하는 왼쪽의 금(金)과 오른쪽 이(夷)족의 명칭을 의미하는 글자가 합쳐져 있어요. 그러하기에 철기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이족의 발달된 철기문명을 중국이 수입한 것입니다.”

‘고조선의 주변국에 불과했던 위만이 전국시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와 비로소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도 고대 한국사의 주체를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바로 조선총독부의 ‘황국사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는 “위만 조선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기 4~6세기에 일본의 야마토왜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역시 일본 근대사학계가 최초로 내세운 학설로,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창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씨는 “일제는 1910년부터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기 위해 수십만권의 사료를 수거해 폐기해버리고, 38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35책 2만4천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새로 발간했다. ‘조선사’ 발간 목적은 고조선부터 역사책에서 지우려는 것이었다. 일본보다 앞서는 한국사를 없애버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이병도(1896~1989)가 해방 이후에도 이런 식민사학을 주도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와 서울대 대학원장, 문교부 장관, 학술원 원장을 거쳐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국정자문위원까지 지낸 그는 조선사 편찬을 주도한 일본 학자인 이마니시 류한테서 일제의 뜻대로 신라 건국부터 시작된 조선사를 이어받았고, 이를 그대로 후학들에게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기존 학계로부터 ‘재야학자’ ‘국수주의자’로 불리며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 이씨는 숭실대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그는 서강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형(이주영)의 영향으로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으나 제적당했다. “의도적으로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대학에서 가르치는 역사가 다 죽어 있는 역사라고 느꼈으니까요.” 그 뒤 그는 민주화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돼 구속됐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풀려난 그는 부천 공단지역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검거됐다. 실형을 살고 풀려난 그는 출판사, 막노동 등 10여개 직업을 전전하다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의 간사를 맡았다. ‘죽은 역사’라 스스로 규정했던 한국사를 살려내고 싶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된 그는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2013년)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펴냈다. 친일 역사학자들의 사관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 사학계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의 치부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 애써 모른 척하는 거죠.”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 대변인과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도 맡고 있는 그는 “자라는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는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사라진 고조선 2000년의 역사부터 되찾아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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