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한 자세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대던 지난 주말(9일) 밤이었다. 일본의 공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NHK)로 채널을 돌렸을 때, 심상치 않은 내용의 방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고 책상으로 가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들었다. <엔에이치케이 스페셜>의 ‘총리 비서관이 본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제목의 다큐였다. 시청을 끝낸 뒤 30분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멘붕’ 상태였다.
방송은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위업’을 이뤄낸 사토 에이사쿠(재임기간 1964~1972) 전 총리의 비서관이었던 구스다 미노루(1924~2003)가 남긴 극비 기록의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논의하던 미-일 간의 핵심 쟁점은 오키나와에 배치돼 있던 미국 핵무기의 유지 여부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등에서 이뤄진 ‘원폭 투하’의 경험 때문에 일본은 핵에 대해 본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사토 총리는 1968년 1월 핵은 “갖지도, 만들지도, 들이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극동에 대한 오키나와의 군사적 역할은 절대적”이라며 반환 뒤에도 핵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오키나와 핵을 둘러싼 이견 조정을 위해 사토 총리는 해리 컨(1911~1996)이라는 인물과 두 차례에 걸친 극비 회담을 진행한다. 컨은 <뉴스위크>의 국제부장을 역임한 인물로 일본의 패전 이후 미-일 간의 여러 교섭의 흑막에서 적잖은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는 왜 중요할까. 첫번째 만남이 이뤄진 1968년 12월9일 컨은 “미국한테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기지는 기본적으로 한반도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후방기지로서 일본과 오키나와가 담당하는 역할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사토 총리의 답변은 두번째 만남인 1969년 2월28일 나온다. 이 자리에서 사토 총리는 “한반도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반드시 오키나와에 핵을 둘 필요는 없다. 그런 핵이라면 오히려 한국 국내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사태(한반도 전쟁)가 발생한다면 미군은 일본 본토의 기지를 사용하면 된다. 그 결과 일본이 전쟁에 말려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면 ‘오버’일까. 그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일 간에 이뤄졌던 이 같은 중요한 논의를 알고는 있었을까. 미·일은 결국 사토의 제안을 뼈대로 오키나와 핵 문제에 대한 최종 합의를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국의 언론인 돈 오버도퍼가 쓴 한반도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작인 <두 개의 한국>을 보면, (이 만남이 이뤄진) 1970년대 초부터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 수가 급격히 늘어 오키나와 반환이 이뤄지던 1972년엔 그 수가 무려 763기에 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이 새로 행사하게 된 ‘집단적 자위권’이 아니더라도 한·일은 이미 미국에 포획된 하나의 거대한 안보 공동체로 기능해온 셈이다.
이런 엄혹한 환경 속에서 우리가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되풀이되는 결론이지만, 해답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동아시아 현안에 대한 한국의 발언력 강화와 이를 담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인 전시작전권의 환수뿐이다. 지금의 박근혜 정권이 그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아마 그러긴 힘들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동아시아의 가장 큰 불안 요소는 ‘아베의 역사인식’이나 ‘김정은의 폭주’가 아닌 ‘박근혜의 무능’일지도 모른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길윤형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