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신 밀월시대
‘미국 움직여 과거사 청산’
더이상 통하지 않을 가능성
외교 밑그림 재설정 목소리
‘미국 움직여 과거사 청산’
더이상 통하지 않을 가능성
외교 밑그림 재설정 목소리
29일(현지시각) 식민지배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의 내용을 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 내용이 공개되면서 향후 한국 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일본이 전후 70년을 맞아 오는 8월 내놓게 될 ‘아베 담화’도 큰 틀에서 이번 연설을 답습할 것으로 예상돼 한-일 관계의 관리와 개선을 모색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시름이 깊어지게 됐다.
이날 연설에서 아베 총리는 그동안 한국 등 주변국들이 관심을 집중해온 역사인식과 관련해 “전후 일본은 지난 대전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새기고 걸음을 걸어왔다. 우리의 행동이 아시아 여러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겠다. 이 점에 대한 생각은 역대 총리들과 전혀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1995년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에는 “(일본이) 과거에 국책을 그르쳐” 전쟁을 일으켰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 큰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이런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식민지배와 침략’은 ‘우리의 행동’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은 그냥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아예 찾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강하게 비판했다. 외교부는 30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아베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주변국들과의 참된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식도, 진정한 사과도 없었다”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행보를 계기로 박근혜 정부 외교 전략의 근간이 흔들리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과거사와 안보 협력 등에서 미국의 일본 편향이 두드러지는 등 한국이 고립무원 상태로 내몰리는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이제라도 외교의 밑그림을 리셋(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은 그가 역사수정주의적 성향을 결코 포기할 뜻이 없음을 밝혔지만, 미국 행정부는 이런 ‘과거사 역주행’에 브레이크를 걸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 직후 <교도통신> 인터뷰에서 “매우 능숙하고 의미 깊은 것”이었다며 “(과거사) 책임이 일본 쪽에 있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미국을 움직여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촉진한다는 한국의 과거사 외교 전략이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낳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리의 대미 외교 기조에도 변화를 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우리가 일본을 편드는 미국에 대해 일본과 충성 경쟁을 할 필요는 없다”며 “이젠 미국과도 냉각기를 가져야 한다. 올해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군사공조 체제에 대해서도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는 “한-미-일의 군사적 일체화는 한반도 안정에 저해가 된다. 이는 북한의 핵무장 의지를 강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