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요즘으로 치자면 혐한론자인 사람으로 통한다. 일찍이 최혜주가 "일본망언의 계보"를 내면서, 망언의 뿌리가 호소이 같은 조선말기 일본인 언론인들이나 관변학자들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이상하게 덮어놓고 "망언"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그 망언의 주체가 일본인이라면 분노의 상승은 극에 달한다. 한마디로 꼴값을 떤다고 볼 수 밖에..
생각해보자. 상대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망언"을 했다면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지적이면 그것은 이미 "망언"이 아닌 까닭에 부끄럽지만 새겨들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말한마디 한마디에 발끈발끈 하는 저열하고 가벼운 국민성은 실로 보기 딱할 뿐만 아니라, 얼굴이 화끈거리기조차 한다. 이런 나라가 중국과 우리말고 세계에 또 어디있단 말인가?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딱히 배운 것이 많은 가방끈 긴 편은 아니었는데, 신문기자, 문필가, 웅변가 등으로 활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전력으로 실직과 도피상태를 전전하다 1908년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재조일본인 언론인 집단에 참여하게 된다.
호소이는 당시 "모든 의미에서 퇴폐가 극에 달한 한국 왕궁은 일종의 음모 소굴이어서 이를 숙정하는 것은 도저히 평범한 관리가 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남산 통감부는 관료들의 클럽이었고 창덕궁은 흑룡회 계통의 낭인들이 득실대는 깡패소굴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평론은 상당히 직설적이며 신랄하였다.
그는 저서『漢城の風雲と名士』의 서문에서 밝히기를 "조선 삼천 년 동안의 역사는 무기력과 무절조, 무정견한 국민에 의해 엮인 국욕(國辱)의 기록"이라고 단정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특히 양반이라고 칭하는, 놀고먹으며 나태하고 잠만 자는 계급은 문벌에 기대어 권위를 농단하고 폭렴 주구를 꺼리지 않아서 民力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국운이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며 이하 채록하는 50명의 소위 명사들은 모두 썩은 독소가 가득 찬 옴 같은 시대에 솟아나는 바실루스균이라고 비난하였다.
50명의 명단에는 안창호, 이상재, 이재명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썩은 정부에서 피어난 백합같은 존재로 보고있으니, 딱히 비난만을 위한 인물평은 아니었던듯 하다. 또한 박제순과 이완용에 대해서는 절개와 국가적 신념이 없는 조선인의 전형적 인물이라 비난한 것으로 보면, 친일파라 딱히 두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발표된 직후 호소이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사이에 직접 종로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반응을 취재하고, 그 내용을 일본의 종합 잡지인『태양』에 기고했다. 그는 당일 경성의 풍경을 "이상스러우리만치 시가지는 평온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한일합방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응은 각계각층별로 천차만별이었는데, 양반과 유생들은 국왕인 고종과 조정대신들의 무능함을 탓하며 비분강개하였던 반면에, 청년학생들 중 일본에 유학하고 귀국한 신지식층은 오히려 이를 기뻐했다고 한다.
한편 보부상 등의 상민들은 한일합방을 서로 기뻐하기를 "오백 년래의 전횡을 휘두른 양반 계급이 자멸할 때가 왔고, 우리들 상민은 앞으로 그 보익을 담당함으로써 놀고먹고 도적질을 일삼던 양반을 압도해버릴 것"이라며 지지의 성원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에 해외조선인들은 외국언론을 통해 한일합방에 대한 불평과 비판의 기세를 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호소이는 일본정부가 지금처럼 강압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시도한다면, 머지않아 민란 등의 소동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1919년 3.1 만세운동이 발발하여 정확히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3.1운동 이후 그는 일본정부가 조선인에 대한 기만적인 문화정책 등으로 눈가림할 것이 아니라, 진실로 내지인과의 차별대우를 철폐해야 하며, "요보", "센징"과 같은 멸시적인 발언을 삼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조선의 멸망 요인에 대해 지배층의 민중 수탈 문제를 지적하면서, 조선의 멸망은 조선이 자초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진정한 독립을 희망한다면 경거망동하기 보다는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 본 후 내적 역량을 키우라고 주문한다.
