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고통 속에 끌려가던 그 장면이요”올해로 103세가 된 노옹은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회상하며 치를 떨었다. 만주에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 일본군의 사진기자로 현장을 누볐던 김재훈(가명) 목사는 80년 가까이 담고 있었던 참상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일본군을 위해 일했었다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신분을 밝히기는 꺼려했지만, 그의 증언에는 일제의 인권유린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12일 LA 한인타운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목사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진실 규명과 피해자 돕기에 나서고 있는 ‘나비 USA LA’(회장 안젤라 이)가 후원자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1년여 간의 설득 끝에 이루어졌다. 이 목사도 일본이 위안부 문제 대해 역사 앞에 거짓으로 일관하는 행태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증언에 임했다.
함경남도 갑산이 고향으로 LA에 거주하는 은퇴목사인 김씨는 24세이던 1935년 당시 만주 연변 도문 지역 독도 수비대로 불린 일본군 토벌대의 사진기자로 1년간 일하면서 현장에서 목격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 목사는 “지금은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도 그나마 단어가 순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신대, 즉 일본군에게 몸을 바친다는 것으로 불렸다”며 “그 당시 소녀들을 태운 군용트럭은 한 달에 4번, 즉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군안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토벌대가 항상 토벌 후에는 군용트럭에 20~30여명의 처녀들이 군 안으로 들어갔다. 이 중에는 15세의 어린 소녀들도 있었고 전부 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화려하지 않은 앳된 시골 소녀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녀들은 웃음기가 전혀 없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고 속옷을 입지 않고 맨 치마만 입으며 하루에 40~50여명의 남성을 상대해 왔다”고 증언했다.
김 목사는 또 당시 일본군 토벌대가 위안부 동원은 물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방화,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 아픈 장면이라며 말을 이어나간 김 목사는 “강제로 끌려온 게 뻔하고, 실제로 보고 겪은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을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 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함께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더 이상은 이와 같은 인권유린이 발생하지 않게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나이를 먹어, 정의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끝까지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투쟁해 주길 간곡히 바랄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나비 USA LA는 김 목사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와 연대해서 진실을 규명하는 자료로 쓸 예정이다.
<박주연 기자>