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언급없이 ‘국가책임’ 흐리기
미국선 ‘강제연행 포함’ 함축적 의미
러셀 차관보 ‘긍정 메시지’ 평가에
정부도 수용 모양새 논란 일어
미국선 ‘강제연행 포함’ 함축적 의미
러셀 차관보 ‘긍정 메시지’ 평가에
정부도 수용 모양새 논란 일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사용한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라는 표현의 취지가 다시금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지난 6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발언을 “긍정적 메시지”라고 평가한 데 이어,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도 8일 러셀 차관보의 평가에 대한 국내 언론의 비판이 문제라고 밝히면서다. 아베 총리가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선택한 배경에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자칫 ‘위안부 강제동원=인신매매’라는 규정 자체를 한국 정부가 용인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아베 총리가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선 일본 사회에서도 논란이 인 바 있다. 아베 총리가 지난달 27일 미국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관련 발언을 한 직후, 여러 일본 매체들은 아베 총리가 영어와 일본어의 뉘앙스 차이 등을 이용해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흐리려고 의도적으로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마이니치신문>은 “인신매매는 일본어로 민간업자에 의한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영어의 ‘휴먼 트래피킹’이라는 표현은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강제연행까지도 포함했다는 어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국내를 향해서는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동안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미국에는 강제성의 의미가 담긴 ‘휴먼 트래피킹’의 표현을 내보내 자신을 ‘역사수정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여론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해석이다. 아베 총리의 주변 인사들은 “총리가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라며 이번 인터뷰의 의미를 강조한 바 있다.
아베 총리가 해당 인터뷰에서 인신매매의 주체나 목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온 일본 정부의 기조를 유지한 셈이다. 오히려 민간업자에 의한 행위라는 뜻이 강한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당시 일본군 지시 아래 위안소 운영을 맡았던 민간업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려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 외교부도 “(아베 총리의 언급이)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민간업자들에게 돌리고 일본 정부의 관여와 책임을 부인하려는 의도에서였다면, 이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것”이라고 짚은 바 있는데, 이번 고위 당국자 발언은 이와도 배치된다.
김외현 기자, 도쿄/길윤형 특파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