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Sの歴史をめぐって――
第三回日韓共同歴史研究の報告
(福音による和解委員・宮崎誉)
第3回日韓歴史共同研究会のリバイバル報告(韓語語)
七月12~13日に第三回日韓聖潔教会共同歴史研究会が、日光オリーブの里で行なわれました(韓国側17名、日本側14名参加)。
開会礼拝の説教は郷家一二三教団委員長がなさいました。郷家先生は救いの歴史に生きているのに、なぜ痛みに満ちた人類の歴史があるのかを問い、使徒パウロが神の選びの民イスラエルのために祈り(ローマ九~一一章)、人間の理解を超えた神の知恵に目が開かれるとき、歴史を理性的に解説することを越えて、賛美する者となると語られました。「ああ深いかな、神の知恵と知識との富みは。…『だれが、主の計画にあずかったか。』…万物は、神からいで、神によって成り、神に帰するのである」(ローマ一一章33~36節)。批判的に歴史を見つめつつ、同時に歴史の中で神の恵みの導きを信じ賛美することを願い、共同研究会が始まりました。
今回の主題は「OMSの歴史をめぐって」です。安井聖牧師は、一九一一年に中田重治とカウマンらが指導権をめぐって対立した「聖教団事件」を丁寧に描写しました。アジア全域を宣教の視野に置き、京城聖書学院の創立に向うカウマンとキルボルンに対して、中田は強硬な姿勢で、日本のホーリネス教会の指導権を、自ら取ることを主張しました。後に円満解決が公表されましたが、おそらくカウマンとキルボルンが中田の頑なな姿勢に譲歩せざるをえなかったと安井牧師は分析しています。
許命渉(ホ・ミョンソプ)牧師は、韓国聖潔教会の制度の変遷過程について発題をされました。韓国の聖潔教会の中央組織は、監督制度、顧問制度、理事会制度、総会及び理事長制度と変遷しました。E・A・キルボルンは、定住した指導者の必要を感じて一九一〇年一一月に英国人のJ・トマス宣教師を韓国に招きました。反日感情の強かった韓国では、定住した欧米人指導者が必要でした。彼らは言語の習得で苦労し、二代目監督のW・ヘスロップも妻の病気により一年で帰国を余儀なくされ、一九二一年にキルボルンが韓国の監督になりましたが、彼も、カウマンの召天で空席になった東洋宣教会の総裁に就任することから、韓国の聖潔教会は監督制から理事会制へと移行していくことになりました。理事会制度になってからも、宣教師による指導は続き、一九四一年に理事会が第一回総会を招集して、第二回総会のときからは全自給を実行することを目指す決議をするときまで続きました。
朴賛熙(パク・チャンヒ)牧師は、初期の韓国の聖潔教会の教理形成について話しました。李明植(リ・メイショク)牧師が、聖潔教会の信仰を弁証する機関紙『活川』の発行を呼びかけました。教団外には聖潔福音が異端ではないと誤解を解く必要があり、また教団内には健全な信仰を養う目的がありました。『活川』にはA・M・ヒルスの翻訳など日本のホーリネス教会でもよく読まれていたものも掲載され、発題で描写された初期韓国聖潔教会の聖化論は、日本の聖化論と重なる側面を持っています。朴賛熙牧師の丁寧な分析では、初期聖潔論の特長は「心の聖潔」が存在論的聖化を基礎としていて、その罪性を神の像(イマゴ・デイ)の歪みや破損として見ており、それはウェスレーが初代教会の東方の神学の観点から受けたものと理解していることです。その存在論的な救済観としての神の像の回復を、キリスト論的に見るならばキリストの似姿にあずかることであり、それはキリストの謙卑(ピリピ二章6~11節)として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言い直しますと、聖化とは、壊れた神の像が回復されることであって、キリストの似姿にあずかり、キリストのように変えられていくことです。それ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まで降り、キリストと共に高く挙げられる恵みなのです。
S・ダークープ宣教師はOMSが南米、アフリカ、アジア諸国など世界各地で、近年、新しい方法を用いて宣教が前進していることを報告して下さいました。
平野信二牧師の発題「韓国併合とホーリネス教会」は『りばいばる』紙八月号で紹介されています。
今回参加して、いくつもの豊かな交わりがありました。裵本哲(べ・ボンジョル)先生と、成田空港から日光までの間、約三時間交わりを持ちました。裵先生は聖潔教会の教団分裂と和解について語りました。韓国の聖潔教団は、世界教会協議会と交わりを持つか否かの議論をきっかけに、痛ましい分裂が起きました(一九六二年)。裵先生は両教団が和解し、働きを共にできるように取り組んでこられました。かつて具体的な和解のプロセスに入ったときも、分裂の痛みを生々しく記憶している人が、和解の方向に進むことに納得できなかったそうです。しかし、裵本哲先生は、和解のために労し続けています。私も日本での取り組みをお話ししました。戦争責任告白の文章が告白する罪は、戦争に直接関わることだけではなく、当時の日本のホーリネス教会の分離時に犯した罪も明記され、その悔改めの土台となる福音理解として和解論があり、そして中田重治宣教一〇〇周年のときには、別れていたホーリネス系諸教派が集まり、主のからだとして聖餐を共に祝ったことを話しました。裵先生は、深く頷きながらおっしゃいました「平和つくり出す人たちは、さいわいである(マタイ五章9節)、これが私たちの主イエス様の言葉だ。」
―OMS의 역사를 아우르며―
제3회 한일공동역사연구 보고
복음에 의한 화해(和解)위원・미야자키 호마레(宮崎誉)목사
7월 12-13일에 제3회 한일공동역사연구회가, 닛코(日光)의 올리브마을에서 진행되었습니다.(한국17명, 일본14명 참가)
개회예배 설교는 고야 히후미(郷家一二三) 일본 홀리네스교단 위원장이 해 주었습니다. 고야 목사는 구원의 역사를 살아가는데 왜 고통으로 가득 찬 인류의 역사가 있는가를 물으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해 (롬 9-11)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에 눈이 열렸을 때, 역사를 이성적으로 해설하는 것을 넘어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3-36). 비판적으로 역사를 주시하면서 동시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인도하심을 믿고 찬양하기를 바라며 공동연구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OMS역사를 아우르며”입니다. 야스이 키요시(安井聖)목사는 1911년에 나카다쥬지(中田重治)와 카우만이 지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던 ‘성교단(聖教団)사건’을 세심하게 묘사했습니다. 아사아 전 지역을 선교의 시야로 놓고, 경성성서학원의 창립을 바라는 카우만과 길보른에 대해서 나카다는 강경한 자세로 일본 홀리네스가 교회의 지도권을 스스로 취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에 원만한 해결이라고 공표되었지만, 얼마 후에 카우만과 길보른이 나카다의 완고한 자세에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야스이 목사는 분석했습니다.