생각컨대, 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조선문제를 일본의 문제로 귀착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국제적 한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충분히 공감할만한 것이었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고종이 왕위에 등극하는 날, 이미 조선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저서인『朝鮮宮廷秘話, 國太公の眦』에는 고종 즉위식의 풍경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고종은 열두살에 왕위에 등극한다.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 종묘에 가서 승왕의 예를 행한다. 그 다음 장차 자신을 대신해 섭정하게될 국태공 흥선대원군을 알현하기 위해 엊그제까지 그가 살던 운현궁으로 행차한다.
천여명의 의장병들은 다양한 색깔의 의장기를 나부끼며, 말을 탄 판윤 등 고관대작들의 앞장에서 행고(行鼓)를 울리는데 마군별장(馬軍別將)이 이를 인솔한다. 뒤이어 보군삼대(步軍三隊)의 각각 그들의 파총(把摠, 정4품의 무관)들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그 뒤를 이은 기마부대 선두에는 보군3대가 초관(哨官)들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었다. 다음은 기마군악대, 선두에는 영군천총(領軍千摠)이 인도하고 뒤따라 나팔, 주라, 태평소, 호적, 북, 징, 계금, 관, 장 등의 취주군악이 요란하다. 의장대의 호위를 받은 훈련대장이 말을 타고 거들거리며 간다. 그다음에 활과 화살을 짊어진 금군(禁軍)기마대가 뒤따라 갔다.
멀리서 보면 이는 참으로 장엄한 광경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가까이 가보면 창신(槍身)은 녹이 슬어 광채가 없고, 깃발은 낡고 남루한 누더기 조각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의장 군졸들은 왜 그렇게도 하나같이 너절해 보이는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벌레먹고 빨지도 않은 너덜너덜한 걸레같은 군복에 전립(戰笠)은 쭈그렁 깡통같고..기괴하기 짝이없는 행렬이었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한 국가의 상징인 국왕의 의장의식이 이 모양이었으니, 나라꼴이 어디갔으리오. 너절한 군대의 군기가 빠진 모습만큼이나, 백성들의 민심 또한 헝클어졌을 테고 도처에는 민란과 부패가 성왕하니, 가는 곳마다 원성이 자자했을테지..
이런 국가가 망해놓고는 일본 탓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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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Minowski 2010/11/16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너무 칭찬이나 입바른 소리의 인플레가 심해서인지 쓴소리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이글루에서는 회원이 아니어서 댓긋 남길 기회가 없었는데, 이사하신 후에 댓글을 올리게 되네요 ^^;;
앞으로 생활바쁘시더라도 종종 좋은 글 남기실 여유가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글루스는 비로그인닉을 허용하면,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서요.
BigTrain 2010/11/16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이 회복할 수 없는 나선의 하강고리에 휘말린 게 어느 때부터인지 결론내릴 순 없지만..
최소한 철종대 이후 조선의 행보는 안습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을 듯 합니다. -0-
정조의 치세 이후부터 몰락했다고 보는게 좋겠지요. 그 이후부터는 왕들이 비리비리해서 중신들에게 말빨도 안먹히고, 기강이 무너질대로 무너진 상황이라, 일본이 아니었어도 자멸했을듯합니다.
