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인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DC의 해군기념관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눈물(The Last Tear)’ 속에서 박숙이(93) 할머니는 “나라를 잃지 않아야 나 같은 일을 안 겪는다니까. 다시는 다른 나라에 고개 숙이지 않게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잠깐의 웃음. 하지만 관람객들은 금세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소원을 묻자 “안 아프면 좋겠다”는 박 할머니는 화면상에서도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박 할머니가 찾아오는 학생들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실제로 올여름 워싱턴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행사가 쏟아졌다. 7월 29일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 8주년 기념식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 시사회가 열렸고, 김복동(89)·이용수(87) 할머니는 7월 연달아 미국을 방문해 피해 사실을 육성으로 증언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지난 9일까지 뮤지컬 ‘컴포트 우먼(위안부)’이 공연되기도 했다.
한국이 온통 ‘위안부 문제 알리기’에 주력하는 사이, 주미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은 오는 28일 애니메이션 한 편을 상영한다. 1988년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 감독이 제작한 ‘반딧불이의 묘(火垂るの墓)’다.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일본의 14세 소년이 아버지의 참전과 공습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네 살짜리 여동생과 함께 친척 집과 방공호를 전전하다가 동생이 굶어 죽고 자신마저도 전철 역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 애니메이션이 2005년 한국에서 반일 감정 때문에 상영이 무기 연기되고, 지난해 6월에야 개봉됐을 정도로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는 데 있다. 일본은 전쟁 가해국인데도, 절절한 묘사 때문에 일본 국민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일본 공보문화원은 종전 70주년을 맞는 8월에 왜 굳이 이런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기로 결정했을까. 한·일 양국이 워싱턴에서 벌이는 역사 논쟁이 이제 문화 전쟁으로 확산되는 느낌이다.
신보영 특파원 boyoung2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