허명섭 목사는 한국성결교회의 제도의 변천과정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한국성결교회의 중앙조직은 감독제도, 고문제도, 이사회제도, 총회 및 이사장제도로 변천하였습니다. E・A・길보른은 정주하는 지도자의 필요를 느껴, 1910년 11월에 영국인 존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초청했습니다. 반일감정이 강한 한국에서는 정주할 구미(欧米)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언어습득으로 힘들어 해, 두 번째 감독인 W・헤슬롭도 아내의 병으로 1년 만에 귀국할 수 밖에 없게 되어, 1921년에 길보른이 한국의 감독이 되었지만 그도 카우만의 소천으로 공석이 된 동양선교회 총재에 취임하게 되어서, 한국성결교회는 감독제에서 이사회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사회제도가 되고 나서도 선교사에 의한 지도는 계속되어 1941년에 이사회가 제1회 총회를 소집하고, 제2회 총회부터는 전자급(全自給)을 실행할 것을 목표하는 결의를 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박찬희 목사는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교리 형성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이명직 목사가 성결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기관지 『활천』의 발행을 요청했습니다. 교단 밖에서는 성결복음이 이단이 아니라는 오해를 해소할 필요가 있고, 교단내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양성할 목적이 있었습니다.『활천』에는 A・M・힐스의 번역 등 일본 홀리네스 교회에서도 잘 읽혀지던 것도 게재되어, 발제에서 묘사된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성화론은 일본의 성화론과 중복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박찬희 목사의 세심한 분석으로는, 초기성결론의 특징은 ‘마음의 성결’이 존재론적 성화를 기초로 해 그 죄성을 하나님 형상의 왜곡과 파괴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웨슬레가 초대교회의 동방신학의 관점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존재론적 구원관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기독론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겸비(빌2:6-11)로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화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여겨져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까지 내려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높이 들려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S・다쿱 선교사는 OMS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최근 새로운 방법을 이용해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히라노 신지(平野信二)목사의 발제 “한국합병과 홀리네스교회”는 『리바이벌』 8월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참가해 풍성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배본철 교수와 나리타 공항에서 닛코까지 가는 약 3시간 동안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배교수는 성결교회의 교단분열과 화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의 성결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와 교류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고통스러운 분열이 일어났습니다(1962년). 배교수는 양 교단이 화해하여 함께 일할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화해의 과정에 들어섰을 때도, 분열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화해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본철 교수는 화해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본에서의 대처를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책임 고백 문장이 고백하는 죄는 전쟁에 직접 관계될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홀리네스교회의 분단시에 범한 죄도 명기되어 그 회개의 토대가 되는 복음이해로서 화해론이 있고, 나카다 쥬지의 선교 100주년의 해에는 나뉘어 있던 홀리네스계 제교파가 모여, 주의 몸으로서 성찬을 함께 축복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배교수는 깊이 공감하며 말씀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9), 이것이 우리의 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