한뫼 2010/11/16 2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 국왕 즉위식이 저 꼬라지였으면 ㅜ.ㅜ 조선 말기는 도저히 실드 쳐줄 수가 없어요
나츠메 2010/11/16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국을 모르는 민중들>
(1910년) 8월 29일은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이날은 우리의 국치일이었다. (중략)
나는 (경찰서 유치장) 수금 중에 이 같은 역사적 대사실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오후 3시경 뜻 밖에 서장실로 불러내더니 서장 某가 한일합병이 발표되었다는 사유를 말한 뒤에 계속해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전도가 유망한 청년들이니 아무쪼록 대세에 순응하여 신명을 그르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일장 훈시였다. 나는 그 자리에 거꾸러져 방성대곡하였다. 그리고 주먹으로 널마루 바닥을 두들겨서 손은 파상되고 의복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경들은 당황하여 인력거를 불러 태워주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경찰서 문전을 나서서 남대문통으로 종로를 경유하여 광화문 네거리까지 오는 도중에 시가(市街) 상태를 살펴본 즉 각 상점에는 매매 거래가 여상하였다.
오백년 왕국이 일조에 멸망하는 이 날이 이렇게도 안온무사할 법이 있을까 하는 이상한 감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중략)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우선 간단한 이유로서는 <이조(李朝)>는 원래 전제정치인 동시에 귀족의 계급정치였다. 더구나 그 종말의 '난정(亂政)'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폭정이었다.
------- 최린, <<여암문집>>, p. 172------
서로 말을 맞춘 것이 아닌데도, 반일 민족주의자인 최린과 일본인 호소이는 서로 동일한 증언과 논평을 하고 있네요. 서로 입장이 다른 양국의 지식인들이 동일한 문제를 지적할 정도니, 대한제국이 안 망하는 게 이상한 거지요.
진보사학자들은 최린의 이글을 두고, 아마 날짜를 착각했을거라고 자위합디다. 그럴리가 없다나요. ㅎ
제3의사나이 2010/11/16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이랑 뭐 비슷하네요 ㅎㅎㅎ
그렇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정치권부터가 저모양이니..
비밀댓글입니다
ㅁㄴㅇ 2010/11/17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이글루스에서 없어져시셔서 민주화된건 아닌지 걱정 많이 햇습니다. 앞으로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민주화도 당했고, 디스도 많이 당했지요. ㅎ
이번 사태는 그냥 분신 포퍼먼스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Eraser 2010/11/17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명 듣기 싫은 소리인데 답하려니 갑자기 멍해지는 이 느낌이란.txt
....쩝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이 아닐까요. ^^
에드워디안 2010/11/23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굉장히 씁쓸한 사실이군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판타지 소설을 창작한 채 거기에 몰두해 있으니...ㅉㅉ
PS. 앞으로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건필하시길~^^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글루스를 떠나게 되어 여러가지로 불편을 드리게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게 말입니다... 2011/03/06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국 남경중앙군관학교 조선인 독립운동 관련 교육에서 나오는, 조선 합병의 원인입니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hd_044r_0010_00200020 "그 동안 대원군과 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결국 대세가 기울어 李完用 때에 日·韓倂合이라는 미명 하에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왕조 五○○년 중엽까지는 충신이 배출되고, 문화도 진보하여 세상이 태평하였으나, 중엽 이후로 쇠퇴하여 그 말기 大院君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서양문화를 저지하는 실태를 보였고, 그 뒤 어리석은 임금이 이어져서 그 영토를 잃고 말았다. (중략) 우리들은 오늘날 조선왕조의 죄악을 미워함과 동시에 우리들은 조선민족을 위하여 조선왕조에 의하여 잃어버린 조국 조선을 광복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런 줄거리였다."
여담으로 조선왕조에 대한 한겨레21의 기사 http://www.hani.co.kr/section-021007000/2006/08/021007000200608240624075.html 입니다.
Section 2012/12/18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이 하지메의 관점으로 본것에 대해선 흥미롭지만 조선 삼천년이란 역사를 저렇게 단정한것은 큰 잘못이자 오만입니다.조선 역사만을 가지고 양반문화를 비판해야지요.왜 그걸로 전체를 싸잡아서 삼천년역사를 비난하고 저런식으로 단정합니까.
그리고 파르샤스 트루마 !!이건 무슨뜻인가요? 사진을 보니 전체주의같은걸 비꼬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