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림]박근혜 ‘천년 한’에 대한 일본의 거대한 오해②(끝)

 

 

김영림 일본 통신원 c45acp@naver.com

 

 

우리의 恨과 일본의 ‘우라미’는 뉘앙스가 다르다. 그것을 같다고 본 것이 오역을 초래했다. 한국의 대국화와 맞물리면서 일본의 혐한론을 일으킨 것이다.

 

 


 

 

여몽연합군의 침공을 묘사한 일본 기록화 '몽골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일부. 위에서 폭발하는 구슬은 일본이 처음 경험한 화약병기인 '철포'로, 그 충격은 임진왜란 때 조선이 처음 본 조총에 필적했다.

 

 

私的 보복을 인정하는 문화

 

 

일본의 혐한론자들은 우리의 ‘한’을 ‘우라미(恨み)’로 번역했다. 한과 우라미는 같은 한자를 쓰지만 개념은 사뭇 다르다. 한국인의 ‘한’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렬한 아쉬움과 분함, 그리고 인내를 우선하며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강조한다. 반면 일본인의 ‘우라미’는 타인의 처사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강조된다. 당했으면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원한’에 가까운 개념이다.
양자의 해결 방식도 다르다. 이는 양국의 대표적 고전을 읽어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의 ‘장화홍련전’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매의 한을 새로 부임한 지방관이 살인자 계모와 이복형제를 처벌함으로써 해결하는 구조다. 자매의 원혼은 신임 관리의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정당함이 증명됐기에 한을 푸는 것이다.
한국은 중앙집권체제와 주자학적 윤리관에 젖은 탓인지 합법적 절차가 결여된 직접적인 복수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참회하고 그것을 피해자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구조도 많다. 그러나 일본식 이야기 구조라면 크게 달라진다. 자매의 원혼이 계모와 이복형제를 직접 응징해 ‘끝장을 보는’ 스토리가 됐을 것이다.
우라미와 관련된 일본의 대표적 고전에 ‘주신구라(忠臣藏)’가 있다. ‘주신구라’의 주인공인 무사들은, 막부의 관리에게 모욕당한 것에 항거한 그들의 주군이 할복을 명받고 영지가 몰수당하는 사건을 겪자, 주군의 한을 풀기 위해 막부의 관리에게 직접 복수를 하고 자수한 뒤 할복한다. 우리였다면 끝까지 중앙정부에 직소해 왕명을 기다리고 그것으로 인해 당쟁이 일어나는 구도였을 것이다.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사법체제가 무너졌기에, 개인의 직접적인 복수를 ‘자력구제’라는 논리로 찬미하는 문화가 생겨 위와 같은 작품이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본적 의미와 해결방식이 다른 한국인의 한을 일본어의 우라미로 직역한 것은 오역(誤譯)이 된다.
일본의 혐한 언론은 한국인을 ‘우라미의 민족’이라고 강조하며,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불안과 혐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한국인이 과거사의 한을 풀기 위해 다시 원구가 되어 복수할 것이라는 논리 비약까지 감행한다. 한국인의 한 해결 방식을 그들의 우라미 해결 방식과 동일시한 것이다.

 

 

기계적인 평등에 집착하는 일본

 

 

‘천년의 한’에 대한 오해에는 역사적 사실이나 언어의 뉘앙스 차이만이 아닌 사고방식의 차이도 존재한다. 한국은 주자학적 명분론에 의해 절대적으로 ‘정의’를 구별하고 독점하려 한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자기 과실이 49%이고 상대 과실이 51%인 경우, 자신이 나은 것은 2%뿐임에도 상대는 ‘절대악’, 정의는 자신에게만 있음을 강조한다. 상대에게도 나름의 명분과 배울 점이 있음에도 전부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구한말의 쇄국주의나 위정척사론이 그 예다. 대일본 관계도 대립한 시기보다 공존한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었다는 것을 자주 망각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박 대통령의 연설문 구절도 그러한 ‘명분론적 족쇄’의 산물일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불교적 상대주의에 입각해 누구나 업보를 지녔다는 ‘피장파장’의 논리를 갖는다. ‘싸운 자는 둘 다 처벌한다(喧嘩兩成敗)’는 식으로, 기계적인 정의와 평등에 집착한다. 따라서 ‘평등하게 공존하거나, 아니면 자기 파멸을 감수하며 상대와 공멸하는 것’을 택하는 극단성을 보인다. ‘추신구라’처럼 적과 공멸하는 사적 복수를 찬미하는 문화가 그러한 개념에서 나왔다.
와세다대 박사과정 학생인 사타케 고스케(31) 씨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파멸한 구(舊)일본의 확전 과정도 그러한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서구 열강은 식민지나 영토를 제멋대로 확장했으면서 후발 주자인 우리는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그들과 같은 조건으로 영토 확장을 인정받지 못할 바에는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구와 끝장을 보자”라는 논리였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사에서 실질적 피해는 전 국토를 유린당하고(임진왜란), 국권까지 빼앗긴(경술국치) 한국이 더 심했건만, 신라구와 원구를 예로 들며 분개하는 일본인(특히 우익)의 심리는 저러한 기계적인 정의의 평등론에 근거한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설득 논리를 연구하지 않는 한, 양국관계는 감정적 소모전이 거듭될 뿐이다.

 

 

여몽연합군이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한 20세기 초의 일본 그림. 여몽연합군이 일본에 남긴 트라우마는 강력해서 '모쿠리 고쿠리'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한국이 강해진다”

 

 

박 대통령 연설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는 데는 한국의 힘이 그들의 불안을 현실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도 한 원인이 된다. 미국 최고의 외교전략가인 조지 프리드먼은 한국이 통일되면 그 힘이 만주까지 미칠 것을 예상하며 ‘통일이 되면 한국은 강대국이 될 것이고 일본에 가시(thorn)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조선일보 2011년 5월 28일). 그러한 통일한국이 일본과의 해묵은 감정만을 이유로 ‘진정한 패권주의 국가’인 중국에 기울면, 일본에는 ‘무쿠리 고쿠리’의 악몽이 부활하게 된다.
야스히코 씨는 “한국의 눈부신 대국(大國)화로 현재의 한일관계는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일을 한다면 한국은 진짜 대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일부 어리석은 일본인들은 한국이 ‘정말로 복수할지 모른다’란 두려움에 젖어, 한국의 통일을 거부하고 싶어 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미국만큼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해도 ‘재를 뿌릴’ 힘은 가졌다. ‘통일대박’을 실현하려면 일본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간으로 확산돼가는 한일관계 경색을 타파해야 한다. 양국 외교관계자들은 양국의 역사와 문화, 사고방식의 차이를 숙지하고, 민간 차원의 대화와 교류를 더 확대해 나가야 한다.
2015년은 여러 의미에서 한일관계의 중대한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변곡점에서 양국이 서로를 위해 최선의 판단을 하길 바란다.

이정훈 에 대해

hoon@donga.com 주간동아 편집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친 동아일보 기자. 묵직하고 심도 있는 기사를 많이 써 한국기자상과 연세언론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과 정보 원자력 우주 해양 산악 역사에 관심이 많고 통일을 지론으로 갖고 있다. 천안함 정치학, 연평도 통일론, 한국의 핵 주권, 공작, 발로 쓴 반동북공정 등을 저술했다. 기자 인터뷰 보기 - "국정원 신화 벗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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