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 이규연 기자
이규연논설위원
②떠드는 사람보다 입 다문 사람이 무섭다
③화살은 심장을 관통하지만 화(火)는 영혼을 관통한다
방화범죄 설명서라고 할까. 서울 도곡역 방화범 조○○(71)씨의 심리도 이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지방에서 작은 카바레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가족이 있지만 업소 사무실에서 혼자 살았다. 성격도 내성적이다. 2000년, 그는 업소 안으로 정화조가 역류해 손해를 입는다. 이후 건물주를 상대로 ‘십 년 송사’를 벌인 끝에 올해 초 이긴다. 배상금 액수가 문제였다. “수억원대의 손해를 봤는데 배상금은 수천만원대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판사와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조씨는 한 달 전 TV에서 서울 지하철 2호선 추돌사고를 보게 된다. 이때 언론을 통해 억울함을 폭로하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예행연습까지 했다.”
서울수서경찰서 한원횡 형사과장의 얘기다. 조씨는 고립된 소시민이 좌절을 맛보았을 때 화를 참지 못해 이상행동을 저지르는 방화 ‘공식(公式)’을 그대로 따랐다. 다른 승객과 역무원이 재빨리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경찰 조치가 늦었더라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같은 큰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조씨는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대구지하철 방화범 김○○(당시 57세)과 닮은꼴이다. 뇌질환으로 반신마비가 온 김은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였다. 자신을 고쳐주지 못하는 의사를 원망했다. 그리고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했다. 2008년 국보1호를 불태운 채○○(당시 70세)는 배우자·자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공기관과 토지보상 문제로 수년간 송사를 벌이다 판결이 불만족스럽게 나오자 분노를 참아내지 못했다. 채는 범행 전에 “내 영웅은 대구지하철 방화범”이라고 주변에 말했다고 한다.
한국은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살인·폭력 등 강력범죄 발생 면에서 ‘불명예’ 상위 국가다. 그중에서도 방화는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던 범죄다. 하루에도 다섯 건 이상의 방화가 일어난다. 연평균 6.5%씩 늘었다(그래픽). 방화 동기는 사회의 병리적 단면을 보여준다. 서양에서는 보험금을 타내거나 쾌감을 느끼기 위해 불을 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런 동기들을 다 합쳐도 5% 미만이다. 절반 이상은 분을 참지 못하거나 우발적으로 불을 지른다. 그 비율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인의 자존감은 유난히 낮다. 국제조사를 해보면 바닥권으로 나온다. 방화는 낮은 자존감과 관계가 깊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사회적 자산이나 소통능력이 떨어진다. 분노 대상에게 달려들 배짱이 없다. 그러니 지하철·병원·자동차 같은 무(無)생물에 몰래 불을 붙여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배려·관용이 적고 경쟁·모멸이 폭주하는 사회에서 화가 난 은둔자의 수는 빠르게 늘어난다. 어느새 우리는 방화왕국이 돼 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수습책의 하나로 사회부총리 신설을 천명했다. 사회부총리가 나서 체계적인 사회혁신계획을 수립해 주기를 고대한다. 은둔형 분노가 넘쳐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도, 안전할 수도 없다. 분노는 달래주기 바라는 아기와 같다. 이를 잘 보듬어주는 ‘어머니사회’가 사회혁신의 큰 방향이 돼야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